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시안 Apr 29. 2022

표현

자정이 넘은 시간, 베란다 창밖으로 차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시속 80 이상으로 달리는 인적 없는 도로에는 자동차들이 바람을 가르며 달리고 있다. 버스가 끊긴 시간이라 비슷한 크기의 자동차들이 제각기 소리를 내는 것 같다. 달리는 속도로 다르게 들리는 음폭을 느끼다 나는 눈을 감는다. 지나간 듯 만 듯, 작은 소리를 남기기도 하고 스포츠차처럼 순식간에 굉음을 내며 지나가기도 한다. 30초 정도 간격에서 1분, 2분으로  소리의 간격이 넓어진다. 낮에는 들리지 않던 차 소리가 밤의 적막 사이로 파동을 일으킨다. 점점 크게, 점점 작게 더 이상 소음이 아닌 소리로.


한밤의 고요를 깨는 자동차들의 소리가 다르게 들리는 것처럼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색깔로 소리를 전한다. 나는 주고받는 글에서도 행간이 읽히고 말줄임표로 그 사람의 오늘이, 때론 어제가 느껴진다. 그러나 지내다 보면 아무 날도 아니었던 날에도 습관처럼 말줄임표를 쓴다는 것을 알았고 생각보다 의미 없이 쓰는 말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톡 대화중 ㅇㅇ이 아직도 낯설다. 아주 친한 사람들이 ''이나 ''대신 ㅇㅇ을 하면 잠시 멈칫하게 된다. 이게 뭐라고, 이 아무것도 아닐지 모르는 ㅇㅇ에 의미를 얹는지. 그럴 때면 상대방의 감정에 민감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 번은, 나도 쓰면 눈에 익숙해지지 않을까 싶어 아들의 톡에 ㅇㅇ을 써봤었다. 아들 역시 친구들과 ㅇㅇ을 쓴다. 그런데 안 쓰던 내가 ㅇㅇ을 쓰자 기분이 안 좋으냐고 물었다. 그건 평소에 이모티콘을 날리고 하트를 날리는 내가 마치 '... '(말줄임표)를 쓰는 느낌일까. 말줄임표를 쓴 사람을 보면 '무슨 일이 있나' 가 먼저 떠오르고 ㅇㅇ은 '나는 바쁘니 짧게 대답할게'로 보인다. 그래서 나는 ㅇㅇ은 쓰지 못한다. 그렇지만 아무 감정의 의미가 없는 표현이라는 것을 알기에 상대방의 마음에까지 나의 감정을 보태진 않으려 한다. 다만, 나도 모르게 아주 잠깐 시선이 얹었다 지나갈 뿐이다.


언젠가부터 남편이 퇴근을 할 때면 퇴근 이모티콘을 보낸다. 매일매일이 다양한 이모티콘이다. 그 이모티콘 하나를 보면 얼마나 퇴근이 좋은지 느껴진다. 퇴근시간이 지나면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이모티콘 한 개가 톡 하고 온다. 남편은 몇천 원을 이모티콘의 즐거움에 쓰고 있다. 살면서 이모티콘을 돈 주고 사는 일은 없었고 이모티콘이나 웃음표시도 잘 쓰지 않았었다. 아이들을 칭찬해주라고 톡이라도 남기면 축하한다고 전해달라고 말하는 사람이었는데 남편의 이모티콘은 변화의 시작이었다.


갱년기를 거치면서 몇 년 사이에 남편은 많이 변했다. 표현에 낙 약한 남편의 이모티콘은 나에게 남편의 하루가 '그런대로 괜찮았고 무사히 보냈다'는 소리로 들린다. 남편과 나는 퇴근한다는 정도의 톡 대화가 짧은 부부였다. 그렇게 오랫동안 썰렁했던 남편과의 톡방에 어느 날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퇴근 이모티콘이 날아들었다. 그 이모티콘은 꼭 남편 같았다.

 

그런데 당분간 남편의 출퇴근이 고생스럽게 되었다. 운전해서 가면 20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지만 통근 버스들이 없어지면서 어느 날은 퇴근이 두 시간이 걸렸다. 걷기도 많이 걷고 차 안에서 서있는 시간도 많은 것 같다. 어디쯤 왔나 전화를 했더니 목소리에 지침이 가득하다. 이모티콘은 날아오는 모습이었는 데 퇴근시간 버스 안에서 지친 남편은 그 이모티콘이 아니라 파김치가 된 모습이었어야 했다. 힘들었지 물으니 괜찮다고 한다.


스물한 살에 남편을 만나 지금까지 남편에게 힘들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그저 나는 남편의 소리로 느낀다. 말소리의 끝이 주는 느낌으로 짐작한다. 아이들과 내가 버릇처럼 하는 힘들다는말이 남편에게는 쓰지 않는 말이다. 무심히 쓰는 말들도 누군가에게는 평생 쓰지 못하는 말이기도 하니 말이란 것이 참 무게가 알 수없다는 생각이 든다.


 남편의 의지와 상관없이 남편은 점점 자상한 아빠로 바뀌어가고 있다. 아니 친절한 아빠라고 해야 할까. 어쩌면 외로운 아빠라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큰애가 뭐라도 물어보면 아들 침대에 누워 인형쿠션을 껴안고 큰애가 물어보는 것을 눈을 반짝이며 기다린다. 어느 날은 작은애 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아 가보면 잠든 아들 옆에 백허그로 안고 잠들기도 하고 공부하고 있는 아들 뒤통수만 보이는 침대에 대어 핸드폰을 본다. 그 모습을 볼 때면 잠시라도 아이들 옆에 있고 싶은 마음이란걸 아니깐 짠하기도하다.


아들들을 위해 남편을 데리고 와야겠다 싶어 문을 열면 아이들은 씩 하고 웃어준다. 변하는 아빠의 모습을 아들들이 재밌게 여겨줘서 다행스럽다. 다 큰 아들들이 아빠가 자꾸만 침대에 와서 누워있는 것이 좋기만 하진 않을 텐데 그런가 보다 여겨주니 고맙다. 고마운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일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귀찮은 내색을 말로 안 하는 것도 아빠 마음을 헤아려주는 표현이니 다행이라 여겨지는 것이다.

남편은 오늘도 말없이 몸으로 표현을 한다. 자신이 얼마나 아이들과 가까운지, 그래서 좋은지.

말보다 저절로 나오는 행동이 상대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는 것처럼.

표현은 우리를 변화시킨다. 아주 천천히, 아주 가깝게 서로에게 다가가도록.












매거진의 이전글 그냥 그런 하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