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보드랍고 포근한 어둠
알람이 고요를 흔들어 나를 일으켜 앉히면
그제야 어둠 속에서 눈을 뜬다.
커튼 사이로 푸른빛이 서성이며
천천히 어둠을 걷어내려 할 때
창밖에서 들리는 물까치 소리
어김없이 열어준 하루
벗어놓은 안경을 쓰고 방안을 둘러보면
희미하다가 선명해지고
어둡다가 밝아지고
어제도 사라지는 것 없었고
오늘도 남겨질 나의 시간들
흘러가는 초침을 잡고
보내지 않을 아침을 시작한다.
베란다 문을 여니 새벽 향기가 짙다. 젖은 나무와 흙냄새에 차가운 공기마저 가라앉은 시간, 평온하다. 며칠째 뭉쳐있던 어깨가 툭 내려간다. 휴, 정신없던 한주가 지나갔다.
거동이 불편해지신 친정엄마에게 갔다가 자정이 다 돼서야 돌아와 잠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오랜만에 보는 새벽 아침이다. 아파트 1층이라 호사를 누린다면 베란다 밖의 나무들이 내 앞마당 정원 같다는 건데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맑으면 맑은 대로 나무들을 가까이 볼 수 있어 좋다.
몸은 솜에 젖은 것처럼 무거운데 이상하게 머리는 맑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는 건지 실감하고 있다. 거동이 불편해져 우울해질까 걱정스러운 친정엄마께 자식들의 변함없는 마음과 노력을 알려드리는 것이 쉽진 않다. 하지만 헛헛한 삶에 슬퍼진 엄마에겐 자식들의 마음을 전해드리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느낀다. 그래서 가족들끼리 더 자주 엄마에게 다녀오자고 약속을 했다. 엄마가 혼자가 아니라는 마음은 재활을 위해 큰 힘을 줄 거라 생각한다.
현관 옆 전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싫었다. 들락날락 옷을 몇 번씩 갈아 입고 머리를 매만져 봐도 외출하는 내 모습이 맘에 들지 않던 그때, 글을 쓰기 시작했다. 선물처럼, 내 공간이 생기고 나는 스스로 나를 힘겹게 했던 것들에 대해서 자유로와지고 있다. 엄마의 존재가 우리 자식들에게 얼마나 소중한 지 아신다는 게 슬픔을 걷어 낼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다. 마음이 바닥을 쳤을 무렵 나를 끌어올렸던 힘 또한 미미하게 느껴지던 나의 존재가 조금은 인정받았다는 마음이었으니깐.
이상하리 만치 많은 것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말랑해졌다. 마음이 불편할 때는 내가 가지고 있던 것들이 잘 보이지 않았다. 놓쳐서 억울하고, 보내서 아쉬운 일들만 생각났었다. 이제는 화장실 거울을 보고 놀라지 않는다. 변한 건 없지만 미워보이진 않는다. 조금 헝클어진 머리는 질끈 묶어 버린다. 글을 쓰기 시작한 일주일은 가만히 있어도 실금실금 웃음이 새어 나왔다.
물론 드라마틱하게 나의 일상들이 변한 건 아니지만 나는 내가 조금은 근사해 보인다. 세상 예쁘지 않던 내 모습이 괜찮아 보이기 시작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도 표정을 찾았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다.
자기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6개월 동안 스스로를 바보스럽다 여기며 자신에게 관대하지 못하는 걸 지켜보았다. 아무리 괜찮다 말을 해주어도 스스로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마음 하나 지니는 게 반년이 걸렸다. 그래도 어렵게 한번 배워진 마음은 두고두고 자신을 아껴주는 힘이 되어줄 것이다.
재택근무로 바뀐 남편도 일찍 깼다. 9시가 되면 안방이 남편의 사무실이 된다. 남편과 마실 믹스커피를 탄다. 남편은 아메보다는 믹스 쪽이다. 커피를 내려주더라도 우유를 넣어줘야 한다. 나도 믹스를 좋아는 하지만 매일 마시진 않는다. 나는 남편이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 줄 알았다. 우리 부부가 술이라면 모를까 커피를 함께 마신적은 별로 없어서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 같다. 생각해보면 오래전 연애 때도 그랬다. 늘 학교 앞 만화가게에서 시간을 보냈었다. 남편과 마주 보고 커피 마시던 연애 기억은 별로 없다.
남편이 매일 출근해서 믹스커피를 한잔씩 하면서 시작하는 걸 생각 못했다. 화상회의를 준비하면서 한잔, 점심 먹고 한잔, 중간에 졸리다 싶음 또 한잔이었다. 우리 부부는 서로가 좋다 싫다를 말을 잘 안 하기도 하지만 재택근무가 아니었으면 알지 못했을 것 같다. 내가 무심했나 미안해진다.
믹스가 없는 걸 보고 남편이 주문을 했다. 받고 보니 200개 대용량이다. 당분간은 믹스커피를 실컷 마실 것 같다. 나도 몸이 피곤할 땐 믹스커피가 맛있다. 남편과 마시는 커피가 오늘따라 더 달달하게 느껴진다. 새롭게 바뀌어진 일상이지만 그 안에서 재미를 찾다 보면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괜찮다 생각하면 괜찮아질거다. 마음먹기 나름이라면 좋은 쪽으로 생각하도록 노력해야겠지.
물론 순간순간 감정을 놓치기도 하겠지만 다시 마음을 잘 챙겨서 씩씩하게 시작하면 되는 거니깐.
그렇게 살아가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