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마지막 날, 스물한 살에 남편을 만나 7년 연애를 하고 맞는 스물네 번째 결혼기념일이다. 언젠가부터 생일이나 기념일이 특별하지 않게 지나가서 오늘도 별 다르진 않지만 오늘따라 회식이 걸린 남편 때문에 저녁시간이 비었다. 작은 아이는 학원을 갔고 실습하고 온 큰아이는 잠이든 시간 운동화를 신고 무작정 나왔다.
운동이라도 할까 싶다가집앞한산한카페에들어왔다.몇 시간 후면 결혼기념일이지나갈테니 글로라도남길까싶었다.앨범을 정리할 때 핸드폰에 찍어놓은 묵은 결혼사진도 들춰보고 사진들을 넘기다 보니 새삼 세월이 눈 깜짝할 사이 지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샤인 히비스커스 차 한잔을 시켜놓고 아직은 아무도 없는 빈 카페에 앉아있다. 남편을 안 지는 30년이 넘은 셈이니 인생의 반이상을 남편과 함께했다. 한 시간만 이렇게 글을 쓰고 일어날 생각이라서 호로록 한잔 마시는 동안만 쓰는 글이 될지도 모르겠다. 생각의 흐름대로 쓴 글이라서 서랍으로 들어갈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냥 적고 있다.
오랜만에 핸드폰으로 글을 쓰고 있는데 어느 때보다 손가락의 오타가 적다. 왠지 집중이 잘되는 것을 보니 한 시간이면 쓰고 일어날 수 있을 것 같다. 붉은 샤인 히비스커스를 한 모금을 마시니 싱그러운 샤인 머스킷의 달콤함과 히비스커스의 향긋함이 입안에 머금는다.
이십오 년 전 웨딩촬영 때 너무 잘 웃어서 볼이 경련이 날 정도였는데 유일하게 웃지 않고 찍은 혼자 찍은 사진이 있다.이사올때 앨범보며 정리 하던 날 카메라에 담아 두었다.
25년 전 그날의 웨딩드레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웨딩드레스를 고를 때 나는 엘리의 드레스와 비슷한 것을 찾았었다. 엘리는 원수연 만화 풀하우스의 주인공이다. 풀하우스에서 엘리와 라이더의 결혼식날 엘리가 입은 드레스와 비슷한 것을 찾았다. 요즘이라면 심플한 드레스를 입었을지 모르지만 그때는러블리한 느낌이 좋았다. 엘리의 드레스처럼 팔뚝에 레이스와 리본이 있었던 예쁜 드레스였다. 지금보면
어색하지만 나는 웨딩드레스가 참 마음에 들었었다.
처음 시어머니를 뵈었을 때 종손인 거 아느냐고 말씀하시던 게 생각이 난다. 스물일곱 그때의 나는 무서운 것이 없었다. 모르면 용감하다고 종손이며 제사가 많다는 이야기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무슨 말씀이셨는지어느새나도 알 것 같은 나이가되었다. 얼마나해맑은 신부였는지. 결혼식 날의 나에게 말해준다면 그만 웃으라고. 뭐가 좋아서 그렇게 자꾸 웃냐고 말하고 싶다. 폐백을 받으실 때 돌아가신 아빠가 눈물을 훔치시는 모습의 사진이 있다. 남편의 친구들이 찍은 사진 속에 눈물을 닦으시던 아빠의 모습이 왜 이렇게 생각이 나는지. 그래도 카페라서 아빠 생각은 여기까지만 하련다. 잘 계시겠지. 우리 아빠.
결혼식날 우리는 신혼여행을 바로 가지 못했었다. 남편이 혼자 지내던 집 건물에 문제가 생겨서 세입자인 남편의 확정일자 문제로 며칠을 서울에 머물러야 했다. 결혼식이 끝나고 남편과 나는 시내 호텔로 향했다. 그리고 남편의 절친들이 한 명씩 호텔로 왔다. 007작전처럼 가방들에서 나온 검은 봉지에 들어있던 빨간 떡볶이와 튀김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하루 종일 먹지 못했던 내가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모른다. 머리에 꽂혀있던 수많은 실핀도 못 뽑고 친구들과 먹던 음식들이 있었다.
동갑인 남편은 친구들중 제일 먼저 결혼을 했다. 그래서 아이들 중에서 우리 첫째의 나이가 제일 많다.결혼식날 친구들 기념사진 촬영때는 다들 어려서 졸업사진 같았다.오랫동안 잊고 살았는데 오늘은 기억의 끝에 아저씨들이 된 그 아이들이 생각이 난다. 그날의 남편 친구들은 잘 지내는지. 몇해전 시아버님 돌아가셨을 때 봤을때 모두 어른이 되었던데. 얼굴만 그대로였던 것이 신기했다. 나를 보면서도 그럴 테지. 어느새 우리 모두는 다 어른이 되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써야 할 듯싶다. 아무래도 카페 아르바이트생이 편하게 청소하기 위해서는 일찍 나가줘야 할 것 같다. 한 시간 동안 쓴 글이 앞 뒤 맥락이 없는 글이 됐을지 몰라 어쩔까 싶지만 결혼기념일이니깐 저장을 한다. 선물받은 아이스크림 케잌을 찾아 올해는 이렇게추억하는 걸로 마무리해야겠다. 그래도바람 시원하게 부는 5월 마지막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