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이 책상 위에 있던 미니 아이비가 며칠 사이 푹시들었다. 몇 년 동안 푸릇푸릇함을 잃지 않던 화초가 시들해진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들 방 창가에 싱싱하게 피어 있으면 모든 게 평온한 듯 기분이 좋았었다. 거실의 해피트리 나무에 물을 주었을 때를 생각해보니 작은 화초들 물을 주는 걸 놓쳤나 보다. 며칠 안되었다고 생각했는 데 이주가 훌쩍 지나갔다. 게다가 큰아이가 없을 때도 암막커튼이 쳐져 있었기 때문에 빛도 모자랐을 것 같다. 봐달라고 버티다 고개를 푹 숙인 느낌이었다. 급한 데로 얼른 물을 주고 통풍이 잘되는 곳으로 옮겨 놓았다. 반나절이 지났을까 미니 아이비가 쳐졌던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잎으로 꽉 차 있던 것만 생각했다. 놓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의미를 붙이는 거 하지 말자 싶어도 왠지 꼭 살려내야 할 것 같았는데 마음이 놓였다. 살아주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다만 말라 떨어진 잎 사이로 듬성 듬성 공간이 생겼다. 가만히 바라보면 모양은 덜 이쁘지만 숨을 쉬는 것 같다. 가지와 가지가 잎과잎끼리 닿지 않는 자리가 생겼다. 잎들이 꼭 많아야 좋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의 뿌리와 뿌리가 닿지 않게 거리를 두고 있듯 잎이 커지고 자라날 빈 공간이 필요했을지 모른다. 어쩌면 가지치기를 기다렸을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부터 흰밥에서 현미밥으로 바꾸어 볼까 해서 발아현미밥을 먹었다. 흰밥에서 바로 고슬고슬한 현미로 가는 것보다 워밍업처럼 발아현미밥을 먹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리고 오늘부터 현미밥으로 먹기 시작했다. 역시나 고슬고슬한것이 많이 씹어주어야 한다. 식사 조절할 때 젓가락을 사용해보는것이 좋다는 말을 듣고 젓가락으로 밥을 먹었는데 젓가락으로 먹기에 현미는 한 톨 한 톨 잘 떨어져 잘 집어야 했다. 확실히 빠르진 않다. 느리다. 식사 속도가 느려졌다. 그러다 보니 반찬을 챙겨 먹는다.
흰밥을 먹을 때 나는 속도가 빠른 편이었다. 음식을 먹을 때 그렇게 천천히 먹는 게 좋다고 해도 잘 바뀌지 못했다. 그런데 현미식을 하니 천천히 식사를 한다. 그냥 먹었던 식사가 즐기는 식사가 되었다. 이게 아닌데, 입맛이 없어야 하는데 나는 현미밥도 맛있어서 입맛이 도니 그저 천천히 먹는 거라도 하자 싶다. 밥을 먹을 때의 시간, 오래 씹는 행위가 나에겐 필요하다. 냉장고 청소를 하고 비어있는 칸칸에 현미밥을 얼려 놓았다. 오랜만에 텅 비어 있는 냉장고를 보니 마음이 여유롭다. 구수한 흰밥은 약속 있을 때맛있게 먹기로 했다. 현미밥을 씹고 있다 보면 세상이 조금 느리게 가는 것 같다. 그런 느림이 오히려 편안한 건 왤까.
생각이 너무 많아지면 과부하가 온다. 무엇을 물어보면 금방 생각이 나지 않아 한참을 기억해 내기도 하듯 불필요한 감정들을 스노우 볼처럼 굴려 스스로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많은 생각들 중에서 존재하지만 필요하지 않은, 그냥 쌓이고 쌓여 마치 오래전부터 굳어버린 것 같은 생각들에
흔들릴 때도 있다. 생각만 바꾸면 되는 것을, 끄집어내지 못하고 마음이 흔들린다. 그러나 마음을 흔들리게 하는 것은 어쩌면 스스로의 생각일지 모른다.
핸드폰의 버퍼링이 느려지고 충전이 잘 되지 않아 핸드폰을 바꾸었다. 몇 년을 가지고 있던 핸드폰 안에는 지우지 않은 어플들이 가득했고 묵은 사진들과 카톡 대화로 사진 한 장도 저장이 되는 않는 상태였다. 그런데 어찌하다 보니 기기 변경을 하면서 그전 데이터를 그대로 가져오지 못했다. 다시 데이터를 깔까 하다 말았다.
대부분의 어플이 사라지고 톡 안의 대화도 기기가 바뀐 후의 대화만 남았다. 몇 년 동안 묵힌 어플들이 없으니 터치하는 느낌도 다르게 가볍다. 용량이 텅텅 남는다. 핸드폰의 무게가 가벼워지니 머리도 한결 가벼워진 것 같다. 필요한 어플을 그때그때 깔아서 사용하기로 했다. 바탕화면에도 나와있는 것이 별로 없다. 이렇게 홀가분한 느낌이었다면 진작 정리를 했을 것을 생각해보지만 이 가벼움 또한 답답함 뒤에야 느낄 수 있는 것이니.
관계에서 공간을 두면 생각이 편해진다. 어쩌다 아이비 잎들 사이에 생긴 공간이 나쁘지 않은 것처럼, 현미밥을 먹는 시간적 여유가 편안하듯. 텅 빈 냉장고의 찬 공기에도 머리가 맑아진다. 수고스럽긴 하더라도 선택해서 핸드폰에 어플을 깔 수 있는 빈 공간이 좋다. 이 많은 여백 안에서 내가 놓치고 사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다. 너무 가까이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관계도 그럴 테지. 조금 떨어 뜨려 보아야 잘 보이는 핸드폰 글씨처럼 떨어져서 보면 관계도 선명해 보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