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영화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소년유랑>

계절을 완성해가는 연출의 당위와 깊이

by 환야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2021, 이루리

<소년유랑> 2023, 이루리


*해당 글은 이루리 감독의 최근작 <산행>이 영화제에서 상영되기 이전에 완성된 글입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과 <소년유랑>은 현재 볼 수 있는 공간이 없어, 특별 상영 등을 통해 찾아보셔야 합니다.




장편·상업영화에서 인물은 결말에서 무언가를 얻는다. 반면 단편영화를 포함한 독립·예술 영화에서 인물은 무언가를 잃는다. 이는 러닝타임이나 제작비와 같은 물리적 한계 또는 연출자의 작가주의적 목표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경우 인물의 목표와 성취가 뚜렷하지 않아 무기력한 결말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장르영화의 전형성과 결을 달리하는 선택이 작품의 매력과 성취를 보장한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그리고 그러한 실수는 각본 단계부터 걸림돌이 되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각본의 한계를 뛰어넘는 작품들이 있다. 그런 작품들은 각본에 담기지 않는 연출로 완성도를 높이곤 한다. 이를테면 영상 문법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방법이 있다. 일정 수준의 연출력은 각 장면에 맞는 효과적인 요소를 선택할 뿐 아니라, 고민의 시간 역시 줄여 제작의 효율성을 더한다. 그리고 그 유기적인 과정의 틈에 자리한 연출자만의 섬세한 의도는 완성도와 더불어 작품의 깊이를 더하기도 한다.


이루리의 연출은 이야기뿐 아니라 캐릭터와도 맞물린다. 그의 작품들에는 작은 틈이 있다. 그리고 그 틈으로 보이는 특색과 깊이는 영화의 영역을 넘어 예술에 대한 태도를 묻는다.

1.png 출처 - 인디그라운드


움직이는 소년들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와 <소년유랑> 두 작품이 공유하는 요소는 자연과 청소년이다. 그리고 그중 청소년의 움직임이 유독 강조된다. 그것은 특히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에서 ‘어른’들과의 대비를 통해 드러난다. 어른들은 앉아있고 소녀들은 움직인다. 산하(이유빈)의 엄마인 령(송아영)은 잠들어 있지만 산하는 잠에서 깨어난다. 동시에 달리(Dolly)샷과 핸드헬드는 소녀들의 움직임을 강조하며 두 집단을 흥미롭게 구별한다.


2.png 출처 - 인디그라운드


또한 죽은 소녀(김하늘새롬)에 대한 차이도 눈에 띈다. 소문의 중심이 된 죽은 소녀는 어른들의 입에 오르내리거나 괴담의 소재가 되어 움직임을 잃는다. 반면 애틋한 관계였던 산하에게 죽은 소녀는 소문과 전혀 다른 존재이며, 산하의 의식 속에서 계속해서 동력을 갖는다.


이루리의 또 다른 작품인 <소년유랑> 역시 비슷하다. 동적인 촬영 기법 등을 통해 두 소년 소녀의 움직임은 강조되고, 물리적으로 충돌한 어른은 인물 뒤 풍경으로 남는다. 촬영 기법마저 공유하는 듯한 두 작품은 한 연출자의 인장처럼 보여 흥미로울 수 있다. 다만 둘 사이의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연출의 한계이자 약점으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두 작품이 공유하는 또 다른 지점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변화를 암시한다.


3.png 출처 - 인디그라운드


설득하는 움직임


움직임을 효과적으로 포착하는 두 작품은 영상으로서 설득력을 갖는다. 하지만 어느 측면에서는 영상 문법에만 의지한 결과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의 몇몇 컷은 전형적인 문법을 부정한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의 첫 장면에서 포옹하고 있는 두 소녀의 모습에서 드러난다. 고정된 프레임 안에서 껴안은 두 소녀의 이미지는 너무나 전형적인 이미지일 것이다. 그러나 이때 영화는 자세를 고치며 소녀를 더 힘껏 껴안는 산하의 작은 움직임을 포착하며 그간 쌓여온 제한된 이미지를 벗어난다.


4.png 출처 - 인디그라운드


비슷한 장면은 <소년유랑>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비인(김규리)과 태호(정다원)는 풍향계를 들고 서 있다. 길을 잃은 듯한 두 청소년이 멈춘 채로 방향을 찾는 모습 역시 전형적인 이미지일 것이다. 다만 이때 계속해서 움직이는 풍향계의 모형은 고정된 프레임의 전형성을 빗겨간다. 결국 두 작품은 고정된 카메라 앞에서도 움직임을 끊임없이 포착하며 영상의 당위를 이끌어낸다.


5.png 출처 - 인디그라운드


창작자와 변화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에서 엄마는 산하에게 ‘집에 오는 중 차가 퍼져 새벽에 들어왔다’고 말한다. 이를 들은 산하는 ‘앞으로 자신의 이름으로 소설을 쓰지 말라’며 집을 나선다. 엄마는 길 위에서 움직이지 못했지만 산하는 집을 나서 친구들에게 달려간다. 여기에서 또 한 번 두 인물은 대비된다. 그런데 모녀의 관계는 대사와 함께 확장되는 듯 보인다. 어쩌면 두 인물을 ‘창작자’와 그가 만들어낸 ‘캐릭터’의 관계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6.png 출처 - 인디그라운드


‘산하’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 이름은 엄마의 소설에 존재했다. 산하가 태어난 뒤에도 엄마는 그녀의 이름을 소설에 사용해왔다. 그리고 산하는 엄마의 소설을 부정하기 시작한다. 엄마는 죽은 소녀가 사람과 물을 싫어했다고 표현했다. 물이라는 뜻을 가진 산하(山河)는 죽은 소녀가 ‘사람을 좋아했다’고 반박한다. 엄마는 산하와 죽은 소녀의 관계를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을 부정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이는 동시에 창작자가 캐릭터를 계속해서 통제하여 서사를 이어가려는 모습으로 확장된다. 하지만 주체성을 갖게 된 청소년들은 움직이기 시작하고, 창작물 속 인물 역시 통제를 벗어나 서사를 부정하기 시작한다. 결국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자연과 청소년을 내세우는 동시에 일종의 창작론을 말하고 있다.


7.png 출처 - 인디그라운드


한편 이에 비해 <소년유랑>은 서사의 깊이가 약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어른들과 청소년의 대비는 반복되지 않고, 서사가 딛는 담론도 부족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와 같은 맥락에서 두 작품을 잇는 어떤 변화가 엿보인다. 그리고 그 변화는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의 ‘령’과 <소년유랑>의 ‘칼리(오지후)’가 맞닿는 지점으로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소년유랑>의 칼리는 두 작품에 나오는 어른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또 다른 어른이다. 칼리는 ‘령’과도 구별된다. 이때 이 둘이 공유하는 요소가 오히려 대비를 강조한다. 작가인 령은 소문과 글에 사로잡혀 있다. 반면 칼리는 음식이 나열된 메뉴판에 얽매이지 않는 인물로 묘사된다. 령은 산하에게 ‘무언가를 먹어야 하지 않겠냐’고 말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식사하는 모습은 볼 수 없다. 그리고 칼리는 직접 음식을 만들어 비인과 태호와 함께 밥을 먹는다.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의 모녀는 가족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는다. 반면 <소년유랑>의 세 사람은 가족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유사가족의 형태를 띤다. 만약 ‘칼리’가 ‘령’처럼 창작자의 위치에 놓인 것이라면, 두 인물의 대비는 단순한 차이가 아닌 일종의 변화로 다가온다.


스크린샷 2026-01-26 224631.png 출처 - 인디그라운드


산하는 령의 오해를 바로잡고 창작자의 통제를 벗어난다. 이미 통제를 벗어난 듯한 비인과 태호는 적극적으로 동분서주한다. 산하는 추위에 움츠리지 않으며 봄을 꿈꾸고, 비인과 태호는 더위에 지쳐 잠시 숨을 고른다. 캐릭터에 대한 창작자의 집착에 의문을 제시하는 것이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의 목적이라면, 길 잃은 캐릭터에게 창작자가 휴식처를 제공하는 것은 <소년유랑>의 목적이다. 그렇게 두 작품의 차이는 창작자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령’과 ‘칼리’는 변화를 자각하는 창작자 이루리 자신으로도 느껴진다.




글뿐만 아니라 영상 역시 보는 이들보다 만들려는 이들이 더 많아지는 듯한 시기이다. 그렇기에 창작을 위해 선택한 형식의 가치를 고려하는 태도는 더욱 중요할 것이다. 이야기 안에 감각적인 영화적 표현뿐 아니라 수많은 영화적 고민과 깊이를 담으려는 듯한 연출자 이루리의 또 다른 계절은 어떤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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