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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시안 Apr 16. 2022

그냥 그런 하루



더 이상의 변화 없이 그대로라는 뜻의 말 '그냥'. 세탁기를 돌리고 기다리는 시간 이렇게 노트북을 열고 그냥 그런 날이라서, 그냥 앉아있는 시간이 있어서 라는 대답은 얼마나 평화로운지. 더 이상의 변화가 없다는 말이라는 것이 마음에 든다.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는 것은 그냥이 아니니깐.


시험을 앞둔 아이들의 감정을 맞추다 보면 정작 나의 감정은 바닥을 칠 때도 있지만 보이는 변수만 생기지 않아도 다행스럽다는 마음은 꿀꺽꿀꺽 잘 참게 한다. 참는다기보다 익숙해졌겠지만 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리기 바쁜 시기이니 조금만 더 맞혀주자 싶다. 그러니 별일 없이, 나의 인내를 끄집어내 얼마나 강해졌는지 가늠하지 않아도 되는 날은 그냥 그런 날이 된다. 다행스러운 날, 별일이 없어서, 그날이 그날 같아서 좋은.


"오늘은 어떤 하루였나요?"라고 물었을 때 "그냥이요."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어떤 말을 할 때 높낮이가 생기고 그 순간 전해 지거나 스스로 느껴지는 감정은 다르다. 나는 그냥이라는 말이 솔직해서 좋지만 이 말만큼 "so so"를 대신할 말을 알지 못한다.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그저 그만한 하루였다는 것을 대신할 수 있는 말이니깐.


그냥이라는 말에는 이유가 없어서 좋다. 누군가가 왜 좋으냐고 물었을 때 여러 이유를 무색하게 하는 그냥이라는 말을 듣는다면 좋은 것이다. "그냥 좋지." 얼마나 고마운 대답일까. 그 말은 내 앞에서는 긴장하지 않아도 돼, 웃어도 울어도 괜찮아, 서운한 마음을 보여도 되니 힘쓰지 말라는 말처럼 들린다. 그런 저런 이유로 좋아하는 것이 아니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유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떠한 느낌이 마음을 움직이게 했을 테니깐. 다만 여러 이유들이 사라져도 좋은 것이 그냥 좋은 것이겠지.


조금 답답한 일이 있을 때는 그냥 걷는다. 목적지가 있어 나서는 건 아니다. 요즘은 항상 운동화를 신고 다니기 때문에 아무 때나 걸어 다닐 수 있어 좋다. 동네 아파트 길을 돌기도 하고 한강변을 걷다 오기도 한다. 집 근처 토끼굴을 지나 한산한 한강을 따라 그냥 걷다 보면 강바람에 답답했던 마음이 편해진다. 흐르는 강물이지만 언듯 보면 늘 멈춰 있는 것 같은 한강변의 저녁 야경도 편안함을 준다.


요즘 나는 만날 사람은 만나 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연이라고 해도 좋고 아니라 해도 괜찮다. 더 궁금해지면 만날 것 같다. 자꾸만 기다려지면 만날 것 같다. 이름만 봐도 반가운 사이라서 만날 것 같다. 그날은 햇살 아래 장미향이 가득한 5월 어느 날일 수도 있고, 초여름 비에 꽃 진 거리에서 일수도 있을 것 같다. 붉은 장미꽃 향기보다 노란 참외 냄새가 달콤하게 느껴지는 오늘이었다. 그리운 사람들은 만나야 하는 이 계절 안에서, 어쩌면 다른 계절에서 우리도 만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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