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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야 Jan 15. 2021

영화 <소리도 없이>

들리지 않는 그녀의 마지막 목소리, 그리고 생존의 몸짓들.

<소리도 없이>

2020, 홍의정 감독



<소리도 없이>에는 몇몇 의문스러운 장면들이 존재하는데, 초희(문승아)가 밤에 경찰로부터 도망치다 풀숲에서 넘어진 직후가 그 장면들 중 하나일 것이다. 그녀가 천천히 일어나고, 갑자기 어둡던 화면이 밝고 선명해지며 가만히 서 있던 그녀는 다시 풀숲을 가로질러 움직이기 시작한다. 분명 이는 감독의 연출적인 선택이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글은 해당 장면을 이해해보려는 시도에서 시작됐음을 밝힌다.     




<소리도 없이>는 분명 장르의 외피를 두르고 있다. 범죄자들로 추정되는 이들로부터 시체를 처리하는 일을 받아 생계를 이어가는 태인(유아인)과 창복(유재명), 그럼에도 나름의 도덕적·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있어 직접적인 범죄행위에는 가담하거나 연루되는 것은 꺼린다. 그리고 유괴된 초희라는 소녀를 의도치 않게 떠맡는다. 아침에는 달걀을 팔며 돈을 버는 두 남자 중 한 명은 다리를 절고, 다른 한 명은 말을 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과 생활하게 된 소녀는 가부장적인 아빠로부터 남동생과 차별대우를 받아 왔을 뿐 아니라 아빠가 유괴범들에게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자신의 몸값을 흥정했다는 사실마저 듣게 된다.


이쯤 되면 비슷한 영화들이 머릿속을 지나갈 것이다. 범죄나 어떤 심각한 문제에 연루된 인물들이라는 설정 안에서 (표면적으로라도)사회적으로 약자인 그들이 우연히 만나 ‘유사 가족’의 형태를 그리고, 그것이 진짜 가족보다 더 큰 연대감을 표출하며 일종의 사회문제까지 건드리는 마무리 말이다. 대표적으로 <레옹>(1994), <아저씨>(2010) 그리고 <화이>(2013), <비밀>(2015), <어느 가족>(2018) 등을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장르의 단계까지 온 설정을 마주한 뒤 걱정이 앞서는 이유는, 터무니없이 감정을 앞세워 도덕적이지 못한 행동들을 묵인하거나 작품 자체가 용서해버리는 순간들 때문이기도 한데, 이로 인해 캐릭터는 평면적으로 남고, 서사는 힘을 잃기도 한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소리도 없이> 역시 비슷한 맥락으로 진행되며, 특히 태인이 초희를 구하기 위해 양복을 입고 자전거로 질주하는 부분에서 기시감이 느껴지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측 가능해 보이는 이 작품에는 언급한 것처럼 의문스러운(또는 의외의) 장면들이 존재하는데, 이 내용은 연출적인 것뿐 아니라 캐릭터와 각본을 통해서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또래에 비해 상대적으로 현명한 초희라는 캐릭터의 행동 중 의문스러운 점들이 존재한다. 화장실에 들어가 태인에게 기다리라 부탁하는 것이나 풀숲에서 재회한 태인의 손을 잡고 집으로 향하는 모습,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서 선생님과 재회한 뒤 잠시 고민한 후 이내 그녀에게 태인의 행위를 밝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아무리 현명해도 모든 상황에선 그럴 수 없는 어린 소녀라는 보편성을 드러내려는 작품의 선택일 수 있고, 앞서 말한 것처럼 범죄의 주체자들이나 관련자들에게 알맞은 형벌이 내리는 것을 작품이 외면할 수 없어서 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사 가족의 모습을 그려온 작품들을 돌이켜보면, 초희라는 캐릭터는 그간 보아온 비슷한 상황 속 인물들과는 다른 특징을 갖고 있다.


소녀의 선택     


태인이 초희를 구하는 시퀀스는 분명 우리에게 익숙한 장르의 모습이다. 창복이 든 카메라 앞에서 유괴당한 사실을 잊은 듯한 그녀의 미소 역시 그 익숙함에 힘을 싣는 장면일 텐데, 이 때문에 태인을 마지막에 도망치도록 만든 이 작품의 선택은 분명 의문스럽다. 어쩌면 이 작품의 의도는 처음부터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지 않았을까.


초희라는 캐릭터를 상기해보면, 마지막에 그간 태인의 행위(들)를 그녀의 선생님에게 그대로 말하는 것이 데려다준 그에게 큰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그렇다면 태인과 문주(이가은) 그리고 창복과 보낸 시간 속에서 그녀의 웃음은 진심이 아니었을까. 이는 분명 진심의 순간일 것이고, 카메라 역시 그렇게 담고 있다. 다시 말해 그녀의 웃음은 익숙해진 상황 속에서 일정량의 여유를 찾은 한 인간의 모습이지, 함께 생활하는 이들을 의도적으로 속이려는 행동이 아니다. 결국 <소리도 없이>에서 우리가 마주했던 장르적인 순간들은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여 도달하는 연대 모습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보여주려는 과정인 듯하다.


열쇠를 가져가려다 태인을 깨워버린 초희는 그에게 화장실이 가고 싶다 말한다. 화장실까지의 동행을 요청한 뒤, 산짐승의 소리를 듣고 태인의 팔을 잡는 그녀의 모습은, 그래도 어른한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어린 소녀의 모습을 표현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녀의 생존 본능이 ‘졸린 태인’보다 ‘어두운 화장실’과 ‘짐승의 존재’가 더 두려운 것이라 인식했기 때문인 것도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두 남자와 초희가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쓰고 있던 가면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이름을 몰라 소녀를 ‘토끼야’라고 부르는 창복의 대사와 함께 표현하려는 것이 단순히 ‘유머’이거나, 아니면 인상적으로 새 인물의 등장시키려는 의도일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극의 긴장감이나 흥미를 높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삶을 이어가기 위해서 시체를 처리하는 두 남자와의 ‘만남’과 그간 초희가 겪어온 ‘일상’이 짐승이 도사리는 숲속과 같다는 것을 비유를 통해 시각적으로 드러내려는 시도로 보인다는 것이다. 즉, 초희는 어린 소녀인 동시에 어떻게든 생존해야 하는 숲속의 ‘토끼’와 같은 존재이다.


 이와 함께 극 안에서 소녀의 선택들이 다른 비슷한 장르 영화와 달라 보이는 이유는 처음부터 이 작품이 의도한 바가 그것들과 다르기 때문이리라.

출처 - 네이버 영화

연대가 아닌 생존 


의문스러운 장면들을 재고해 볼 순서인 듯하다. 태인이 초희를 구출해 오고, 그가 약을 구하러 간 사이 그녀는 도망간다. 태인이 진심으로 자신을 구하러 온 것을 알지만, 초희라는 캐릭터는 태인의 집에서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생존을 위한 방법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그렇기에 운동장에서 초희의 마지막 행동은 그간 서로 간의 이해와 공감으로 쌓아온 신뢰에 대한 배신이 아니라, 이를 포함한 그녀의 모든 행동들을 ‘생존’이라는 명분에서 비롯된 결과로 볼 수 있다.


태인은 예상치 못한 초희의 행동을 보고 학교를 빠져나와 도망친다. 숨이 차 더 이상 달릴 수 없을 때까지 달린 그는 입고 있던 양복의 겉옷을 벗어버린다. 탈피의 모습으로서 일종의 성장을 표현하는 행위일 텐데, 만약 이 역시 장르적으로만 본다면 그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단순한 반성의 순간이 돼버리고 만다. 그러나 언급한 것처럼 생존이라는 단어가 중심이 되는 순간 앞으로의 생존 방식을, 생존력 강한 소녀로부터 깨닫게 되는 장면이 되고, 작품은 그 깊이를 드러낸다.


이제 초희가 풀숲에서 넘어진 장면으로 돌아가 볼 때가 된 것 같다. 생존을 위해 도망친 그녀는 또 다른 위험(자전거 탄 경찰)을 만나 다시 풀숲으로 들어간다. 넘어진 그녀에게 들리는 것은 주변의 작은 소리일 뿐이다. 그녀는 일어난다. 그리고 화면이 갑자기 선명해진다. 어쩌면 그 순간은 그녀의 시선, 또는 감각을 대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둠 속에서 어느 방향으로 향해도 위험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생존을 위해서 주변의 모든 것에 감각을 집중시켜야 하는 약한 동물의 생존 본능이 감각적인 연출을 통해 드러나며,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만든다. 결국 살아남기 위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그녀가 태인을 만나 직접 손을 잡고 집으로 이끄는 이유는, 그와의 재회 자체를 다행으로 생각해서가 아닌, 그 상황에서 태인을 선택하는 게 ‘차악(次惡)’이자 ‘최선’이기 때문이다.


결국 ‘누구와 어떻게 불행을 헤쳐나갈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선택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냐’는 것이다. 경찰을 흙으로 묻는 태인의 근처에서 들리는 소녀의 손뼉 소리에는 연민의 감정도 담겼지만, 생존을 위해 좀 더 강한 자의 곁에 있으려는 본능의 소리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숲속을 빠져나와 일상의 공간으로 돌아간 그녀는 또 다른 생존을 위해 태인과의 일을 선생님에게 말한다. 그런데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태인은 도망간다. 생존을 위해서. 곧 초희는 그녀의 부모와 재회한다. 그리고 슬픔이나 기쁨과 같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그저 고개만 숙여 인사할 뿐이다. 어쩌면 태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듯, 우리는 그녀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된 것이 아닐까. 과연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생존을 위한 그녀의 몸짓을 온전히 끝내는 방법일까.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을 끝내는 방법은 창복과 같은 비극을 맞이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자전거를 타고 귀가하는 태인의 뒤로는 늘 다채로운 노을이 보인다. 이는 그의 악의 없는 삶을 대변하려는 작품의 의도일까. 단지 생존을 위해 갈등하는 삶 속에서 잠시나마 그 불안함을 잊는 누군가의 찰나이지 않을까. <소리도 없이>의 에필로그는 그들의 행복한 시간이나 기억이 아니다. 또 다시 마주할 생존의 고통을 잠깐이라도 잊으려는 우리의 안간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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