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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야 Sep 26. 2022

단편영화 <부스럭>

경계를 경계로 인식할 때, 우리는 영화를 본다.

<부스럭>

2022, 조현철,이태안

*해당 작품은 티빙(TVING)의 <전체관람가+:숏 버스터> 속 한 작품입니다.

*<부스럭>은 ‘5화’를 통해 볼 수 있으며, 이어지는 ‘6화’의 ‘리뷰’편까지 함께 보신 뒤 이 글을 읽는 것을 추천합니다.




25분짜리 단편 <부스럭>의 우선적인 장점은 분명 ‘장르적 재미’이다. 종합된 장점들을 하나씩 나열하는 게 영화라는 예술에서 별로 좋은 방식은 아니겠지만, 일단 <부스럭>의 ‘편집’과 ‘음악’은 적확하면서도 감각적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일정 수준에 닿은 영화적 요소는 자본 덕분이기도 하다. 사실 <부스럭>은 ‘전체관람가’라는 콘텐츠의 지원이 있기에 가능했을 것이고, 그 자본적인 울타리 안에서 ‘카메라’와 ‘미술’ 역시 큰 힘을 발휘한다. 자본적 여유는 시간의 그것을 보장하고, 이어서 다양한 컷을 만들 기회로 이어진다. 상당수의 단편작들에서 부동(不動)이나 경직된 카메라를 마주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그 한정된 자본에 있을 것이다. 또한 불충분한 미술 때문이기도 한데, 공간이나 소품의 부족은 카메라 이동을 제약한다. 그러나 자본과 ‘이사’라는 <부스럭>의 초반 설정은 미술의 고민을 적잖이 덜어냈을 것이며, 카메라와 인물 사이의 물리적 거리는 이와 비례하여 상당히 자유로워진다. (물론 자본만의 결과가 아닌 건 명백하다.)

출처 - TVING


그리고 배우의 힘이 있다. 천우희가 만들어낸 ‘세영’의 캐릭터는 배우가 가진 이미지의 힘뿐 아니라 연기력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력이 대단하다. 또한 도구적으로 서사에 의문만 제공한 채 소비될 수 있는 현철(조현철)이라는 캐릭터 역시 각본에 매몰되지 않고 매력을 발산한다. 이는 특히 연출자가 배우를 맡은 장점일 것이다.(당연히 아닌 경우도 많다.)


그러나 이러한 영화 문법·기술적인 측면에서의 성취가 해당 작품의 유일한 장점이 아닐 것이다. <부스럭>의 특징은 다른 부분에서 더 커 보이는 것도 사실일 텐데, 오히려 그 부분이 앞서 언급한 장점들을 무디게 만드는 것처럼도 느껴진다. 하지만 돌출되어 보이는 그 특징들 역시 <부스럭>의 성취이며, 독립적으로 보이던 두 성취는 동시에 어떤 질문은 던진다.

출처 - TVING




위험한 프레임


좋은 영화를 깊게 다루는 건 좋지만, 글이라는 도구로 영화라는 ‘종합 예술’을 평론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한계에 직면한다. 한 예로 ‘켄 로치’의 최근작들이 있을 텐데, 평론의 영역을 무력하게 만드는 그의 연출이 그렇고, ‘신자유주의’라는 일종의 ‘프레임’이 작품들을 가둬버릴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 전혀 다른 느낌으로 보이지만, <부스럭> 역시 비슷한 맥락을 형성한다. <부스럭>을 제작한 ‘전체관람가’의 ‘리뷰’(6화)에서 이어지는 <부스럭>의 ‘외적 서사’와 ‘확장’을 단순히 글로 옮기기에는 그 예술성을 온전히 담기 힘들 것이고, 작품 속에 보이는 몇몇 ‘상징적 요소’들을 언급하는 순간 치명적인 프레임을 형성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글을 통해 분석하는 것은 이와 같이 (좋은)작품들에 있어서 다소 위험한 접근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부스럭>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은 본인에게 아직 해당 방법이 최선이기 때문이리라.)


출처 - TVING


<부스럭>을 제약할 수 있는 ‘프레임’에 대한 예가 있다면 바로 ‘깁스’와 ‘카메라’일 것이고, 이는 현철이라는 인물의 독특함을 보여주는 외적 이미지인데, 흥미롭게 또 다른 이미지로 이어진다. 바로 2020년 성착취물로 충격적인 범죄를 일으킨 ‘성범죄자 조씨’의 모습이다. 인터뷰 등에서 두 연출자가 직접 밝힌 바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현철을 형성하는 해당 요소들은 어느 정도 의도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것은 ‘위험한 프레임’이다.


사실 영화의 끝에서도 현철이 어떤 인물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해당 작품 역시 현철의 고백이나, 대화를 몰래 녹음하는 세영과 친구들의 행동을 통해 현철의 외적인 힘을 줄여나간다. 하지만 시각적으로 대응하는 상징적 요소들은 자주 영화 속 흥미의 대상이 되고, 이를 중심으로 서사를 재설계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인데, 만약 언급한 깁스와 사회 문제를 결합하여 영화를 상기해보면 <부스럭> 사이사이에 마주하는 ‘카메라’라는 존재 역시 ‘범죄’가 진행되는 과정으로 접근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연출자들의 인터뷰에서 이를 의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고, 더욱이 영화 전체를 이해하고 싶은 다급한 욕구는 작은 요소만으로 작품 전반을 설득하려는 편협함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일대일 대응’시키는 단어를 사용해 어떤 프레임을 구축했을 때, 이를 포함한 글은 영화의 가치를 퇴색시킬 위험이 있다. 그럼에도 <부스럭>은 이미지에 쉽게 매몰되지 않아 보이며, 그 힘은 경계에 선 듯한 연출의 공일 것이다.

출처 - TVING


영화의 경계, 영화라는 경계


언급했듯 작품 속 현철의 모습은 서사 안에서 전형적이지 않다. 만약 쌓여있는 핸드폰과 깁스를 한 그의 이미지가 범죄의 요소라면, ‘JSY’은 ‘전서영’이라는 인물이 담긴 영상을 저장한 핸드폰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편으로 ‘세영’으로 추측될 수 있는 ‘JSY’와 현철의 고백, 그리고 빠져나오라는 현철의 마지막 전화는 이를 부정하기도 한다. 또는 연출자의 언급처럼 서로 다른 세계의 두 ‘현철’ 또는 ‘세영’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화면에 잡히는 또 다른 카메라들은 뭘까. 범죄라는 영역에서 작동하는 일종의 폭력성인가. 아니면 마치 어떤 경계에서 갈등하고 있는 세영과, 실제로 그녀를 연기하는 배우 ‘천우희’를 담은 카메라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인가. 그럼 영상으로 소비되는 배우가 일종의 피해자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일까. 아니면, 친구 혹은 연인이었던 그들의 이사와 재회를 통해, 늘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하는 배우들의 삶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인가.(그런 점에서 정진영 감독의 <사라진 시간>(2020)이 떠오르기도 한다.)

출처 - TVING


이렇듯 단순하게 대응되지 않는 <부스럭>의 요소들은 일종의 경계 위에서 작동하기에 서사와 함께 긴장감을 유도한다. 이것이 바로 <부스럭>이 가진 연출의 힘일 텐데, 단일한 접근이나 감정으로 서사를 진행하지 않아 작품에 대한 단순한 시각뿐 아니라 장르적으로 분류되는 것조차 거부한다. 하지만 맨 처음 언급했듯, <부스럭>의 장점은 장르적 재미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담은 ‘드라마’와 ‘서스팬스’가 결합된 서사를 연기, 촬영, 편집, 음악 등으로 매끄럽게 표현한다.


그런데 이것은 ‘전체관람가’의 ‘리뷰’ 속 두 연출자의 말처럼, 그들이 가장 원했던 것이 아니다. 영화 문법과 기술적인 성취가 <부스럭>의 핵심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영화가 처음 상영된 1895년 겨울이 아니기에, 우리는 파리의 한 카페에서 열차가 도착하는 50초짜리 영상을 보다 소스라치게 놀랄 일은 없다. 오히려 기술의 발전으로 영상 속 컷들의 경계는 희미해지고, 오롯이 영상에 집중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영화에 담긴 이야기가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더 확실히 인식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감독 조현철의 말처럼, 영화의 문법인 ‘컷’ 또는 ‘경계’를 인식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영화를 부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출처 - TVING


<부스럭>의 기술적 만듦새에는 치명적인 틈이 없다. 하물며 영화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이 장점을 정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부스럭>은 이를 부정하지 않는 동시에, 의도적으로 틈을 만들어낸다. 필름을 연상시키는 화면은 관객들의 몰입을 잠시 늦추고, 한 번씩 존재를 드러내는 카메라들은 우리가 보는 영상이 누군가 화면 밖에서 찍은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영화가 시작되고 영화 속에만 존재할 수 있는 어떤 사건이나 이질감을 영화 밖으로 끄집어내는 <부스럭>은 그렇게 계속해서 관객에게 주체성을 요구하고 있다.


그래, 나는 지금 영화를 보고 있다.






영화에 존재하는 어떤 틈은 우리가 보는 영화의 필수적 요소이자 가치이고, 그 틈을 스크린과 객석 사이에도 만들었다면, 지금 어떤 영상을 보는 우리의 삶이 또 다른 영화일지도 모른다. ‘전체관람가’ 속 리뷰의 끝부분에서 두 감독과 <부스럭>이 보여준 것은, 잠깐이나마 영화라는 예술에 닿으려는 확장의 순간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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