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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야 Mar 02. 2020

단편 영화 <리코더 시험>

문득 작아진 그 공간의 확장된 기억

<리코더 시험>

2011, 김보라 감독


 보편을 건드리고 있다. 그것도 감독 자신의 일화들을 녹여서. 그러니 이것은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있을 수 있는 이야기’ 또는 ‘있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닌, 누군가 직접 겪은 이야기이다. 따라서 대사와 맞물려 돌아가는 영화 내용에 있어서 이해가 안 되거나 공감이 어려운 부분은 거의 없다. 그런데 그 이야기들이 일종의 에피소드 형식을 이루고 있어, 1988년에 있었던 감독의 일화들을 단순히 열거해놓은 듯해 보일 수도 있다. 이 방식은 분명 <벌새>(2019)의 모습과도 비슷한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벌새>를 관통하는 것이 있다면 그중 하나는 ‘영지’라는 인물일 것이고, <리코더 시험>의 경우는 제목 그대로 ‘리코더 시험’이다. 영화는 은희(황정원)가 학교에 리코더를 가져오지 않은 것으로 시작한다. 모두 가져온 리코더, 그중 그날 실수로 리코더를 가져오지 않은 은희를, 마치 영화는 그 시절의 우리의 모습을 대표할 인물로 선택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출처 - 네이버 영화


 리코더 시험이 있다는 선생님의 말과 함께 리코더 연습을 하는 은희를 중심으로 그녀의 가족을 보여준다. 말한 것처럼 은희의 입장이 되어본 누구나 겪었을 보편의 이야기이고, 은희라는 어린 소녀의 시점에서 이해되지 않는 사건이나 갈등은 없다. 그러나 몇 가지 흥미롭고 이야기가 필요해 보이는 장면들, 정확히는 그런 은희의 대사들이 존재한다. 그중 첫 번째는, 외도하는 것으로 보이는 아빠(정인기)가 양복을 입고 집을 나서는 모습을 보며 은희가 내뱉는 말이다. ‘나도 사랑해’, 물론 이것은 그 직전에 은희가 방문에 귀를 기울여 아빠가 누군가에게 하는 말을 무의식적으로 따라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은희는 아빠의 외도를 잘 모르고 있는 걸까. 적어도 그 행위가 나쁜 것으로 인지는 하고 있을 것이다. 이 사실은 창문으로 그녀의 엄마(박명신)가 아빠는 뭘 하고 있냐고 물을 때 ‘자고 있다’는 것을, 그것도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기에 추측 가능하다. 그런 은희가 창문으로 아빠를 바라보며 ‘나도 사랑해’라고 말한다. 아빠가 엄마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했을 것이 분명한 말, 그것을 알고 있는 은희의 ‘나도 사랑해’는 적잖이 흥미로운 대사이다. 


 은희는 아빠의 외출이 옳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아빠를 보고 하는 ‘나도 사랑해’는 시나리오상으로 돌출적이게 보일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영화는 보편이라는 외관 안에 작가 개인의 일화를 담아놓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쩌면 그 시절 그 순간에 작가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새어 나온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대사는 어떤 힘을 갖고 있고, 그 힘은 초반부터 이 작품의 방향을 나타내고 있다. 다시 말해 이 대사는 영화를 통해 작가 자신이 그 당시에 가족에게 하지 못했던 고백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게 감독 김보라는 은희라는 인물의 입을 빌려 가족에게, 특히 자신의 아버지에게 사랑한다는, ‘나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이렇게 흥미로운 대사는 하나가 더 있을 것이다. “나 예뻐?”, 은희는 왜 엄마에게 이렇게 물은 것일까. 물론 이것은 앞서 아빠가 말한 ‘원숭이 같아’라는 대사의 연장선에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은희가 엄마에게 예쁘냐고 묻는 장면 직후 은희가 다시 리코더 연습을 하는 장면을 생각하면, 이것과 함께 좀 더 길게 논의해볼 필요성이 생긴다.


 일단 이 영화를 관통하는 것은 리코더 시험인데, 영화를 돌아보면 은희가 리코더 연습을 제대로 하는 장면은 학교를 제외하고는 홀로 돌계단에 앉아 리코더 연습을 하는 모습이 전부라고 해도 될 것이다. 다른 연습 장면은 어떤가. 은희가 리코더 연습을 시작할 때마다 주변의 누군가가 저지한다. 아빠의 동태를 살피려는 엄마, 과일을 가져온 친구의 엄마, 시끄럽다는 오빠가 바로 그들이다. 기본적으로 이 작품은 성장영화이기에, 이러한 갈등은 은희가 이겨내야 하는 요소들이다. 그런데 이런 방식의 요소는 한 가지 더 생각할 수 있으며, 그것은 바로 협소해지는 은희의 공간이다. 은희에게는 그녀의 친구와 같은 ‘자기 방’, 다시 말해 자신만의 공간이 없다. 언니와 함께 쓰는 방은 분명 그녀만의 공간이 아니다. 은희는 친구의 집에 갔다 온 뒤 만화가 그려진 종이를 벽에 붙이거나 작은 모형 집을 책상에 장식한다. 하지만 그 공간은 창문을 두드리는 엄마의 소리, 시끄럽다는 오빠의 소리, 그리고 언니의 남자친구라는 외부인마저 들어온다. 그렇게 공간은 침범당하고 그녀는 결국 장롱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아빠는 이 장롱의 문을 열고 말한다. “원숭이 같아.”


출처 - 네이버 영화


 이렇게 은희의 모든 공간은 침범당하고 그녀는 리코더 연습을 포기하게 된다. 그래도 아직 그녀의 친구가 남아있다. 하지만 친구 역시 은희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며 낡은 리코더에 대한 해결책으로 엄마에게 부탁하는 것을 제시한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을 이해하는 주변에 모든 이들이 사라진 것으로 여기고 다시 장롱 안으로 들어가 잠든다. 그리고 밤이 된 후 엄마가 그녀를 깨운다. 주변의 모든 이들은 은희를 장롱 안으로 몰아넣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엄마가 그녀를 다시 밖으로 나오라고 말한다. 잠에서 깬 은희는 그런 엄마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은희는 외로운 소녀이다. 정확히는 외로워진 소녀이다. 그리고 그녀의 엄마는 아빠의 외도와 함께 외로운 인물이다. 자신의 외로움을 통해 엄마의 외로움을 보게 된 은희는 말한다. ‘나 예뻐?’. 분명히 이 물음은 자신을 사랑하냐고 묻는 또 다른 방식일 것이다. 그렇다는 엄마에게 계속해서 묻는 것은 불확실하다고 여기는 가족의 사랑을 재차 확인하려는 여린 소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마침내 은희는 엄마의 품에 안기고, 외로움은 오로지 자신만의 것이 아닌 사실과 가족의 사랑을 확인한다. 그리고 다시 리코더 연습을 시작한다. 이때 은희는 돌계단에서 홀로 리코더를 부는데, 그렇게 그 장소는 오롯이 그녀의 공간으로 바뀌며 이어서 영화가 보여주는, 그녀가 다녔던 모든 장소들 역시 그녀의 추억을 담은 ‘은희의 공간’이 된다.(은희의 신발 끈은 묶어주는 아빠의 모습 역시 은희의 공간을 넓이고, 동시에 앞서 은희가 말했던 ‘나도 사랑해’는 좀 더 큰 힘을 갖는다.)


 마침내 은희는 리코더 시험을 본다. 친구의 응원과 함께 연주를 시작한 그녀는 다른 아이들처럼 무사히 연주를 끝낸다. 한순간이지만 영원 같던 우리의 그 기억을 위해, 벌을 받으며 이 영화에서 선택된 은희는 그렇게 자신의 공간을 찾으며 아이들 사이로 들어가 다시 그 시절 한 소녀로 남는다. 다시 마주한 그 공간들이 너무 작아져 보이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공간이 너무 커져 버린 탓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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