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것은 뭘까요? 심오한 질문이지요. 언제는 알았다가 언제는 모르는. 누구나 알 것 같지만 쉽게 알지 못해요. 산다는 것은 단순한 것이었다는 친한 작가님의 어제 글을 읽다가 끄덕였어요. 그리고 평온한 마음이 들었어요. 맞아요, 산다는 것은 거창한 무언가가 아니라 일어나서 잠이 들 때까지의 기록이었어요. 그래서 어떤 순간도 나름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요. 좋은 날이든 그렇지 못한 날이든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일 테니깐요.
아침에는 둘째가 평소 시간보다 조금 늦게 등교 준비를 했어요. 빨리 나가야지 않냐고 물었더니 친구와 정류장에서 만나서 같이 가기로 했다고 하더라고요. 아이가 나가고 둘째 방을 청소하기 위해 창문을 열었더니 저만치 정류장 옆의 건널목이 보였어요. 둘째네 교복을 입은 학생이 옆의 정류장이 아니라 건너는 맞은편에서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저희 둘째가 길을 건너고 함께 정류장으로 가더라고요. 어쩌다 멀리서 그 모습을 봤는데 그 순간 왜 그렇게 마음이 좋은지 모르겠어요. 친구가 기다려주는 마음이 참 예쁘고 고마웠어요. 아침에 그 친구냐고 엄마가 봤다고 하니 자주 보진 말라네요. 신경 쓰인다고요. 물론 안 본다고 했지요. 저희 둘째에게 산다는 것은 좋아하는 친구와 만나서 등교하는 그 순간이 쌓이는 거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이들 서로가 건너올 때까지 마주 보며 기다려 준다는 것이 저는 왜 그렇게 예쁠까요.
조금 전 쉬는 시간에 잠깐 거실에 나온 첫째가 죽음학 리포터를 쓰는데 시간이 좀 걸린다며 죽음학 수업이야기를 했어요. 선택과목이라서 선택할 때는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 데 매번 임종을 마주하는 장면들을 보고 나면 먹먹해지고 산다는 것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고요. 환자의 임종을 마주할 때의 여러 마음들을 미리 생각하게 하는 것이 수업의 이유 같기도 해요. 며칠 전 산다는 것에 대한 첫째의 말이 왜 나왔는지 조심스럽게 짐작이 됐어요. 제가, 사는 거라고 말했어요. 살아 있어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며 사는 것, 그게 그저 아침에 눈을 뜨고 반복되는 일상이라도 살아내는 것이 사는 것이라고요. 때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어도 좋고 열심히 달려도 좋고요.
실버타운에 계신 친정엄마가 전화를 하셨어요. 티브이를 보다 너무 드시고 싶은 것이 있으시다고요. 주꾸미가 나오는데 맛있어 보인다고 주문을 부탁하셨어요. 입맛이 없으셔서 얼마 전에 사드린 홍어도 더 드시고 싶다고요. 친정 엄마의 잃어버렸던 식욕이 생기셔서 다행이에요. 어르신들은 못 드시면 큰일이 나거든요. 재활이 남은 엄마가 외출이 자유롭지 못하셔서 가끔 드시고 싶은 것을 시켜드려요. 엄마는 미안해하시면서 제가 시켜주는 것이 낙이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옆실 친구분들과 나눠 드실 때 즐거우신 거 같아요. 저희 엄마에게 산다는 건 맛있는 것을 드시며 오늘을 즐겁게 지내시는 거예요. 친정 엄마의 밝은 목소리를 들을 때면 산다는 건 이런 거지 싶어요.
베란다에 작은 꽃 화분들이 몇 개 있는데 개발 선인장도 있어요. 딱 한번 예쁘게 빨간 꽃을 피워주더니 오랫동안 웅크러지고 축 처져 있었어요. 그러다 꽃은 더 이상 피지 않겠구나 싶었을 때 쌀알만 한 붉은 꽃봉오리가 맺히기 시작했어요. 조만간 그 작은 봉오리를 터뜨리고 선인장 꽃들이 나올 준비를 하는 것 같아요. 잎만 있던 분홍색 장미 베고니아와 귀여운 칼랑코에도 예쁜 꽃을 보여 줬어요. 가만히 보고 있으면 신통해서 쓰다듬어 주고 싶지만 이쁘다 말해줘요. 꽃을 피워줘서 고맙다고요. 햇살 좋은 베란다와 시간이 전해준 생각지 못한 즐거움이에요. 알지 못하는 내일이지만 웃음 짓게 하는 오늘이 있다는 것. 제가 느끼는 산다는 것은, 어느 날은 괜한 걱정이 쌓여 울적해도 하지만 어느 날은 가진 것이 많아 보여 이만하면 됐지 싶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감정에 흔들려 이랬다 저랬다 해도 저로 오늘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에요. 제게 산다는 것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