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
어느 날은
푸른 청바지 되어 뛰어다니고 어느 날은 7센치 까만 구두 되어 또각또각 걷고
어느 날은
보라색 자판되어 떠 다니고 어느 날은 회색 티셔츠 되어 가라앉는다
어느 날은
장미 향수처럼 기분 좋아지고 어느 날은 달팽이 크림처럼 미묘하고
어느 날은
브러시처럼 익숙하고 어느 날은 마스카라처럼 낯설다
어느 날은
크림수프처럼 부드럽고 어느 날은 할라페뇨처럼 맵고
어느 날은
쇼콜라 마카롱처럼 달콤하고 어느 날은 에스프레소 투샷처럼 쓰다
너의 목소리는.
이른 아침, 큰아이의 냉장고 여는 소리에 잠이 깼다. 지난밤은 깨지 않고 몇 시간은 자서 그런지 몸이 무겁지 않다. 생각해보니 아이들을 키우면서 깨지 않고 여섯 시간 이상 자본적이 별로 없다. 세네 시간 정도가 숙면의 시간이었다. 오래전, 혼자 입원했을 때가 그래도 제일 많이 잤었던 것 같다.
남편의 믹스커피를 타고 커피 홀더 거치대에서 캡슐 하나를 골라 커피를 기다린다. 큰아이와 마실 달달한 커피를 내렸다. 풍부한 크레마를 보면서 커피 한 모금을 마시니 입안에 달콤한 캐러멜향이 가득하다. 남편은 원두커피보다는 믹스커피를 마시고 나는 때에 따라 다르다. 오늘처럼 비가 올 것 같은 날이면 창 넓은 카페에서 마시는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좋을 때도 있고 집에서 편하게 마시는 달달한 믹스가 마시고 싶어 질 때도 있다. 그리고 추운 겨울, 고즈넉한 산사에서 혼자 마시는 뜨거운 자판기 커피는 근심을 녹이는 맛이다. 조용히 들리는 풍경소리는 잔잔한 음악이 된다.
냉장고 안에는 아이들이 사다 놓은 편의점 커피들이 쟁여져 있다. 아직 쓴 커피를 잘 못 마시는 큰 아이나 이제 커피에 입문한 작은아이가 사다 놓은 커피들이다. 어느 날 작은 아이가 내게 자기도 커피 마시면 안 되냐고 물었을 때 내가 좋아하는 커피우유를 사다 주었었다. 카페인이 충분히 들어있으니 마시면 된다고 했었다. 그래서인지 작은 아이가 사다 놓는 것은 대부분 라테 형식으로 나온 달콤한 커피류이다. 작은 아이가 커피를 사 올 때면 처음에는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는 데 점점 냉장고에 사다 놓은 커피를 볼 때마다 마음이 가볍지 만은 않다. 나야 커피가 좋아서 마시는 것이지만 아들들은 잠을 안 자려고 먹어야 하는 일종의 각성을 위한 안감힘 같다.
커피 타 줄까?라는 말이 남편에게는 "자, 회사 갈 준비하게 잠 깨"라고 하는 것 같고 아이들에겐 "잠 깨고 공부해야지" 말처럼 느껴진다. 나에게 커피 마시는 시간은 온전히 즐거움인데 가족들에겐 전투를 위한 한모금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새벽부터, 또는 밤새 부족한 잠을 커피 한잔으로 깨우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무심히 마시는 커피 한잔이 다르게 다가온다. 아무 생각 없이 마셔도 되는 이유가 오히려 감사한 일일지도 모른다. 무엇이든 하고 싶으면 하고 안 해도 되는 상황이라는 것은 얼마나 가볍고 여유로운 것일까.
하고 싶은 것을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은 글쓰기도 비슷한 것 같다. 써도 되고 안 써도 되는 지금이 즐거움을 맘껏 즐길 수 있는 시간일 수 있다. 꼭 써야 하는 일이 생겨서 글을 써도 좋고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지금도 좋은 것이다. 즐거운지 모르고 써도 우리들이 무언가에 몰두한다는 것은 분명 기쁨을 주는 일일 것이다. 가끔 글을 쓰다 마음이 울적해질 때면 생각이 나는 커피가 있다. 아메리카노 위에 부드럽고 달콤한 휘핑크림이 듬뿍 올려진 커피, 비엔나 커피라 불리기도 하는 아인슈페너이다. 크림을 먹을 때는 세상 달콤한데 나머지 커피만 남아 마실 때는 쓴맛을 감수해야 한다.
인생이란 것이 단맛 아래 쓴맛이 가라앉아 있는 아인슈페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쓴 커피가 아니라 단맛에 기분을 좋게 해 주었다가 쓴맛의 공격이 오는, 그래도 달달한 맛을 못 잊어 찾게 되는 커피다. 우리의 삶도 좋은 일과 힘든 일은 함께 있는 것 같다. 무엇이 위에 있고 아래에 있는지는 모르겠다. 어떤 날은 쓴맛이 싫어 크림과 커피를 섞어 마실 때가 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달지 않고 오히려 커피의 맛과 크림의 맛이 약해진 라떼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뒤로 되도록이면 섞어 마시지 않는다. 그냥 달콤한 크림 맛을 기분 좋게 만끽하려고 한다. 그러다 보면 가끔은 달콤한 기분이 쓴 커피를 더 이상 쓰지 않게 느끼게 한다. 그것은 행복한 기억으로 힘든 시기를 견디어내는 우리의 삶과 닮았다. 커피 한 모금으로 더 힘나는 날이 되기를, 그리고 향긋한 커피 향으로 조금은 달달한 세상과 마주하는 씩씩한 하루하루가 되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