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가 자꾸 화초를 뜯어먹는다. 저러다 잘못 먹으면 탈이 날것이다. 이파리 하나를 질겅 대고 있을 때 단단히 혼을 내주어야 할 것 같았다. 벼르고 기회를 보고 있다가 기회가 왔으니 얼마나 야무지게 혼냈겠는가. 등 긁개가 이럴 때 사용되다니. 강아지가 아주 영리해서 혼을 낸 인간의 마음도 썩 좋지 않다.
개집 겸용으로 여행용 캔넬을 사용하는데 좀처럼 그리로 들어가지 않더니 들어가서 시무룩해 있다. 포유류는 컴컴하고 지붕이 있는 곳에서 안정을 찾는다고 하더니. 나는 이빨 자국이 찍힌 이파리를 캔넬 앞에 던져주었다.
"야 야 먹어봐, 먹어, 봐 또 먹어봐, 또, 탈 나, 탈 나.."
같은 말을 이렇게 많이 반복하고 있다니..... 올해만, 오늘뿐, 이 상황뿐이었겠는가. 요놈이 이파리 하나 씹다가 요런 고초를 당하고 있으니 설마 또는 안 먹겠지. 한참을 다른 일에 몰두하다 살펴보니 이파리가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다. 구석구석을 살펴보아도 없다.
개가 대소변을 잘못 봤을 때 구박하면, 똥이 없어야 사랑받는 줄 알고 똥을 누자마자 먹어치운다고 했는데, 같은 이유로 먹어 치운 것일까.
나는 개의 단순한 언어를 배워야 할 것 같다. 평생 배우면서 살다가 죽어가는 게 사람 사는 인생인가 보다. 지금 나는 2020년 경자년의 끝이자 2021년 신축년의 시작에 서 있다. 올해는 평론집과 수필집을 한 권씩 내고, 불교 대학원 선학과를 마쳤다. 능력이 부족하고 무지해서 힘들었던 순간이 많았던 만큼, 허무가 남았는데, 그 빈 가슴을 달래주러 순한 반려견 푸들이 왔다.
배운다는 단어를 생각해 본다. 채우는 것일까 비우는 것일까. 배울 학(學)과 더불어 날 생(生), 학생(學生)이라는 말에 익숙하다. 어렸을 때 우리는 제사를 지냈다. 보통 사진을 놓고 제사를 지냈는데 간혹 아버지가 쓰시는 지방에 학생이라는 글자가 있었다.
설날이나 추석 명절 때 차례를 지내며 쓰는 지방에 '현고학생부군신위'라는 말을 쓴다. 살아생전 벼슬이나 관직 등 특별한 직위가 없었다면, '학생'이라는 말을 써 평생을 배우는 사람이었다고 기록하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몸에는 몽고반점처럼 배움에 한이 맺힌 유전자가 면면히 흐르고 있는 것일까. 하도 자주 외부의 침입이 잦아서 아는 것 만이 살길이었을지 모른다.
푸들의 좋은 유전자는 영리하다는 것과 호기심이 많은 것이다. 우울한 인간에게 훌륭한 반려견이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진화해 온 개다. 로코가 집에서 나와 변기판에 올라가 앉아서 물끄러미 쳐다본다. 내가 쳐다봐 줄 때까지 저러고 있을 것 같다.
개와 같이 지내다 보면 단순하게 생각해야 하는 때가 많다. 사람은 평생 단순한 것을 배우기 위해 복잡하게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등 긁개는 다시 본래의 용도로 돌아갈 것이다.
코로나 여파로 무엇보다 사람들의 생활이 단순해져 간다. 보신각 제야의 타종도 생략되었다. 조용히 묵은해를 보내련다. 지나간 내 힘듬은 깃털인지 몰라. 저 애만큼 단순해져 보리라. 새해에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