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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시안 May 30. 2022

 우리들의 방

친한 지인들이 밤늦게 베란다에 혼자 앉아 있지 말라고 하지만 밖과 거실의 경계인 이곳이 나는 좋다. 한쪽에는 둘째가 쓰던 갈색 책상을 가져다 놓았고 오래된 의자 세 개가 쪼르륵 작은 벤치를 만들어 놓은 베란다의 새로운 공간. 이 시간 이곳에 앉아 있으면 마음이 평온해진다. 주기적으로 들리는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에 오히려 집중이 잘 되는 곳이다. 그런 때는 나와 상관없는 소리에 알아서 걸어내지는 필터링이 작동하는듯하다.


고개를 조금만 들어도 보이는 까만 밤하늘은 검은색 솜이불 같다. 묵직하게 소리를 덮어주는 느낌이다. 8층이라서 건너편 아파트에서 보면  밤마다 앉아서 밖을 보고 있는 여자의 모습은 이상하다 여길 수도 있겠구나 싶다.  멀리서 보면 보이는 것이 다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앉아있는 자리가 잘 보이지 않도록 가려지는 가림막 커튼을 내쪽으로 당겼더니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멀리서 나를 보면 어느 각도에서는 내가 보일지도 모른다. 안 보이는 줄 알았는데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인생은 그럴 때가 있으니깐. 보고 싶으대로 보고 믿고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이 가는.


공간,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을 가지고 싶어 한다. 이사하면서 거실에 있던 소파 테이블이 안방으로 들어갔고 그 공간에서 남편은 재택근무 일도 하고 좋아하는 게임도 한다. 그 소파 테이블에는 서랍이 있는데 사랍 안에는 남편의 자잘한 물건들과 작은 서류들이 있다. 소파 테이블이 남편의 방인샘이다. 네모난 공간에서 또 가지게 되는 또 다른 방이다. 베란다의 의자가 독립적인 공간이라 좋다는 생각이 들지만 남편의 소파 테이블은 오픈되어 있지만 편안함을 주는 남편의 공간이다.


아이들의 방은 자주 열려 있지만 딸각 닫는 문소리가 들리면 비로소 그때 자신들의 방이 된다. 열려있던 문을 닫는 것은 이제 자신들의 공간에 이유 없이 문을 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의 표출이다. 엄마도 자신들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해달라는 무언의 딸각 거림이다. 방 안에서 아이들의 또 다른 방은 이어폰이다. 아이들의 귀에 이어폰을 꽂는 순간 아이들의 독립된 순간이 주어진다. 음악을 듣기도 하고 짧게 편집된 영화도 본다. 공부를 하는 경우도 이어폰을 꽂는다. 내가 베란다에 앉아 자동차의 소음에 오히려 집중이 잘되는 것처럼 아이들은 음악을 들으며 집중을 하는 것일지 모른다.


 작은 군사들이 움직이는 게임을 하는 남편에게 어떨 때 기분이 좋으냐고 물었다. 임에서 좋은 땅을 구했을 때라고 한다. 아이템을 사지 않고 게임을 하는 남편은 그야말로 발로 뛰는 것 같다. 모여하면 모이고 헤쳐라고 하면 흩어지는 일반 군사다. 얼마 전 남편의 재택근무 날  메타버스 플랫폼 안에 남편과 회사가 구현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마치 게임을 하는 것처럼 회의를 하는 모습이 색달랐다. 자신의 아바타가 화면 안에서 움직이는 세상이다. 게임 속 어느 군사가 되고 메타버스 속 아바타가 되는 세상이 있는 컴퓨터가 놓인 방에서 남편은 눈을 반짝인다.


아직 학생인 아들들의 방에는 이룰 수 있는 수많은 미래가 있다. 저 공간 안에서의 아이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걱정하고 때론 절망도 하지만 다시 책상 의자에 앉는다. 아직 과를 정하지 않은 첫째는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가 고민이고 원하는 대학에 가고 싶은 둘째는 비장하게 의자에 앉아 있다. 귀에 꽂고 있는 이어폰으로 또 다른 문을 닫고 자신들의 꿈을 위해 주저앉았다가, 일어났다가 달리고 있다. 그러다 이어폰에서 들려오는 어느 가사에 꽂히는 날이면 그 노래에 기대어 지친 하루를 넘기기도 한다.

남편의 컴퓨터가 있는 곳, 아이들의 이어폰이 있는 세상 그리고 나의 베란다 벤치는  마음이 쉬는 곳이다. 오롯이 각자의 감정에 충실할 수 있는 공간에서의 휴식 후, 그 힘으로 닫힌 문을 열고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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