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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야 Feb 26. 2020

단편 영화 <컨테이너>

과한 물과 빛이 더해진 새싹

<컨테이너>

2018, 김세인 감독


 <컨테이너>는 분명 성장영화의 자취를 따른다. 게다가 이런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청소년이 아닌 어린 초등학생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으며, 덕분에 좀 더 낮은 시각에서 그들의 내적 변화를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영화의 끝에서 희망보다 절망에 가까운 영화들이 겹쳐 보이는 건, 어쩌면 성장통을 겪고 난 뒤 나름의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모습을 간접적으로라도 드러내는 영화들과는 다른 구석을 이 작품에서 발견한 것일지도 모른다. 


 경주와 은애는 심한 장마 때문에 컨테이너로 된 임시 거처에서 주민들과 함께 생활하게 된다. 그러나 이 컨테이너도 비가 새고 물을 퍼내야 하는 등 열악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엄마와 같이 이곳에서 생활하는 경주와, 할머니가 유일한 보호자였지만 얼마 전 돌아가셔 혼자 남게 된 은애는 하루빨리 비가 그치고 자택들을 복구할 날을 기다리는 어른들 사이에서 조금씩 친해진다. 곧 장마는 끝나고 복구가 시작된다. 그리고 은애는 할머니와 살던 집이 복구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앞서 말했듯이 ‘성장영화’라는 프레임을 갖춘 이 작품에서는 총 세 번의 시련이 찾아온다. 물론 이것은 은애에게 닥친 시련이다. 경주 역시 은애와 함께 힘든 시간을 함께하지만, 영화는 경주를 은애의 관찰자 입장에 놓는다. 좀 더 정확히는 은애의 슬픔이나 근심을 확인하고 위로를 건네는 인물로서 이야기를 이어간다. 은애가 겪는 첫 번째 시련은 ‘일을 하지 않으면 먹을 자격도 없다’고 하는 아주머니들 사이에서 겪는 외로움과 서글픔일 것이다. 은애는 그 꾸지람들을 견디지 못하고 잠시 컨테이너를 나간다. 그리고 자신이 살던 집으로 찾아간다. 유통기한이 지난 치약으로는 이도 닦지 않으려 하던 은애는 흙탕물 속으로 들어가 돈을 찾아낸다. 그 돈으로 경주와 라면을 사 먹는 은애는 결국 ‘일을 하고 먹겠다.’는 다짐을 하고 웃음을 지으며 경주와 컨테이너로 돌아온다. 그렇다고 은애가 모든 것을 극복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은애의 ‘일’은 자신이 살던 집에만 국한된 것 같고, 그녀는 라면을 먹던 작은 슈퍼의 주인인 한 할머니를 보며 잠시 슬픔을 드러낸다.

  

 두 번째 시련은 좀 더 크고 직접적으로 다가온다. 기다렸던 해가 뜨자 두 소녀는 빗물로 가득 찬 은애의 집으로 다시 찾아가 복구를 위해 물을 퍼내기 시작한다. 그러나 한참 물을 퍼내던 은애는 그 집이 복구 계획에 없다는 것을 알고 또 한 번 절망감을 느낀다. 결국 은애는 상실감을 안고 컨테이너로 돌아온다. 이때 경주는 햇빛에 말린 은애의 mp3를 가져와 다시 켜보라고 한다. 경주는 주변 어른들의 잔소리를 막아준 은애의 mp3를 다시 한 번 그녀에게 건네며 방금 듣고 온 어른의 말을 무시하라는 위로를 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은애는 더이상 mp3에 의존하지 않기로 선언하는 것처럼 기계를 바닥에 던져 밟아버린다. 그리고 컨테이너로 들어가 아주머니들이 말한 그‘일’들을 스스로 하기 시작한다. 물로 가득 찬 그녀의 원래 집이 컨테이너로 바뀐 것이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차가운 장맛비를 모두 증발시키고 숨겨진 희망을 하나씩 비출 것 같았던 여름의 햇빛은 야속하게 사람들을 더위로 몰아넣는다. 이 속에서 집을 찾았다고 생각한 은애는 묵묵히 컨테이너 내부의 바닥을 걸레질하며 자신의 일을 한다. 그러나 동시에 세 번째 시련을 마주하게 된다. 컨테이너도 곧 사라진다는 것이다. 비가 내려 집을 잃고 이번에는 비가 그쳐서 집을 잃게 될 상황에 놓인 은애는 결국 이번에도 스스로 집을 지켜내려 한다.


 집을 잃지 않기 위해 은애가 선택한 행동은 컨테이너 안의 사람들이 떠나지 못하게 입구를 막는 것이다. 원래 살던 집에 가득 차 있던 물은 집 밖으로 내보내야하지만, 지금은 그 안의 것들을 내보내지 말아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이토록 큰 절망감에 빠진 어린 소녀를 이해하고 위로를 건넬 수 있는 것은 오직 컨테이너의 창문을 통해 나갈 수 있는 또 다른 어린 소녀이다. 은애의 큰 상실감을 대변하며 입구를 막고 있는 돌들을 본 경주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돌을 치운다. 이는 그동안 은애의 슬픔을 어떻게든 위로하려 했던 경주의 행동의 연장선상에 있어 보인다. 그러나 더이상 은애에게는 효과가 없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언급했듯이 경주는 철저히 은애를 관찰하는 입장이자 위로하는 인물이다. 흙탕물에서 돈을 찾아 나와 ‘앞이 보이지 않았다.’고 말한 은애에게, 라면의 김이 서린 안경을 쓴 채 똑같이 앞이 보이지 않음을 익살스럽게 표현하며 웃음을 이끌어 낸 것이 경주이다. 하지만 아직 갈 곳이 남아있는 경주가 건네는 위로나 웃음은 은애의 가장 큰 시련을 끝내 해결해 줄 수 없다. 때문에 아무리 경주가 돌을 치우려 해도 계속해서 돌의 개수는 줄어들지 않는다. 약자들은 이처럼 힘이 빠질 때까지 차이 없는 돌 나르기를 하며 눈물겹도록 다툴 수밖에 없다. 잃을 대로 잃고 지칠 대로 지친 그들 중 결국 떠나는 이는 잃을 것이 더이상 없는 쪽이다. 뒤를 돌아보며 비통한 눈빛을 보내는 은애를, 경주는 이번엔 따라가지 못한다. 그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위로밖에 없기에.


출처 - 네이버 영화


 며칠 후 경주는 엄마와 함께 이모의 집으로 차를 타고 가게 된다. 비가 오는 거리를 달리는 차 안에서 경주는 엄마에게 묻는다. “이거 장마야?” 엄마는 소나기라고 답한다. 경주에게도 이번 여름 장마의 기억은 잊기 힘든 상처로 남았겠지만, 이 소녀의 눈으로 목격한 또 다른 소녀 은애에게는 살이 찢겨 나갈 정도의 성장통이 되어, 치유 불가능한 고통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다시 비가 온다. 설령 그것이 장마가 아닌 잠시 지나가는 소나기일지라도, 갈 곳이 더이상 없는 그 소녀는 잠시 내리는 이 빗방울들을 이젠 감당할 수 없어져 버린 건 아닐까.     

 김세인 감독은 구름이 껴 빛이 내려오지 않는 하늘 하래서, 어떻게 이 두 소녀의 슬프게 빛나는 눈동자를 찾아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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