과한 물과 빛이 더해진 새싹
2018, 김세인 감독
<컨테이너>는 분명 성장영화의 자취를 따른다. 게다가 이런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청소년이 아닌 어린 초등학생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으며, 덕분에 좀 더 낮은 시각에서 그들의 내적 변화를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영화의 끝에서 희망보다 절망에 가까운 영화들이 겹쳐 보이는 건, 어쩌면 성장통을 겪고 난 뒤 나름의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모습을 간접적으로라도 드러내는 영화들과는 다른 구석을 이 작품에서 발견한 것일지도 모른다.
경주와 은애는 심한 장마 때문에 컨테이너로 된 임시 거처에서 주민들과 함께 생활하게 된다. 그러나 이 컨테이너도 비가 새고 물을 퍼내야 하는 등 열악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엄마와 같이 이곳에서 생활하는 경주와, 할머니가 유일한 보호자였지만 얼마 전 돌아가셔 혼자 남게 된 은애는 하루빨리 비가 그치고 자택들을 복구할 날을 기다리는 어른들 사이에서 조금씩 친해진다. 곧 장마는 끝나고 복구가 시작된다. 그리고 은애는 할머니와 살던 집이 복구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앞서 말했듯이 ‘성장영화’라는 프레임을 갖춘 이 작품에서는 총 세 번의 시련이 찾아온다. 물론 이것은 은애에게 닥친 시련이다. 경주 역시 은애와 함께 힘든 시간을 함께하지만, 영화는 경주를 은애의 관찰자 입장에 놓는다. 좀 더 정확히는 은애의 슬픔이나 근심을 확인하고 위로를 건네는 인물로서 이야기를 이어간다. 은애가 겪는 첫 번째 시련은 ‘일을 하지 않으면 먹을 자격도 없다’고 하는 아주머니들 사이에서 겪는 외로움과 서글픔일 것이다. 은애는 그 꾸지람들을 견디지 못하고 잠시 컨테이너를 나간다. 그리고 자신이 살던 집으로 찾아간다. 유통기한이 지난 치약으로는 이도 닦지 않으려 하던 은애는 흙탕물 속으로 들어가 돈을 찾아낸다. 그 돈으로 경주와 라면을 사 먹는 은애는 결국 ‘일을 하고 먹겠다.’는 다짐을 하고 웃음을 지으며 경주와 컨테이너로 돌아온다. 그렇다고 은애가 모든 것을 극복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은애의 ‘일’은 자신이 살던 집에만 국한된 것 같고, 그녀는 라면을 먹던 작은 슈퍼의 주인인 한 할머니를 보며 잠시 슬픔을 드러낸다.
두 번째 시련은 좀 더 크고 직접적으로 다가온다. 기다렸던 해가 뜨자 두 소녀는 빗물로 가득 찬 은애의 집으로 다시 찾아가 복구를 위해 물을 퍼내기 시작한다. 그러나 한참 물을 퍼내던 은애는 그 집이 복구 계획에 없다는 것을 알고 또 한 번 절망감을 느낀다. 결국 은애는 상실감을 안고 컨테이너로 돌아온다. 이때 경주는 햇빛에 말린 은애의 mp3를 가져와 다시 켜보라고 한다. 경주는 주변 어른들의 잔소리를 막아준 은애의 mp3를 다시 한 번 그녀에게 건네며 방금 듣고 온 어른의 말을 무시하라는 위로를 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은애는 더이상 mp3에 의존하지 않기로 선언하는 것처럼 기계를 바닥에 던져 밟아버린다. 그리고 컨테이너로 들어가 아주머니들이 말한 그‘일’들을 스스로 하기 시작한다. 물로 가득 찬 그녀의 원래 집이 컨테이너로 바뀐 것이다.
차가운 장맛비를 모두 증발시키고 숨겨진 희망을 하나씩 비출 것 같았던 여름의 햇빛은 야속하게 사람들을 더위로 몰아넣는다. 이 속에서 집을 찾았다고 생각한 은애는 묵묵히 컨테이너 내부의 바닥을 걸레질하며 자신의 일을 한다. 그러나 동시에 세 번째 시련을 마주하게 된다. 컨테이너도 곧 사라진다는 것이다. 비가 내려 집을 잃고 이번에는 비가 그쳐서 집을 잃게 될 상황에 놓인 은애는 결국 이번에도 스스로 집을 지켜내려 한다.
집을 잃지 않기 위해 은애가 선택한 행동은 컨테이너 안의 사람들이 떠나지 못하게 입구를 막는 것이다. 원래 살던 집에 가득 차 있던 물은 집 밖으로 내보내야하지만, 지금은 그 안의 것들을 내보내지 말아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이토록 큰 절망감에 빠진 어린 소녀를 이해하고 위로를 건넬 수 있는 것은 오직 컨테이너의 창문을 통해 나갈 수 있는 또 다른 어린 소녀이다. 은애의 큰 상실감을 대변하며 입구를 막고 있는 돌들을 본 경주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돌을 치운다. 이는 그동안 은애의 슬픔을 어떻게든 위로하려 했던 경주의 행동의 연장선상에 있어 보인다. 그러나 더이상 은애에게는 효과가 없다.
언급했듯이 경주는 철저히 은애를 관찰하는 입장이자 위로하는 인물이다. 흙탕물에서 돈을 찾아 나와 ‘앞이 보이지 않았다.’고 말한 은애에게, 라면의 김이 서린 안경을 쓴 채 똑같이 앞이 보이지 않음을 익살스럽게 표현하며 웃음을 이끌어 낸 것이 경주이다. 하지만 아직 갈 곳이 남아있는 경주가 건네는 위로나 웃음은 은애의 가장 큰 시련을 끝내 해결해 줄 수 없다. 때문에 아무리 경주가 돌을 치우려 해도 계속해서 돌의 개수는 줄어들지 않는다. 약자들은 이처럼 힘이 빠질 때까지 차이 없는 돌 나르기를 하며 눈물겹도록 다툴 수밖에 없다. 잃을 대로 잃고 지칠 대로 지친 그들 중 결국 떠나는 이는 잃을 것이 더이상 없는 쪽이다. 뒤를 돌아보며 비통한 눈빛을 보내는 은애를, 경주는 이번엔 따라가지 못한다. 그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위로밖에 없기에.
며칠 후 경주는 엄마와 함께 이모의 집으로 차를 타고 가게 된다. 비가 오는 거리를 달리는 차 안에서 경주는 엄마에게 묻는다. “이거 장마야?” 엄마는 소나기라고 답한다. 경주에게도 이번 여름 장마의 기억은 잊기 힘든 상처로 남았겠지만, 이 소녀의 눈으로 목격한 또 다른 소녀 은애에게는 살이 찢겨 나갈 정도의 성장통이 되어, 치유 불가능한 고통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다시 비가 온다. 설령 그것이 장마가 아닌 잠시 지나가는 소나기일지라도, 갈 곳이 더이상 없는 그 소녀는 잠시 내리는 이 빗방울들을 이젠 감당할 수 없어져 버린 건 아닐까.
김세인 감독은 구름이 껴 빛이 내려오지 않는 하늘 하래서, 어떻게 이 두 소녀의 슬프게 빛나는 눈동자를 찾아낸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