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의 끝, 재회의 순간들
2016, 김종관
김종관의 이야기는 늘 ‘이야기’ 자체의 가치를 표출한다. 그중 <더 테이블>이나 <아무도 없는 곳> 속 인물들의 대화가 대표적이다. 말하자면 각본의 힘을 가장 크게 발산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이 바로 그일 텐데, 덕분에 ‘이야기’의 중요성이 눈에 띄며, 사건이 벌어지는 특정 ‘공간’에 상대적으로 눈이 덜 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김종관의 공간이 특별한 이유는 매번 감각적인 ‘인서트’의 힘뿐 아니라, ‘일상의 공간’이라는 점에 있다. 장르에 얽매이지 않는 그의 공간은 사건이나 감정에 있어서 획일적이지 않다.
자주 나오는 카페가 그렇다. 죽음을 목전에 둔 순간부터 사후까지를 담고 있는가 하면,(<아무도 없는 곳>) 고백의 순간부터 권태까지를 한 곳에서 보여주기도 한다.(<더 테이블>) <최악의 하루> 역시 마찬가지이다. 비정형적인 일상이 녹아든 이 작품 속에도 카페가 자주 등장하는데, ‘만남’의 순간부터, ‘각성’ 그리고 ‘이별’ 후의 지질한 순간이 담겨 있다. 결국 사건을 다루기보다는, 일련의 사건으로 쌓여가는 일상의 공간 속 이야기가 김종관의 세계이리라.
그런데 흥미롭게도 <최악의 하루>에는 일상의 순간을 벗어나는 ‘마법의 순간’이 있다. 각자 최악의 하루를 보낸 두 사람의 재회 직전 이 순간은, 분명 ‘결말’을 위한 연출자의 영화적 선택으로 작동한다. 대화하던 현경(최유화)이 사라지고 홀로 남겨진 료헤이(이와세 료)를 응시하는 해당 장면은 분명 의문스럽다. 단지 영화적 해석의 필요성 때문이 아니다. 김종관이 고수해온 일상의 순간이 아님에도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그 어떤 감정에도 자리를 내어줄 수 있는 그의 연출 덕분일까. 결국 이 글은 ‘현경’과의 만남이 왜 ‘료헤이’와 ‘은희(한예리)’의 만남으로 이어질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려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다.
또 다른 이정표
당시 김종관이라는 감각적인 연출가의 작품을 기다렸던 이들이라면, 개봉 전 이 작품의 제목이 ‘최악의 하루’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떤 작품이든 창작자가 일일이 작품을 해체하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는 이상, 작품의 내용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바로 제목이며 이는 보통 작품의 이정표로 활용된다. 그리고 <최악의 하루>로 달라진 제목은 작품을 응시하는 시선의 변화를 만들어냈을지도 모른다. <최악의 하루> 속 처음과 끝의 클로즈업 샷은 은희이다. 때문에 이 작품의 얼굴을 그녀로 생각하는 건 너무 당연하며, 이를 전적으로 제목의 탓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제목이 다름 아닌 ‘최악의 여자’라면 이 완고한 생각에는 일순간 금이 간다.
료헤이와 은희는 각자의 ‘최악의 하루’를 겪는다. 그리고 우리는 은희의 하루에 좀 더 중점을 둔다. 료헤이의 하루는 길 잃음으로 시작한 ‘반응의 상황’인 반면, 은희의 하루는 그녀 스스로 불러온 ‘주체적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지막 두 사람이 재회하는 순간에서 좀 더 주체성을 보이는 인물은 남산으로 직접 찾아온 료헤이이다. 상기해보면 <최악의 하루>의 처음과 마지막 얼굴은 은희이지만, 시작과 끝의 목소리는 료헤이의 것이다. 어쩌면 처음부터 우리는 은희보다 료헤이의 하루를 중심에 놓고 보았어야 하지 않았을까. ‘최악의 여자’라는 이 작품의 원제는 처음부터 어디를 응시하고 있었을까.
‘최악의 하루’와 ‘최악의 여자’을 지칭하는 것은 ‘나와 타인’을 구별하는 것만큼 차이가 크다. 전자는 은희와 료헤이뿐 아닌 등장한 모든 인물들, 더 나아가 우리의 하루로 확장될 수 있지만, 후자의 경우 지칭되는 대상은 오로지 은희 한 사람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처음부터 그녀를 어떤 ‘대상’으로 표현한 료헤이의 목소리를 들었다.
“꿈 덕분에 이야기를 하나 생각했다. 곤경에 처한 여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욕망과 재회
작가 료헤이의 이야기 속 인물들은 모두 위기에 직면한다. 그리고 그들을 만들어낸 료헤이 역시 위기에 직면한다. 그가 만들어낸 은희 역시 위기에 놓인다. 료헤이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은희를 포함한 인물들을 위기에서 꺼내주지 않는다. 그리고 인물들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중 은희의 욕망은 이 이야기를 보는 ‘당신들’을 믿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창작자는 이것이 자신의 것은 아니라 말한다. 한편 이 욕망을 목격한 어떤 독자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글 속에 존재하는 그들의 모습이 주체적으로 존재하는 자신과 닮아 추락하는 듯한 고통을 느꼈기 때문이다. 창작자는 ‘아쉽지만 그 욕망은 단지 아는 누군가의 것’과 같다고 말한다. 의문을 가진 독자는 다시 묻는다.
“정말 그 사람들을 알고 있나요?
내 무의식으로부터 잉태된 존재들의 욕망은 내 것과 닮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어느 순간 그들 자체로 존재하며 나아간다. 은희 역시 료헤이가 만든 위기 속에서 스스로 욕망에 빠져 최악의 여자가 되었다. 그리고 료헤이는 은희를 만들어내고서도 그녀를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일까, 카페에서 나와 이름을 물어봐도 그녀는 답하지 않는다. 하지만 최악의 하루 끝에서 문득 어떤 욕망을 깨달은 료헤이는, 자신 때문에 위기와 욕망에 빠진 그녀를 만나 다시 한 번 이름을 묻는다.
“은희.”, “응히?”, “아. 으,니”, “으..니”, “아, 예스. 은희”.
마침내 두 사람이 재회했다. 여전히 서로의 언어와 생각이 달라 완전하게 소통할 수 없지만, 느낌으로 이해하고, 춤으로 보여주며, 거짓말해야 하는 서로의 직업을 말하며 서로의 욕망을 이해하고 공감한다. 그리고 창작자인 료헤이는 처음으로 해피엔딩을 떠올린다. 그것은 그간 위기에 빠뜨린 인물들에 대한 사과인 동시에, 스스로 욕망을 깨우친 또 하나의 각성일지도 모른다. 마법과 같은 이 순간은 분명 두 인물에게 중요한 순간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일상의 공간에 놓여있다. 또 다른 창작자 김종관은 이 역시 지극히 자연스러운 우리의 하루와 재회의 순간임을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