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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시안 Mar 27. 2022

마음이 간다는 것

좋아하는 것에 대하여

이른 새벽냉장고 문이 열렸다 닫혔다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밤새었을 큰아이가 배가 고프다는 신호였다. 아기 때 울음소리로 배고픔을 알아차리는 것과 비슷하다. 몇 시냐고 물으니 여섯 시란다. 서둘러 아침을 준비했다. 어젯밤 내려놓은 맛국물이 있어 감자수제비가 금방 끓여졌다. 밤새 비가 내려 바람이 살짝 찬 날은 뜨끈한 감자수제비가 제법 맛있다. 요즘 큰아이는 스스로를 삼식이라 칭하며 매시간 "엄마 밥 줘"를 말한다. 어쩔 땐 좀 미안한지 손이 덜 가는 것으로 달라고도 하고 어느 고기해줄까 물으면 비싸지 않은 거라며 미안해한다. 대학생이지만 비대면 수업을 하고 있는 터라 실시간 수업이 끝나면 점심을 챙겨주어야 한다. 거기에 얼마 전부터 헬스를 시작하면서 닭가슴살 샐러드는 간식이 되었다. 큰아이는 군것질이 줄어 건강해지는 것 같다며 좋아한다.


이래저래 하루에 대여섯 번은 먹는 것 같다. 살이 없던 아이에게 점점 근육이 생기고 그런 변화에 큰아이도 즐거워한다. 자꾸 웃통을 벗고 가슴을 만져 보라고 한다. 조금씩 생기는 근육에 나도 놀랍긴 해서 리액션을 해 주면 얼굴에 화색이 돈다. 운동을 하기를 잘했다며 뿌듯해하는 아이를 보면서 운동의 힘이 느껴진다. 우선은 혈색이 좋아졌고 더 좋은 건 걱정이 줄었다는 것이다. 모자란 시간에 잠깐 가서 하는 운동이라 충분히 못하는 것이 늘 아쉬워 스트레스가 쌓일 틈이 적어졌다. 걱정이 짧아지니 더 긍정적이어졌다고 할까.


큰아이는 일주일마다 학교에 가서 대면 시험을 보고 온다. 그래서 시험 3일 전부터는 운동을 참는다. 근육운동이라서 하고 오면 아직은 피곤하기 때문에 시험공부를 위해 참는단다. 시험이 끝난 하루 이틀만 아이에게 자유인 샘인데 그 하루 이틀에 고민이 들어갈 틈이 없는 것이다. 몸이 바빠지고 좋아하는 일이 생기면 힘듦은 순간이 되나 보다. 

큰아이가 좋아하는 두 가지  한 가지가 운동이고, 또 하나는 드라마다. 워낙 드라마를 좋아하고 이야기와 배우를 기억하는 아이라 드라마 감성만큼은 엄지 척이다. 본방송은 거의 못 보던 큰아이가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챙겨본다. 오늘이 토요일이니 아이는 어젯밤부터 설레었을 것이다. 지난주 마지막 장면에 설렘이 멈춰있는 것 같았다.


감자 수제비를 먹으며  아이가 패드를 켜고 드라마 장면을 다시 보여준다. 지난주 시청자들을 설레게 했던 마지막 장면은 다시 봐도 예쁘다. 아들이 막간마다 얼마나 돌려보며 설레었을지 안 봐도 알겠다.

"엄마, 나는 이 장면이 좋아. 이 드라마를 말해주는 것 같아"

그 장면은 극 중 지친 후배 선수가 펜싱을 그만두면서 코치 선생님과 나누는 대화였다. 8강에 오른 후  펜싱을 그만두고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제자에게 선생님은 이긴 오늘을 꼭 기억하라고, 새로운 기회를 어떻게 얻어 냈는지 절대 잊지 말라고 했다. 힘들 때마다 그 시작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생각하라고 했다. 큰아이가 왜 이대목을 특히 좋아하는지 나는 알 것 같았다. 놓칠뻔한 기회가 얼마나 소중한지 아이는 너무나도 잘 아니깐. 아침을 먹으면서 드라마 이야기에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엄마, 3분 있으면 예고편 나와"

드라마의 선장면 공개가 아침시간에 정해져 있었다. 잠깐 보여준 장면도 역시 웃음이 나왔다.

방에 들어갔던 큰아이가 자기가 101번째로 좋아요를 눌렀다며 좋아한다. 순식간에 댓글창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금세 2천 명이 넘었다. 어떤 사람들은 몇 시간 전부터 깨서 3분도 안 되는 선공개 장면을 기다린다고 한다. 아들이 자기가 101번째인 걸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진심이구나' 싶었다. 감성 넘치는 우리 큰아이가 이 순간을 저렇게 좋아하니 뭐 그러면 됐다 싶었다. 좋아하는 것에 대한 진심은 소중한 거니깐. 그리고 그 힘으로 또 한주를 공부해야 하니깐. 큰아이에게 좋아하는 드라마를 만난다는 건 중요한 일이었다. 입시 때도, 힘든 시기에도 신의 한 수처럼 아이에게 힘이 되어 주었던 드라마들이 있었다. 이번 드라마는 아이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을까.  


즐거움에 진심인 큰아이를 보면서 좋아하는 마음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이 들었다. 좋으면 저절로 가는 마음, 안 하던 것을 하게 하는 용기 같은 것일까. 무엇에 몰입해서 즐거워하는 마음이 팬심이겠지. 배우를 향할 수도 있고 드라마를 향할 수도 있겠지. 중요한 것은 감동을 받고 행복해지는 순간이 있다는 것이다. 중학교 때 좋아했던 다섯 손가락의 노래가 떠올랐다. 친구를 따라갔던 첫 번째 콘서트였다. 리메이크 한 노래인 '풍선'으로 유명하지만 나는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이나 '새벽기차'를 좋아했다. '사랑할 순 없는지'도 있었다. 신기하다. 아주 오랫동안 듣지 못했던 앨범 속 노래들의 제목이 줄줄 나온다. 내가 이렇게 기억을 잘하는 사람이 못되는데 최근 들어 기쁜 순간이다. 자꾸만 깜박거려 걱정했었는데 조금 덜 걱정해도 되겠다. 큰아이처럼 몇 번을 돌려 들었을 노래라서 오랜 시간이 지나도 기억에 남아있나 보다. 아무래도 큰아이의 성격엔 내가 영향을 끼친듯하다.


얼마 전 시집을 읽다가 한참을 머문 적이 있었다. 시를 읽고 시인이 궁금해지는 경험을 했었다. 마음이 간다는 것은 이런 것이구나. 그 마음이 들자 글을 쓰는 나의 마음도 가볍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쓰는 일에 진심을 다해야겠다. 그렇다고 진심이 잘하려고 하는 마음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나의 진심은 힘을 빼고 나의 이야기에 내가 귀 기울이는 것이다. 내가 나를 제대로 보니 일렁이던 마음의 파도가 사라졌다. 멈추지만 말자고 다짐해 본다. 글쓰기는 나의 마음이 가는 일이고 좋아하는 일이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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