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 쌀쌀한 토요일 오전, 토요일이지만 첫째 아이는 온라인으로 시험을 보고 있다. 거실로 나온 남편이 습관처럼 텔레비전을 켜고 볼륨을 올리려다 시험 보고 있는 중이라는 말에 흠칫 놀라 얼른 끈다. 끄라고 까진 아니라 볼륨만 높이지 말자는 거였는데.
우리 집은 텔레비전 시청을 아주 좋아한다. 다행인지 몰라도 텔레비전 소리에 남편이나 아이들이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남편과 아이들 모두 공부를 할 때도 개의치 않아한다. 끄려고 하면 끄지 말라고도 하니 사람은 적응을 정말 잘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지 우리 식구는 소음에 조금 강한 편이다.
첫째 아이가 시험을 보고 있는 날이라 집안이 조용하다. 온라인 시험이라 오늘만큼은 작은 소음도 피해 주고 싶어서 나도 방으로 들어와 키보드를 꺼내 앉았다.
윗집이 새로 이사를 왔는데 오늘은 공사 소리가 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일주일 정도 한다던 것이 한 달이 다되어 가나보다. 공사 소음은 정말로 대단했었다. 윗집 바닥공사를 하면서 타일 깨는 소리는 마치 내 머리 바로 위에서 나는 것 같았다. 어지간하면 소음에는 무딘 우리 가족들이지만 지난 시험 때 첫째 아이는 스터디 카페로 나가고 둘째 아이는 이어폰을 끼고 볼륨을 높이고 지내야 했었다.
바닥 깨는 소리에 머리가 아팠던 나는 마트로 피신을 했고 남편만 진동으로 온 집안이 울리는 그 밑에 앉아서 재택근무를 했었다. 카페에 가서 하라고 해도 그런 것이 익숙하지 못한 사람이라 고스란히 소음을 견디었다. 괜찮다고 하더니 오후쯤 들어왔을 때 남편의 얼굴엔 눈 밑으로 다크서클이 반뼘은 내려와 있었다. 모습이 그냥 퀭하고 초췌한 그 자체였다. 씩 웃으며 소리 엄청 크더라라고만 말하는 게 다였지만 나는 단번에 힘들었음이 느껴졌다.
어느 날은 거실에 앉아 있다가 윗집 바닥을 깨는 소리에 저러다 천장을 뚫고 거실로 떨어지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베란다 통창이 와르르 깨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공포에 가까운 날도 있었다. 윗집은 아랫집이 이 정도로 힘들었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나야 겪어봤으니 아는 것이니. 그게 예전 같으면 집집마다 많이 비어 있을 테지만 요즘처럼 재택근무와 온라인 수업을 하는 학생들이 있는 집에는 난감한 일이다. 하지만 사인도 해줬고 공사한다는 데 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냥 견디고 빨리 끝나기를 바랄 뿐이다. 이 나이가 되어도 사람끼리의 불편한 이야기나 싫은 소리에는 강하지도 못하고 하지도 못한다.
거의 한 달이 되어가니 마무리를 하는지 조용하다. 주말에도 내내 했었는 데 얼마 만에 느끼는 평화로움인지. 그런데 참 희한한 것이 처음 엄청난 소음에서 견디다 보니 탁탁 치는 망치 소리, 쿵쿵하는 누군가 뛰는 소리 등은 귀에 거슬리지도 않는다. 사람 사는 일이 그런 것 같다. 현재 속상한 일이 제일 크게 느껴지다가도 더 큰 일 앞에서는 무색해지는. 그리고 큰일을 겪다 보면 작은 일에는 담담해지는.
첫째 아이는 두 시간째 시험을 보고 있다. 새벽에 깨서 보니 밤을 꼬박 새우고 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첫째 아이는 지난 시험 때도 열심히 했었다. 내가 보기에는 더할 나위 없지만 재수강이 없는 시스템이라 아이는 시험이 끝난 후에 아쉽게 본 과목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다. 그래도 시험이 끝이 아니란 것도 알고 스스로의 마음을 챙길 줄도 알아가는 것 같다. 시험이 끝나면 아이는 분석하고 반성하고 아직까지는 아쉬운 감정도 나한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아이가 커가는 것을 느끼는 것은 자신의 시무룩한 표정도 나에게 미안한 일이란 것을 안다는 것이다. 나한테 미안하다고 말한다. 툴툴 털지 않고 기운 없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그렇게 말하는 첫째 아이를 보니 저렇게 어른이 되어가는구나 생각에 고마웠다.
첫째 아이가 자기가 힘들어했을 때 남편이 했던 말을 이제는 알겠다고 했다. 걱정 많은 아들에게 남편은 문제를 문제로 느끼고 싶지 않으면 더 큰 문제를 만들면 된다고 강하게 표현했었다. 당장 코 앞에서 해결해야 하는 커다란 문제 앞에서는 그전에 느끼던 작은 문제들이 숨어버리는 법이니깐. 물론 성격적으로 그런 것이 잘 되는 사람도 있고 어려운 사람도 있다. 성격이 다른 남편과 아들이지만 아이가 느끼기에 남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가는 것 같다.
첫째 아이는 계속 시험이 있다. 내년 1월까지 시험이 있고 혹시 재시 기간까지 끝나려면 2월이 된다. 사실 나도 3월이 되어야 마음이 놓일 것 같다. 아이는 성적에 미련을 두지만 나는 무사히 진급이면 감사하다.
나 역시 조금씩 아이에게 대응이 달라짐을 느낀다. 한 발자국 떨어져서 이성적으로 대답하려고 노력한다. 타고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처럼 경험에서 배워가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 이내 아이도 안다. 너무나 바쁠 때는 감정을 느낄 틈도 없다는 것을.
아들도 커가고 있고 나도 아직도 커가고 있는 중이다.
큰 소음에 작은 소음쯤은 별것이 아닌 것처럼 첫째 아이는 알아 갈 것이다. 앞으로 치러야 하는 수많은 시험들과 난관을 생각하면 오늘 아이가 느끼는 아쉬움쯤은 정말이지 세상 별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리고 되돌아 가서 감정을 힘들게 하는 것보다 지금 당장 해야 하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슬기롭다는 것을 배워갈 것이다.
겨울비에 어두웠던 베란다 밖이 오랜만에 햇살이 가득하다. 널어놓은 수건이 잘 마를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 며칠 동안 빗물에 축축 쳐져있던 노란 은행잎들도 어느새 부스러부스럭 소리를 낸다. 덩달아 나도 마음이 보송보송해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