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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야 Feb 05. 2024

영화 <괴인>

충돌하는 미해결, 완성되는 미완성.

<괴인>

2023, 이정홍


출처 - 네이버 영화

한국 영화에서 2023년은 유난히 신인 감독들이 빛나던 해였다. 유재선 감독의 <잠>, 김미영 감독의 <절해고도>, 조현철 감독의 <너와 나> 등, 이 첫 작품들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한 해 동안 받은 선물들을 회상하는 듯한 그런 해였다. 그리고 해당 작품들의 공통된 특징이 있다면, 그건 장르 문법을 적절하게 따라가면서도 연출의 개성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소재, 감정, 캐릭터 등 각기 다른 장르의 영역 안에서 그들의 효과적인 자취는 차기작의 기대를 모자람 없이 이끌어낸다.


그런데 한편으로 장르와 맞물린 작품들의 매력이 이후 활동에서는 아쉬움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아무리 흥행이나 평단에서의 성취가 선명했어도, 상업적 기대 없이 차기작은 제작될 수 없다. 때문에 많은 관심을 받았던 한 연출자의 차기작들이 자의든 타의든 데뷔작의 자기 복제로 이어지거나 고유한 연출력과 맞물리지 않는 각본을 만나게 되어, 첫 만남에서 보여준 매력이 크게 줄어버리는 경우를 매년 목격하게 된다(그럼에도 일률적인 장르 선택이 창작자와 관객을 모두 만족시키는 경우 역시 존재한다). 물론 이건 결과물만으로 창작의 과정과 고통을 짐작하고 평가하고 싶은 관객의 입장이리라.


그런데 2023년이 끝나갈 무렵 마주한 이정홍 감독의 데뷔작 <괴인>에서는 가장 쉽게 드러나는 감정마저도 장르 안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도대체 어디서 기인한 건지 알 수 없는 <괴인>의 매력은, 연출자 이정홍의 차기작에 대한 기대나 우려로 다가갈 여유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난 이 작품이 왜 좋을까.

영화를 이해하려는 욕심에 끙끙 앓았던 시간은 문득 스스로에 대한 이해 부족을 넘어 자기 부정으로 이어지는 듯했고, 재관람은 불가항력이었다. 어쩌면 이 글은 영화의 매력을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설득하려는 목적보다는, 영화와 스스로를 이해해보려는 과정의 기록일지도 모르겠다.



어긋난 요소들


이 작품의 눈에 띄는 특징 또는 매력은 분명 ‘어긋남’일 것이다. 본적 없는 배우들의 얼굴, 피아노 앞 인부들, 독특한 구조의 집 등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이러한 요소들은 다른 작품에서도 마주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해당 선택들은 불충분한 자본에서 비롯되며, 이는 인위적인 공간과 미술의 부족 그리고 카메라의 경직성으로 드러난다. 반면 <괴인> 속에서 마주하는 요소들은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이지 않는다. 인물들이 담긴 달리(Dolly)샷을 시작으로, 다양한 공간과 섬세한 카메라 그리고 인물과 소품의 적절한 배치가 이를 대변한다.


<괴인>은 장르적 효과를 거부하는 듯한 새로운 얼굴들을 내세우면서도, 클로즈업을 포함한 동적이고 정제된 장르적 프레임을 통해 독립영화에 대한 맹목적이고 구조적인 접근을 늦춘다. 그 연장선에서 정원까지 딸린 정환(안주민)의 집은 ‘구조적 특징’을 다소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만, 거주하는 기홍(이기홍)의 캐릭터와 함께 흥미를 유지한다. 또한 감각적인 유머를 드러내는 피아노와 인부들의 풍경은, 앞서 망원 렌즈로 섬세하게 담긴 노동의 순간을 통해 다층적인 접근 가능성을 높인다. 이처럼 ‘다양성 영화’라는 범주 안에서 <괴인>은 일정 수준 이상의 (물적·시간적)자본을 통해 관객의 예상과 흥미롭게 어긋난다. 그러나 이렇게 표면적인 어긋남은 <괴인>의 전반적인 독특함 중 일부일 것이다.


제목이기도 한 ‘괴인’을 대표하는 기홍의 행동은 이상하리만치 쉽게 갈등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갈등에 닿을 동력이 없는 듯하다. <괴인>에서 기홍이 추구하던 것은 뭐였을까. 피아노 학원 원장인 아영(이소정)과의 깊은 관계였을까. 그러나 옥상에서 커플을 보던 그는 미끄러지며, 연인이 된 자신을 상상하는 것조차 차단된다. 또한 바에서 한 여자를 집에 초대하면서도 애써 농담이라 매듭짓고 만다. 그렇다고 자신의 차를 망가뜨린 자에게 복수하거나 수리비에 상응하는 보상을 원하는 인물도 아니다. 오히려 하나(이기쁨)와의 관계는 ‘아니면 가라’는 비교적 덤덤한 기홍의 반응에서 비롯된다. 그렇게 그는 갈등의 심지가 보이면 회피한다. 하지만 이는 의도치 않은 또 다른 갈등으로 이어진다. 혹시 그의 회피는 또 다른 욕망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잠을 청하는 남자


무언가를 회피하는 욕망, 특히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욕망을 우리는 많은 작품에서 보아왔다. 그리고 이로 인한 결과는 대부분 직접적으로 죽음에 닿거나 그 상징 등을 표출한다. 이때 죽음은 상당 경우 ‘잠’이라는 부동(不動)성과 동행한다. 사실 <괴인>의 편집이 흥미로운 이유 중 하나는 잠든 기홍 때문이다. 영화의 시작에서 비밀번호를 몰라 학원 앞에서 요란하게 쩔쩔매는 경준(김경준)과 기홍의 상황은 곧 바로 학원 안에서 잠든 기홍의 모습으로 넘어간다. 이 두 컷은 잠든 기홍을 부르는 경준의 목소리로 이어져 있는데, 일정한 시간이 지난 두 컷 사이를 연결하며 마치 기홍이 꿈을 꾼 듯 연출한다. 또한 차 문제로 전화한 아영으로부터 자신을 ‘그만 괴롭히라’는 말을 들은 직후 잠들어 있는 기홍의 모습 역시 꿈의 이미지를 드러낸다. 마지막 침대에서 기홍이 눈을 감는 모습을 포함해, 그의 잠은 늘 난처한 상황과 이어진다. 그렇다면 원치 않은 삶의 갈등들 때문에 그는 죽음이라는 결심에 다가가고 있는 것일까.


사실 영화가 죽음을 응시하는 듯한 순간이 있었다. 기홍과 그의 아버지가 산에 오르고, 과일을 먹던 기홍은 갑자기 일어나 천천히 절벽 앞으로 향한다. 하지만 죽음의 가능성을 비웃듯이, 영화는 초반 옥상에서처럼 그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주거나, 절벽 밑을 그의 시점숏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원 테이크로 찍힌 이 장면에서 기홍은 ‘오, 무섭네’라 말하며 다시 돌아와 앉는다. 다시 말해 그의 회피와 잠은 죽음이라는 극적인 욕망을 바라보지 않는다. 영화는 그 회피로 비롯되는 주체적 가능성을 단호히 차단(또는 회피)하고 있으며, 결국 그의 잠은 갈등을 회피하려는 하나의 수단으로 자리 잡는다.


그렇다면 지속적으로 회피하면서도 죽음과 같은 강력한 갈등을 거부하는 <괴인>은 어떤 힘을 가졌길래 영화의 끝까지 흥미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장르적으로 규모가 큰 갈등은 그 자체로 관성을 갖지만, 많은 것들이 제한된 제작 상황에서는 적정한 갈등이 필요하다. 너무 큰 갈등은 표현이 힘들어 무기력한 연출로 이어지고, 너무 작은 갈등은 장편이라는 시간 안에서 인위적으로 부풀어 설득과 긴장을 유지하기 힘들다. 그러나 <괴인>은 회피를 통해 갈등의 팽창을 막고, 회피로 인해 정리되지 않는 갈등을 의도적으로 쌓아가며 연쇄적인 긴장감을 유지한다. 괴인의 서사와 갈등은 명료하지 않다. 이는 가족, 친구, 사랑, 거주, 금전, 죽음을 포함한 전반적인 삶을 다루는 동시에, 계속되는 회피와 함께 기저 갈등에서 비롯된 유기성을 갖기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괴인>은 삶 곳곳에 깃든 갈등에 직면한 세대를 보여주고, 회피라는 선택으로 연명하는 삶 속의 우리 역시 괴인이라 말하고 싶은 걸까. 하지만 <괴인> 속 회피는 기홍의 전유물이 아니었으며, 타성에 젖은 듯한 그의 회피는 <괴인>의 근본적인 ‘갈등구조’에서 비롯된 ‘무기력함’일지도 모른다. <괴인>을 구축하는 힘 중 가장 눈에 띄는 ‘계급’이 있기 때문이다.


계급과 갈등


경찰에서 온 연락 때문에 기홍은 정환에게 언성을 높인다. 애초에 정환 때문이라 말하는 기홍의 말에 정환은 화를 참듯 숨을 내뱉는다. 이들은 갈등의 직전까지 다가가지만, 이내 정환이 사과하고 또 한 번 갈등은 유보된다. 이 장면이 흥미로운 이유는 배우들의 좋은 연기도 연기지만, 이때의 회피는 기홍이 아닌, ‘정환 또는 영화’의 회피로 보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기홍과 달리 <괴인> 안에서 가장 적극적인 인물이 정환이기에 그렇다. 그렇다면 집주인인 그는 어떤 인물이며, 더 나아가 기홍과 정환의 관계는 또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사실 서사적으로 크게 눈에 띄지 않았을 뿐, <괴인>이 가진 구조는 분명 일종의 계급이었으며, 언급했듯 캐릭터와 연출을 통해 관객으로 하여금 인지할 시간을 잠시 늦췄을 뿐이다. 영화의 시작에서 학원 건물의 계단을 오르다 말고 급하게 내려오거나, 옥상에서 미끄러지고 핸드폰마저 주우러 가는 기홍의 모습, 그리고 집이 옆으로 이어져 있음에도 1층으로 내려와서 집주인을 마주하는 그의 행동은 조금만 거리를 둬도 그 의도가 선명해진다. 물론 정환의 부름 없이는 2층에 올라가지 않는 기홍의 모습이나, 건물에서 두 번이나 떨어지는 하나의 상황 등은 캐릭터와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엮여 구조 응시를 차단한다. 그러나 계급이라는 요소가 희미한 가장 큰 이유는 앞서 말한 갈등의 회피 때문이다. 이제는 장르의 영역에 자리한 ‘계급’이라는 단어는 갈등과의 동행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괴인>에는 수직적 갈등뿐 아니라 하위 계급의 수평적 갈등 역시 적극적이지 않다.(영화의 초반 기홍과 인부의 다툼 역시 일방적이라 힘을 잃고 만다.) 그렇다면 갈등이 없는 이 서사 안에서, 정환이나 아영 같은 인물은 높이 차이의 존재를 확인시키는 상징적 존재일 뿐일까.


한편 표면적으로 나뉘는 이 두 계급의 차이는 노동의 행위로 드러난다. 그리고 피아노 학원 안에서 기홍과 인부들이 일하는 모습이 담긴 컷들은 적잖이 흥미롭다. 프레임 하나하나가 계산된 높이와 위치에서 망원레즈와 함께 깊이를 강조하며 작동하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계급과 같이 구조적 부조리를 다룬 작품들은 물리성을 강조하는 노동의 순간을 표준 렌즈나 광각 렌즈를 통해 화각을 넓혀 투박하고 평면적인 노동의 풍경을 강조해 현실성을 부각한다(특히 좁은 공간에서는 촬영의 한계로 더욱 그렇다). 하지만 <괴인>은 화각을 좁혀 그 노동의 풍경보다는 피사체의 움직임에 초점을 둔 연출을 택한다. 그런데 아영의 피아노 소리가 들리는 순간, 움직이지 않는 기홍과 인부들의 모습은 앞선 노동의 순간과 달리 아이레벨(eye level)보다 높고 평면적인 프레임에 담기며 현실성이 강조된다. 유머의 외피를 두른 이 장면이 좀 더 흥미로운 이유는 쉼 없이 움직이는 노동의 순간이 아닌, ‘휴식의 순간’에 부조리함을 드러내는 데에 있다. 이들을 편하게 하는 피아노 선율은 귀가하는 차 안에서 들려야 하지, 노동하는 와중에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또한 정환과 기홍의 차이 역시 노동으로 드러난다. 일하지 않음을 선택한 정환이 일하지 못하는 기홍에게 사과하는 방식은 노동의 기회를 주는 것이다. 하지만 현정(전길)의 친구와 함께 카페 디자인을 둘러보고도 기홍은 일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계급적인 차이를 보여주는 정환이 추구하는 건 무엇일까. 그는 기홍에게 학원을 가보자고 말하고, 우연히 만난 하나를 자신도 만나길 원한다. 그런데 직접 오토바이를 몰고, 돈을 써가면서까지 그가 얻는 것은 단지 그 사건의 해결보다는 연장에 가깝다. 이와 함께 그가 아내인 현정과 결혼한 이유 역시 애매하다. ‘사랑할 자신은 없지만 좋은 아내가 되겠다’는 그녀의 무기력한 말을 듣고도 그녀와 결혼한 정환은 이에 큰 불만이 없어 보인다. 애초에 사랑하지 않았기에 권태 역시 없는 듯한 이들의 관계 역시 정환을 의문스러운 존재로 만든다. 어쩌면 물질적인 것에는 전혀 관심 없어 보이는 그가 원하는 건 자신이 보고 싶은 하위 계층인들의 행동과 반응이 일지도 모른다.


잠에서 깬 남자


좀처럼 화를 내지도 않고 다른 이들에게 대접하는 것을 즐기는 듯한 정환은, 삶에서 여유를 찾기 힘들어 보이는 이들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모은다. 그는 기홍의 차가 망가진 것을 가장 먼저 발견하고 해결책을 제시한 인물이다. 그러나 이는 해결되지 않고 기홍의 금전적 문제만 표출되거나 아영 등 주변 인물과의 관계를 악화시킬 뿐이고, 이는 더 나아가 하나라는 인물과도 이어진다. 그러나 정환은 이런 갈등이나 관계를 귀찮아하거나 끊으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되려 함께 테니스를 배우자고 말하거나, 자신과 관련 없는 누군가(하나)를 보러 가고 싶다 말한다. 어쩌면 정환이 화를 참으며 보인 회피는 기홍과 달리 갈등을 끝맺지 않으려는 의도가 아닐까.


정환의 집으로 들어온 이들은 어느 순간 그곳에서 나가지 못하는 듯하다. 정환의 아내인 현정 역시 그 집에서 나가지 못하는 인물 중 한 사람이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네 사람이 대화하는 도중 ‘손톱’과 ‘애정 결핍’을 관련시키며 ‘총총이’를 자처하는 정환의 모습은, 순간적으로 그 외의 세 사람을 결속시키는 듯해 의미심장하다. 무의식적으로 남과 동등한 관계임을 부정하는 듯한 정환의 눈에, 이 세 사람은 자신과 다른 모습으로 비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나가 간 뒤, 취한 정환은 잠들어 있고, 기홍과 현정 둘은 방에서 술을 마신다. 자신에게 왜 세를 내줬냐는 기홍의 말에 하나는 정환 탓을 하며 설명한다. 이에 기홍은 농담하듯 대답한다. “그럼 내가 강아지 대용이네?”

낮에 술을 마시던 정환과 기홍이 테라스로 나오자 근처의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자 정환은 말한다. “현정이 왔다보다” 그리고 정환은 개가 짖는 소리를 또 한 번 듣는다.

술에 취해 잠든 그는 개 짖는 소리에 잠에서 깬다. 창문을 열자 간 줄 알았던 하나가 돌아와 며칠 머물 수 있냐는 부탁을 하고, 어느새 짖는 소리는 잦아들어 있다.


새벽에 돌아온 기홍은 2층에 오르려다 자고있는 하나를 발견하고 다시 내려간다. 문제를 직면하고 해결해보려는 그의 시도는 2층까지 제대로 오르지도 못하며 또 한 번 좌절된다. 그는 늘 그래왔듯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한다. 잠에서 깬 자와 잠을 청하는 자, 또는 갈등을 이어가려는 자와 갈등을 회피하려는 자가 한 공간에 있다. 서로 다른 이유로 끝나지 않는 이 미완성의 부조리를 <괴인>은 집착에 가까운 눈으로 응시하며 완성해낸다.




한 평론가가 말했듯, 데뷔작부터 동행할 수 있는 동시대의 뛰어난 감독을 만나는 건 무척이나 행복한 일일 것이다. 이미 거장이 된 한국 감독들의 데뷔와 과정을 전해 듣고 상상으로만 느껴왔던 그 아쉬움이 잠시나마 해소되었던 그날, <괴인>을 보고 나온 건 단지 우연이 아니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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