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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야 Jul 29. 2022

단편영화 <백야>

힘 잃을 순간을 재회로 전복시키는 연출의 성취

<백야>

2020, 염문경


*현재 이 작품은 '왓챠'나 '네이버 시리즈온'등을 통해 감상 가능합니다.





성희롱 사건이 있었다. 지혜(염문경)는 사건의 피해자이고, 가해자인 연극계 원로 창완(김은석)은 무혐의 판결을 받았다. 이후 창완은 지혜에게 일방적으로 사과를 하겠다며 찾아온다. 게다가 그녀의 직업 역시 희곡 작가인 탓에 주변의 시선이 편할 수 없다. 그리고 얼마 후 창완의 자살 소식을 듣는다. 게다가 죽은 창완의 딸로 보이는 소녀가 지혜의 주변을 맴도는 듯 보인다. 불안과 죄책감에 빠진 그녀는 결국 소녀에게 연락해 만나자고 한다.


영화에 있어서 단편은 장편을 축약한 형태가 아니다. ‘일부’라고도 말할 수 없다. 단편은 그만의 방식으로 작동한다. 보통 단편은 ‘개봉’이라는 상업적인 측면을 고려하지 않기에, 충분한 자본이 뒷받침되지 않아, 각본 단계부터 힘을 갖출 설정이나 아이디어가 상대적으로 더 중요하다.

출처 - 네이버 시리즈온


수많은 장편이 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많은 수의 단편이 존재한다. 이 때문에 처음 보는 모습을 갖춘 단편 속 이야기를 마주하기는 쉽지 않다. 또한 ‘메시지’라 불리는 방향성은 결말이라는 일종의 한계에 닿기에, 새로워 보이는 이야기 역시 기시감을 남긴다. 결국 비슷해 보이는 이야기를 어떻게 변주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새로운 인상을 받게 할 것인지가 중요해진다.


기시감을 지닌 <백야>에는 변주가 있다. 그리고 이야기와 맞물려 힘을 발산하는 연출적인 선택이 있다.




두 명의 피해자

     

피해자 한 사람만의 이야기는 많지 않다. 히어로 무비가 아니기에, 자립적 행위는 무기력함을 낳거나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때문에 비슷한 처지에 놓인 이들의 동행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는 결말에서 자연스럽게 일종의 연대(連帶)의 이미지를 가지며 관객들로 하여금 공감을 이끌어낸다. 허지은, 이진호 감독의 단편인 <신기록>, <해미를 찾아서> 등이 그렇다. 불안에 놓인 두 인물의 상황을 비유적인 연출을 통해 설득하거나, 한 구도 안에 들어오는 인물에 더해진 미장센 등의 요소들을 통해 인물들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게 만든다.

 

<백야>의 시작에서도 두 피해자가 등장하는데, 이들은 같은 사건 속 같은 피해를 입은 ‘지혜’와 ‘벨마’(베튤)이다. 분명 두 사람의 존재는 <백야>의 필수적인 요소일지는 몰라도 그간 본적 없는 설정은 아니다. 게다가 지혜의 상상 속에서 벨마와 지혜 자신이 사건 때의 행동을 다그치는 연출 역시 두 사람의 동행을 예고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곧 벨마는 떠난다. 지혜의 경우처럼 무혐의로 끝난 것이 아님에도 결국 벨마는 이야기에서 사라져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외국인 유학생’이라는 벨마의 설정 덕분에 서사적인 의도가 크게 드러나지 않지만, 그간 보아온 이야기들과 비교하면 ‘다른 이야기를 해보겠다’는 일종의 선언처럼 다가오며, 이는 언급했던 ‘기시감’과 ‘변주’에 해당한다.

출처 - 네이버 시리즈온


가해자는 죽었고, 피해자는 한 명이 되었다. 주변 시선으로 인한 지혜의 불안은 점차 커져간다. 그리고 그녀는 가해자의 딸인 정아(정수미)를 마주한다. 극의 초반부터 창완의 딸로 예측된 정아의 행동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고소’와 ‘그의 자살’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항의’로 연출되었다. 지혜가 벨마에게 한 ‘걔는 우리 때문이라 생각하겠지?’라는 대사 역시 이에 힘을 싣는다. 그렇기에 정아 역시 피해자가 되고, 지혜는 피해자인 동시에 의도치 않은 가해자로 남아 죄책감이 더해져 불안은 배가되기 시작한다. 그렇게 다시 피해자는 두 명이 되었다. 한 사건으로 비롯된 또 다른 두 피해자이지만, 두 사람의 위치는 정반대에 놓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지혜가 느끼는 ‘미안함’이라는 감정 때문에 두 피해자에겐 간극이 생겨버린다. 아, 그렇다면 이것은 마치 봉준호 감독의 작품들에서, 특히 <기생충>과 같은 작품들에서 드러나는 일종의 계급 갈등이 녹아든 이야기일까.     

출처 - 네이버 시리즈온


지혜와 정아 사이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어떤 ‘차이’는 두 사람이 만나 대화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가장 크게 연출로 나타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장면으로 오기 전까지 어떤 차이들을 지나쳐왔다. 바로 무혐의를 만들어낸 ‘위계(位階)’이다.


위계의 존재

     

창완이 지혜를 찾아오고, 법적 무혐의를 언급하는 창완에게, 지혜는 부정돼버린 위계의 존재를 명시한다. 사실 지혜라는 인물뿐 아니라 <백야>의 연출 역시 위계의 존재를 확인하려 한다. 이는 높낮이를 나타내는 몇몇 컷들에서 드러나는데, 언덕을 올라가는 지혜의 모습이나, 창문으로 정아를 보는 지혜의 모습이 그것이다.(누가 더 높고 낮냐의 접근보다는, 해당 요소의 존재 자체를 연출한 것이리라.) 그리고 지혜와 정아가 공원에서 만난다. 흥미롭게도 두 사람이 만나는 순간, 두 인물 사이엔 마치 계층 차이로 보일만큼의 위계가 발생한다.   

출처 - 네이버 시리즈온


창완의 죽음과 정아의 상황에 대해 알고 싶어 전화를 한 건 지혜였다. 그전에 직접 학교를 찾아가기도 했으며, 그녀가 벨마에게 한 대사처럼 정아가 죽음에 대해 자신을 탓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정아를 만나 그녀에게 계속해서 질문하다 눈시울이 붉어지고, 정아는 일어난다. 지혜의 시선을 따라간 각본의 선택으로 인해, 정아가 먼저 일어나기 전부터 이미 두 사람 사이엔 일종의 위계가 존재했고, 결국 일어난 정아에게 지혜가 사과하는 순간 그 차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리고 만다. 그런데 보통 이런 경우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출처 - 네이버 시리즈온


지혜와 정아는 둘 다 피해자이다. 공원에서 만난 두 사람은 같은 의자에 앉으며 전방에 위치한 카메라는 인물들을 비슷한 위치에 놓는다. 하지만 감정의 차이가 생기고 한 사람이 일어나는 순간, 줄어들 것이라 느껴지던 차이는 극대화된다. <백야>의 결말이 일종의 연대에 닿는다는 조건 속에서, 어떻게 두 사람을 같은 위치로 되돌릴 수 있을까. 로우(low)나 하이(high) 등 그 어떤 카메라 각도를 적용해도 지혜의 위치는 현저히 낮은 곳에 존재한다. 지금까지 보아온 수많은 비슷한 결의 작품들을 돌이켜보면, 다수의 선택은 해당 순간을 바로 ‘결말’로 만들거나 또 다른 서사를 ‘전개’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 앞서 동력으로 삼은 감정들과 어긋나 갑작스럽거나 자아도취에 빠진 무기력함을 만들어버리며, 후자의 경우 더 많은 시간과 힘이 불가피해 필요 이상의 서사가 늘어난다. 그러나 <백야>는 또 다른 선택을 보여준다. 놀라운 변주로 보이는 그 선택은 바로 프레임 밖으로까지 나가버린 정아를 바로 다시 데려와 의자에 앉히는 것이다. 위계를 보여준 이유는 그것을 없애기 위해서라 말하는 것처럼, 이 순간 <백야>가 주장해온 위계는 마치 마술처럼 전복되듯 무너지고, 두 사람은 동일한 위치에 놓이며 함께 같은 곳을 바라봄에 있어 어떤 이질감도 보이지 않는다. 

출처 - 네이버 시리즈온


정아가 일어나는 순간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던 기억을 돌이켜보면, <백야>의 마지막 선택은 일종의 반전과 같은 연출이리라. 각본 단계로서 고려했을 때 너무나 단순해지기 쉬운 두 사람의 순간은 찰나의 재회를 통해 대단한 힘을 표출한다. 이는 계속해서 위계라는 요소를 주장하던 작품이 그것의 존재를 없애야 하는 순간이 언제인지를 적시하기에, 아무리 ‘감정’이나 ‘낯익은 설정’과의 동행이 있어도 작품이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백야>에는 지혜를 이해하지 못하는 현진(이종민)과 주변인 등 평면적인 인물들이 있어 언급한 기시감 때문에 모든 장면이 흥미로울 수는 없다. 다만 힘을 발산하는 한순간의 연출이 작품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설득하기에 충분히 눈에 띄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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