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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시안 Jan 31. 2022

버릴 것과 지킬 것


몇 년 동안 열지 않던 베란다 창고가 열렸다. 어쩌면 그토록 베란다 창고에는 눈길이 가지 않았을까, 오래된 물건들이 가득할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빈틈없이 쌓여있는 짐들에 숨을 골라야 했다. 몇 년 전에 버린 줄만 알았던 둘째 유치원 때 쓰던 플라스틱 서랍장도 그대로 자리하고 있었다. 왜 아직도 가지고 있었을까 생각을 할 것 없이 왜 버리지 못하고 있었는지 보자마자 생각이 났다. 작은 플라스틱 4단 서랍장 앞면에는 까만 매직으로 그린 옷 그림과 설명이 있었다. 첫째가 열두 살, 둘째가 여섯 살이었을 때였으니 벌써 십 년이 넘었나 보다. 큰 수술을 앞두고 입원하기 전날 밤, 한글이 서툴던 둘째를 위해서 그렸던 양말, 속옷, 티셔츠 그림들이 칸칸마다 남겨져 있었다. 혹시라도 돌아오지 못하면 어쩌나 싶은 생각에 눈물을 참고 짐을 꾸리던 기억이 났다. 어린 두 아이를 두고 처음으로 집을 나서야 했을 때였다. 그날 밤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며 울컥 올라왔던 눈물에 흐릿했던 기억이 사진의 한 장면 같다. 잊고 있었던 기억이 하나둘 떠올랐다.


무사히 수술을 끝내고 일주일 만에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내가 제일 먼저 한일은 집 앞 마트에 가서 장을 보고 저녁을 차리는 일이었다. 나를 위한 무언가는 필요하지 않았다. 남편도 오지 말라고 하고 혼자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그렇게 하고 싶던 일이 아이들과 남편을 위해 밥을 준비하는 그저 평범한 일상이었다. 퇴원한 날부터 나는 환자가 아니었다. 사실 가족들에게는 한 번도 환자 인적은 없었던 것 같다. 몇 개월마다 병원을 가던 날 두근거리는 마음 빼고는 나는 환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살았다. 퇴원한 날 쓰레기 봉지를 버리러 나가서 보았던 까만 밤하늘이 그렇게 반갑고 좋았다. 신기한 것은 기억을 하니 그때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진다는 것이다. 안도감에 발걸음이 얼마나 가벼웠었는지 아이처럼 폴짝폴짝 걸었던 것 같다.


살다가 아주 가끔 티브이를 보다 눈길이 멈출 때가 있긴 했다. 같은 수술을 한 연예인들이 요양차 공기 좋은 곳으로 여행을 다녀온다든지 남편이나 가족들이 몸에 좋은 음식을 해주는 모습이 비칠 때였다. 그럴 땐 침 한번 꿀꺽 삼키면 그만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면 된 거였다. 그것으로 나는 족했던 해였다.

싫은 소리도 못하지만 무엇을 해달라고 말하는 것에도 익숙지 않은 나였다. 그런데 처음으로 첫째에게 부탁을 해야 하는 일이 생겼었다. 6학년 전교회장 선거에 나간 첫째에게 기권을 하라고 했다. 그때는 병원을 다닐 때라서 학교 갈 일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그때 첫째 아이는 내색을 안 했지만 마음에는 큰 아쉬움이 남았을 것을 안다. 서랍을 보면 잊고 있던 그때의 기억이 나니 이번에야 말로 꼭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이 적혀있으니 매직블록으로 지우고 내다 놓았다. 까만 그림과 글씨들이 지워지는 것처럼 아팠던 기억도 이제는 지워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섬주섬 물건들이 베란다로 나왔다. 베란다 구석에서 꺼낸 낡은 박스를 열어보니 별의 별것들이 다 들어있다. 대부분 20년이 넘은 물건들이다. 빛바랜 사진들도 있다. 사진 속에 남편과 나는 첫째의 나이보다도 어리다. 참 해맑게 웃고 있었다. 남편과 주고받았던 편지들도 있었는데 어찌나 절절하던지 다시 읽으려니 민망했다. 지방에 살던 남편과 서울에 사는 나는 주기적으로 나름 이별을 느꼈던 것 같다. 보다가 읽는 눈이 간지러워서 그냥 다시 봉인했다. 어디 갔나 싶던 군번줄을 보고 있는데 둘째가 그게 뭐냐고 물었다. 첫째가 네가 2년 후면 받는 거라고 말해주었다. 덧붙여 아빠가 엄마에게 결혼하자며 주었다고 설명해줬다. 언젠가 첫째에겐 내가 이야기를 해주었나 보다. 예전에 군번줄은 살짝 그런 의미도 있었다. 어디에 있겠지 싶었는데 추억상자 안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슬쩍 밀어놓으니 첫째가 잘 두라고 잔소리를 했다.


물건들이 얼추 나왔을 때 맨 구석에 손잡이 달린 커다란 팩트병이 나왔다. 반 정도 있는 간장이었다. 진작에 버렸어야 했던 건데 이사 때마다 창고에 있었다. 시어머니께서 주셨던 간장인데 아이들 어렸을 때였으니 10년은 훨씬 넘은 것 같다. 아마도 담가서 주셨다는 생각에 버리지 못했던 것 같다. 이제는 버려야겠는데 버리는 방법이 문제다. 간장을 들고 흔들어 봤다. 진한 진액이 된 것 같지는 않지만 뚜껑을 열기가 겁이 났다. 터져 버리는 것이 아닐까 싶어 계속 쳐다만 보고 있다. 아무래도 뚜껑에 구멍을 먼저 내고 열어볼까 생각 중이다. 우습지만 십 년 넘는 세월 동안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 있을지 모를 일이라서 조심스럽다. 그런데 간장을 보고 있으니 어지간히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내가 보인다. 이런저런 의미를 붙여 버리지 못한 미련들이 얼마나 많은지.


환기를 시킨다고 열어놓은 베란다 밖에서 바람소리가 들린다. 바람소리가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몇 달을 신경 쓰고 무리를 해서인지 열흘 전쯤 한쪽 귀가 먹먹해지더니 잘 들리지 않았다. 마치 수영하고 귀에 물이 들어간 듯했다. 소리가 멀어지자 답답했다. 어제까지 독한 스테로이드 약을 먹었다. 돌발성 난청의 치료는 스테로이드뿐이라고 한다. 게다가 골든타임이 있다는 것인데 느껴진지 3일 안에 치료가 들어가야 청력이 돌아온다는 것이다. 이건 엄청 중요한 사실이다. 그리고 무서운 일이기도 하다. 이비인후과의 응급이 돌발성 난청이라는 것도 이번에 알았다. 감사하게도 일찍 병원에 갔고 약이 잘 들었는지 청력이 돌아왔지만 양쪽 귀에서 느끼는 소리가 달랐을 때는 정말 아찔했다. 고용양의 스테로이드를 먹었다. 얼굴에 트러블 하나가 나서 피부과에서 스테로이드 한 알을 먹을 때도 잔뜩 신경이 쓰였는 데 귀가 안 들리게 됐을 때는 엄청난 양의 스테로이드라 해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큰일 앞에서 작은 일은 무색해진다. 어느 날  갑자기 한쪽 귀가 먹먹해지고 이명이 들리면서 자신이 하는 말이 울릴 때면 바로 병원에 가야 한다. 나는 세 번의 청력 검사 후에 다행히 정상 청력으로 돌아왔다.


내가 내 몸을 아끼지 않고 혹사시키니깐 자꾸만 여기저기서 봐달라고 말을 거는 것 같다. 불편한 것을 내색하지 못하고 참는 것이 맞다고 살다 보니 몸이 말을 건다. 그러지 말라고, 마음 가는 대로 살라고 해준다. 아픈 뒤에 알게 되는 것이지만 돌아보면 내 인생에서 그냥은 없었다. 주저하는 마음이 스트레스를 만들기도 한다. 마음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곳으로 향하면 된다. 불편해지는 것은 이제 피하고 싶다. 그냥 내려놓으면 되는 것을, 모든 사람들과 잘 지내야 하고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은 욕심이었다. 세상에는 나와 맞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다. 그러기에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만나진다는 것은 분명 행복한 일이다. 나와 맞고 이야기 나누는 나의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 사람들인지 이렇게 또 한 번 아프고 나니 느낀다. 스트레스를 피할 수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피하고 싶어졌다. 버릴 것은 버리고 인정할 것은 인정하면 되겠지. 부족함을 인정하면 되는 것이다. 요즘은 생각이 꼬리를 물 때면 머릿속에서 스톱을 외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하면 된다. 생각하면 기분 좋아지는 사람들, 기분 좋은 일들을 찾아서 올해는 나를 지켜내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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