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보고야 말겠다는 의지, 모든 컷에 영화가 스며들 듯.
2019, 김지홍 감독
*해당 글은 김지홍 감독의 또 다른 작품인 <구더기, 흩어지다>를 함께 감상한 뒤 읽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영화에 관한 영화가 있다. ‘시네마천국’(1988)부터 ‘바빌론’(2023)과 ‘파벨만스’(2023)까지, 유수의 작품들이 바로 그 예시가 된다. 그리고 영화에 대한 견해와 사랑을 하염없이 발산한다는 점에서 이들은 일정 영역을 공유한다. 하지만 눈에 띄는 이 공통점이 하나의 ‘장르’로 취급되지는 않는다. 그간 장편에서 ‘영화를 다룬다’는 것은 플롯의 중심인 ‘소재’보다는, 연출의 방향을 잡는 ‘태도’에 가까웠기 때문이리라.
한편 영화를 다루는 것이 소재이자 장르가 된 영역이 있는데, 이는 다름 아닌 단편영화이다. 매년 우리는 수많은 영화제의 단편 섹션에서 ‘영화를 만드는 인물’들을 마주한다. 그리고 이들의 갈등은 주로 촬영장이나 영화를 주제로 대화하는 공간에서 벌어진다. 이런 기시감은 소재에서 비롯된 한계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창작자의 한계에서 비롯된 소재 선택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단편 속 영화라는 설정은 이제 장르의 영역에 닿아있다.
특히 흥미로운 지점은, 영화를 다루는 데에 있어 장편의 ‘비장르화’와 단편의 ‘장르화’의 이유가 ‘자기 투영’으로 같다는 사실이다. ‘영화 창작자의 영화 이야기’는 개인의 이야기와 경험 그리고 감정이 포함된다. 이는 장르라는 상업성과 대비되기에, 손익분기점을 교차시킬 연출자와 각본가 그리고 배우의 힘이 확실하지 않다면 투자가 없고, 제작이 어려우며, 장르가 될 만큼의 표본을 이루지 못한다. 이와 달리 개인의 자본으로 제작되는 단편은 오히려 개인의 영화적 경험을 투영하는 의지가 바로 원동력이며, 장편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많은 수가 제작된다.
그런데 대다수의 경우 단편 제작은 대학이나 영화 학교 등 비슷한 과정을 거치기에, 비슷한 소재나 연출을 매년 발견하는 게 불가피하며, 영화 속 영화가 장르화 된 것은 당연할 것이다. 더구나 장편제작 등에 아직 참여조차 하지 못한 영화학도들의 경우, 제한적인 경험과 자본은 그 자체로 물리적인 한계가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런 한계를 뛰어넘는 단편들이 존재한다. <감독님 연출하지 마세요>(이대영, 2017)와 같이, 영화라는 제한적인 소재 앞에서 원테이크를 사용한 효과적인 연출로 많은 단편 연출에 영향을 준 작품이 있으며, <종말의 주행자>(조현민, 2018)와 같이 영화라는 예술의 필연성을 장르로 전복시키며 설득해내는 작품이 있다. 그리고 김지홍 감독의 <번개가 떨어졌다>는 영화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고도, 왜 영화였어야만 하는지를 설득해낸다.
그의 공간과 선택
단순히 러닝타임뿐만 아니라, 장편과 단편의 두드러지는 요소는 분명 자본이다. 협소한 공간 속 촬영은 카메라의 위치와 동선을 상기시켜 몰입을 방해한다. 부족한 자본 탓에 불충분한 소품들은 인물의 성격과 역사가 녹아있어야 할 공간을 보여주지 못한다. 전자의 해결책으로 자주 선택되는 방식은 카메라가 벽에 붙어 서서 인물들을 한 프레임에 담는 픽스샷이다. 그렇다면 후자의 해결책은 공간으로부터 시선을 분산시키는 핸드헬드나 클로즈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통 공간과 미술의 한계는 동행한다. 그래서 좁아진 공간에서 미술은 이미 한계에 직면해 있다. 때문에 갈수록 주 배경이 실내가 아닌 현장 로케이션인 단편을 마주했을 때 걱정을 한시름 놓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감각일지도 모른다(물론 이것은 저예산 장편인 경우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반대로, 제한된 단편에서 설득력을 가진 공간을 마주할 땐 장르가 전복된 것만큼이나 흥미로운 공간들로 다가온다.
혼자만의 예술이 아니기에, 영화는 촬영 전 과정에서부터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 게다가 각본가가 연출자라면, 제한은 시나리오 단계부터 시작된다. 부족한 자본 안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충돌하고, 이때부터 연출자의 선택은 작품의 완성도에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감독 김지홍의 작품에서는 두 요소가 충돌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번개가 떨어졌다>의 주인공 ‘남자’는 수년 동안 식물인간이었기에, 작품 속 공간은 해당 시간만큼이 비어있어야 한다. 그의 또 다른 작품인 <구더기, 흩어지다>의 공간 역시 그렇다. 사람들이 출입이 반복되는 여자의 공간과, 늘 청소해야 하는 남자의 공간은 채워지지 않은 상태로 남아야 한다. 결국 김지홍의 공간이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소품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단편 영역 속 제한된 미술을 필연적인 서사 요소로 만들어 내는 데에 있다. 그리고 <번개가 떨어졌다>에는 그러한 미술을 더 효과적으로 만드는 선택들이 존재한다.
공들인 미술이 한 번씩 드러나는 <구더기, 흩어지다>와 달리, <번개가 떨어졌다>의 미술은 또 다른 영화적 요소를 통해 효과적으로 서사 속에 스며든다. 우선 ‘1.33:1’이라는 화면비가 그렇다. 인물 중심인 이야기인 탓도 있겠지만, 이는 자칫 과도하게 비어 보일 수 있는 미술을 보호한다. 또한 시종 낮은 톤의 ‘색감’은 영화의 분위기인 동시에 공간의 존재감을 부드럽게 다듬는다. 이처럼 단순히 문법적이거나 기술적으로 보일 수 있는 <번개가 떨어졌다>의 요소들은 서사 안에서 맞물려 작동한다. 그런데 여기엔 더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
<구더기, 흩어지다>에는 결핍된 두 사람 중 한쪽이 상대의 아픔을 공감하려는 서사가 있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 놓인 듯한 <번개가 떨어졌다>는 더 나아가 영화라는 예술의 존재 가치를 피력한다.
영화가 된 여자
대본이 있다. 역할 대행 서비스를 하는 여자는 대본을 보며 남자의 누나를 연기한다. 그렇게 여자는 시간당 5만 원에 누나가 되었다. 이는 캐스팅 과정을 담은 영화 제작 방식과 같다. 남자는 기억 속 누나를 설명하고, 대사가 틀리면 상황극을 잠시 멈추고 여자에게 주의를 준다. 아닌 게 아니라 <번개가 떨어졌다>의 요소들은 영화를 말하고 있다. 단지 적확할 정도로 연출에 들어맞아 눈에 띄지 않을 뿐이다. 어느 순간부터 단절된 남자의 공간은 그의 과거를 설명하고 촬영 세트장의 분위기를 풍긴다. 1.33:1의 화면비는 미술을 보호하고, 인물의 얼굴과 표정을 강조하며, 영화라는 예술 자체를 상기시킨다. 색감은 미술의 존재감을 낮추고, 영화 곳곳에 놓인 슬픔을 대변하며, 낮은 톤으로 또 다시 영화를 상기시킨다. 그리고 고전으로만 이루어진 음악 역시 장르화 되지 않았던 과거 무성 영화들을 떠오르게 한다.
그렇다면 왜 영화였어야 했을까. 그저 영화라서 영화를 표방한 것이라면, 그저 종속된 채로 영화에 대한 애정만 발산할 뿐인 게 된다. 그러나 남자가 마주하려는 것이 단지 수년 전 누나와의 추억이 아니었던 것처럼, <번개가 떨어졌다>가 선택한 영화라는 메시지는 영화에 대한 맹목적인 헌사가 아니다.
여자가 남자의 집에 온 이유는 그녀에게 그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경험이나 결핍이 있어서가 아니다. 단지 대행 서비스 책자 속 그녀의 모습을 남자가 보았기 때문이다. 영화도 그렇다. 배우를 섭외하는 이유는 창작자의 상상 속 이미지와 부합해 보이기 때문이지 사경을 헤맨 경험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러나 배우는 타인을 조사하고 연기하는 과정에서 직접 경험한 듯 공감하는 순간을 맞는다.
남자는 외출하고 여자는 잠든다. 여자는 꿈속에서 종이에 손가락을 베인다. 그리고 번개를 맞아 거실에 누워있는 남자를 본다. 이때 화면에 담긴 여자의 모습은, 그녀를 처음 만나 과거를 설명하는 남자의 모습과 겹친다. 그렇게 아픔이라는 그녀의 감각은 번개를 맞았다고 한 남자의 고통으로 확장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남자가 번개를 맞았던 날을 연기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누나가 과자를 사오라고 한 날, 남자는 사고를 당했다.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그때를 연기하는 여자는 남자가 집을 나서자 미소를 잃는다. 단지 남자의 공간 안에서 그가 동생이 되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곧 고통을 겪게 될 결과를 배우로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여자는 사고를 당해 누워있는 남자를 마주한다. 남자는 과거 병실에 누워있을 때 얼굴에 닿은 세 사람의 손길을 점점 구별할 수 없어졌다고 말한다. 누나가 되었지만, 고통을 듣고 정해진 대로 연기할 수밖에 없는 여자는 그만하자고 말한다. 하지만 남자에게는 아직 가장 중요한 순간이 남아 있다. 눈을 감고 있는 동생에게 건네는 누나의 마지막 대사는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이다. 남자가 맞았던 건 번개가 아니라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여자는 마지막 대사를 슬픔에 빠진 채로 건넨다. 하지만 남자는 누나의 담담한 목소리를 들었었다. 눈을 감고 있던 그는 놀랍도록 차갑게 말하는 누나의 얼굴을 반드시 봐야 한다. 이 말을 들은 여자는 잡고 있던 남자의 손을 놓으며 다시 말한다.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마침내 남자는 누나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남자와 눈이 마주친 여자는 다시 동생인 남자의 손을 잡는다. 병실에 앉은 누나가 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지만 잡고 있던 손을 놓는 순간, 여자는 타인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롯이 누나가 된 순간, 앞에 누워있는 상대를 온전히 공감하며 다시 손을 잡을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여자는 영화가 되었다.
영화를 찍는 이유는 단순히 기차가 역에 도착하는 풍경을 기록하려는 행위가 아니다. 내가 보지 못했던 것을, 내가 반드시 봐야만 하는 것을 끝끝내 보고야 말겠다는 주체적 행위이다. <번개가 떨어졌다>의 남자는 가족과 재회하기 위해 다시 누나를 봐야만 했고 결국 마주했다. 남자를 처음 본 여자는 아픔의 경험이나 결핍 없이도 영화 속에서 그의 누나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길을 걷다 번개 소리를 듣고 말한다. “아무도 번개에 맞지 않으면 좋겠다.” 누군가의 의지로 시작한 영화는 그렇게 타인뿐 아니라 보편의 공감을 성취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