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색을 하다
수심 가득한 머리카락에 반짝,
은빛 날개들이 하나둘 기지개를 켠다.
주저앉힐 수도 날려 보낼 수도 없는 내 것이고,
내 것이기 싫은 너를 바라본다.
하얗고 야윈 흔들리는 몸짓이 아프고 아프다.
누군가를 위한 날갯짓도 아니었고,
나로 인한 안간힘이었다.
거울 속의 나는 지나치게 낯설고,
다시 익숙하다.
아주 오래전 흑빛 날개들이 퍼덕일 때,
스무 살의 나는 행복했을까.
이제 가여운 너에게 금빛 날개를 달아주려 한다.
너의 어둠과 혹은 밝음도 금빛에 눈부시어도 좋겠다.
너를 들어 올리던 고통도 사라지고
이별의 아픔도 잊힐 것이다.
강물 같은 하루였고,
굳어버린 상흔이었다
너를 어루만지다 차마 뒤돌아선
내 아이의 슬픔이
금빛 날갯짓에 찰랑찰랑
바람을 탄다.
울적한 마음에 무작정 나와 보니 하늘이 잿빛이다. 비가 올 듯 말듯한 하늘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 낼 것처럼 눈물샘이 부풀어 있는 것 같다. 생각보다 찔끔찔끔 내리는 빗방울에 우산도 거추장스러웠다. 울음을 참고 있는 것처럼. 툭툭 떨어지는 눈물처럼. 하늘도 울적한가 보다.
아파트 앞을 지나 걷다 보니 예전 살던 동네에 와있었다. 둘째를 낳고 11년을 살았던 아파트가 보인다. 이곳은 지나가기가 지금도 편치 않다. 내놓은 지 몇 시간 만에 팔렸던 아파트. 집도 인연이라 믿는 편이지만 반나절도 안돼 나간 집을 생각하면 무슨 정신이었나 싶다. 면허증에도 아직 주소가 남아있는 집. 5년이 지난 지금은 미련과는 다른, 그래도 편치 않은 마음에 그쪽으로는 발길이 가지 않는다. 무심히 바라보이는 것이 마음 때문일까. 지난밤 이런저런 생각으로 잠을 못 자고 맞는 오늘은 오히려 세상이 평온해 보인다. 급할게 뭐있담, 아등바등 해봤자야. 인생 뭐 있다고 그러면서도 나는 울적함을 나눌 누군가를 만나고 싶었다. 그런데 이런 날은 연락도 안되기도 하지만 나만의 시간이 필요할 때도 있단 걸 알아서 혼자 보내기로 했다. 지난밤 슬펐던 마음이라도 꺼내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차라리 계속 움직이는 것이 낫다. 정류장을 지나는데 늘 서점을 갈 때 타고 다니던 버스가 내 앞에 섰다. 그냥 버스를 탔다. 마을버스처럼 타고 다니던 6627 버스가 오늘따라 참 반가웠다. 출퇴근 시간이 아니라 버스 안에 사람이 없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있는 곳으로 나를 데려다주는 버스를 타니 좋았다.
몇 달 동안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한 적이 없었다. 유일한 것은 글을 쓰는 시간을 할애하는 정도였다. 뭐가 갖고 싶은 것도 없었고 먹고 싶은 것도 별로 없었다. 아파트 옆 옷가게에 예쁘게 걸려있던 옷을 바라보긴 했다. 오며 가며 눈으로만 보던 옷이었는 데 살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얼마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사온지 1년이 넘었는데 한 번도 들어가 보려 하지 않았다. 은근히 비싸 보여서도 그렇고 언젠가부터 인터넷으로 사는 것이 편해졌기도 해서였다. 살이 쪄서 옷들이 안 맞고 나서는 아들들 옷을 입고 나가곤 하는데 동네 지인들은 아들 옷이 너무 티가 난다고 뭐라고 하곤 했었다. 희한한 것이 너무 울적하니 사심이 생기는지. 옷이든 뭐든 오늘은 나를 위해 돈을 쓰자고 생각이 들었다.
원고료가 생겼다. 나를 위한 십만 원. 그래 오늘은 현금으로 십만 원을 나에게 쓰기로 했다. 이른 시간 대형서점은 한적했다. 이제 막 문을 열어 카운터에도 아무도 없고 한두 명만 보였다. 이렇게 사람 없는 시간에 있는 것이 다행이다. 대형서점엔 팬시용품도 있어 구경하기도 좋다. 왜 그런 느낌이다. 어릴 때 예쁜 수첩과 칼라 팬에 머물던 그런. 패드가 들어가는 적당한 가방 하나를 찾았다. 만 팔천 원. 가격도 착하고 까만 레이스가 덮인 가방이 맘에 쏙 든다. 한 계절 손에 잡힌 가방이 좋으면 그것만 들고 다니긴 하지만 성격이 그런 걸, 주변에선 그런가브다 한다.
곳곳에 신간 책들이 진열되어있다. 보통 때는 서점에서 읽고 오는 경우가 많았는데 지금은 책만 사서 나온다. 한 곳에 오래 머물기가 편치 않은 요즘이라서 그렇다.
베스트셀러 모음 앞에 있는 데 광화문 글귀 모음집이 눈에 들어왔다. 늘 지다 다니던 광화문 교보문고에 걸려있던 고운 글들을 모은 책, 살까, 그냥 읽고 갈까, 잠시 고민을 하다 책 속을 열어보니 집에서 천천히 읽어 봐야 할 것 같아 담았다. 오늘은 카드를 쓰지 않기로 했는데 가방과 책을 현금으로 주면 얼마가 남는지 계산을 하고 있었다. 사실 카드를 쓸 때는 이렇게 먼저 계산을 하진 않는다. 그런데 또 사고 싶은 책들이 보인다. 어쩐다. 박완서 님과 김이나 작가님의 책이었다. 살려고 했던 마스크까지 사니 얼마 남지 않았다. 에잇 모르겠다.라는 맘이 들었다. 옷도 사 입을까 했는데 책에 40프로를 써버렸다. 그래도 새로 산 레이스 가방에 책들을 담아 어깨에 매니 기분이 좀 나아진 것 같았다. 맘에 드는 레이스 가방에 이미 기분이 좋아진 상태였다.
서점에서 나와 근처에 있는 백화점에 왔다. 얼마 남지도 않았고 카드를 쓰지 않을 생각을 하니 백화점에 들어가서도 바로 행사장으로 갔다. 오, 그런데 동네 옷가게에 걸려 있던 바지와 거의 비슷한 디자인의 바지가 행사를 한다. 며칠만 이만 구천 원이란다. 맞을까. 그래도 소재나 디자인이 좋으니 바지 하나 획득이다. 이제 만 얼마가 남은 것 같다. 만 원짜리와 천 원짜리 몇 장. 오늘은 여기까지다. 버스 오는 시간을 보며 서둘러 나와 다시 6627을 탔다. 짐은 많아졌는데 아침보다 마음은 가벼워졌다. 고민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란 걸 안다. 그저 울적해지기 충분한 나의 마음이었다.
많이 걸었더니 출출해졌다. 백화점에서 햄버거를 사 먹으려다 사람들이 있어서 그냥 말았었는데. 하필 집 앞 마트에서 버스가 선다. 먹고 가자 싶어 마트에 들어갔다. 우리 아들들은 좋아하는 햄버거가 다르다. 첫째는 L햄버거보단 M 햄버거를 좋아하고 둘째는 야채가 많지 않고 소스가 진득하다고 L햄버거 중 데리버거를 좋아한다. 그런데 나는 다른 집 햄버거를 좋아한다. 평소에는 내가 먹자고 시키기도 그래서 잘 안 사 먹지만 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햄버거를 사 먹으려고 한다. 주문을 해놓고 서있기 뭐해서 마트를 둘러보다 운동화 마트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햄버거 원플러스 오천원에 주문을 했으니 이젠 딱 만원이 남았다.
와우, 칠만 원짜리 단화가 만원이란다. 대신 사이즈는 하나다, 둘째 아들의 사이즈다, 아이들이 좋아한다던 하얀 단화다. 지금은 검은 단화만 있으니 잘됐다 싶었다. 웃음이 절로 나왔다. 울적하다고 나왔던 내가 맞나 싶을 만큼 기분이 나아지다니, 단순하다. 어쩌면 오늘 같은 날엔 단순해서 나을지도 모르겠다. 봉지봉지를 들고 집에 들어왔더니 첫째 아이가 간식 사 왔냐고 봉지를 더 반긴다. 원플러스로 준 치킨버거를 건네고 내가 좋아하는 햄버거를 아이스커피와 먹는다. 이런, 맛있다. 오늘 10만 원 쓰기는 완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