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을 짓는다
쌀통에서 네 컵 쌀을 담는다
오늘도 같은 양이다
같은 양이라서 감사한 일이다
물을 받고 뽀얀 물을 내린다
설익은 시름이 흘러내려간다
무심의 시간,
맑은 물을 만나니 뿌옇던 시야가 환해졌다
여든여덟 번의 마음이 쌀 한 톨이라니
밥은 얼마나 사랑이 많을까
그토록 뜨거운 이유가 있었다
하얀 밥을 푼다 김을 굽고 간장을 담는다
뜨거운 밥에 김 한 장 얹고 간장을 찍어 먹으면
노릇한 고등어 한쪽 올려 아이 입에 들어가면
물 말아서 창난젓 한 젓가락 들어가면
오늘의 행복치는 그걸로 되었다
매일같이 쌀을 씻는 이유는
매일 같은 슬픔을 흘려보내기 위함이다
밥을 짓는 마음은 슬픔보다 한수 위라서
흐르는 물과 함께 흘러 보내기 위함이다
어쩌면 마주할지 모르는 슬픔에 맞서
밥을 짓는다
얼기설기 머릿속에 에스프레소 룽고 한잔이 들어간다. 그제야 맥주가 엉켜놓은 혈관들이 제자리를 찾아간다. 밤새 더 자란 머리를 돌돌 말아 정수리 가까이 올려 매면 바람이 목덜미를 스치우고 움찔 피부도 잠이 깬다. 어제 놓친 설거지 거리를 무심히 바라보다 숨 한번 길게 뿌리고 앞치마를 허리에 감는다. 세제가 잘 있나 확인을 한다. 어쩌다 세제가 똑 떨어질 때가 있을 땐 난감하다. 어떻게 세제가 떨어지겠나 싶기도 하겠지만 살다 보면 종종 그럴 때가 있다.
생수도 주문을 놓치고 아무 생각 못하고 있다 보면 식사를 할 때 1인 한 컵 만을 먹어야 할 때도 있다. 사실 물이 없다는 것을 나만 알았을 때 식사시간 내내 물을 더 찾으면 어쩌나 속으로 조마조마할 때도 있다. 물이 없다는 말이 좀 미안하다. 우스운 일 같기도 하지만 정수기를 쓰지 않는 우리 집에서는 가능한 일이다. 특히 명절이나 연휴로 배달이 원활하지 못할 때 물이 떨어지면 당혹스러워진다. 그래서 물이 아쉽다가 배달되었을 때면 그렇게 반갑다.
내가 물이 쟁겨져있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아파트에 살기 전 어렸을 때부터였다. 나는 수도꼭지에 달려있던 짧은 호스가 담긴 커다란 대야에 물이 가득하면 기분이 그냥 좋았다. 아직도 이유는 모르겠다. 엄마나 할머니 세대라면 그럴 수도 있을 테지만 내 나이대에는 별일일 수 있다.
지금은 쌀통에 쌀이 그득할 때 마음이 좋다. 그렇다고 쌀이나 물에 슬픈 기억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냥 좋은 것이다. 하물며 결혼 전날까지 엄마가 해주시는 밥을 먹었고 해 드린 적도 없다. 그러고 보니 결혼 전까진 오롯이 엄마의 밥을 먹었나 보다. 회사도 집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엄마와 아침을 먹으면서 아침드라마를 보고 출근을 해도 늦지 않았었다. 잊고 살았다. 내가 엄마를 신경 써 드리는 것에 가려져 오랜 시간 엄마가 나를 위해 차려준 밥을 잊어버렸다. 우리 엄마가 그러셨구나. 맞다. 엄마는 언니 오빠와 내가 혼이 나도 울면서도 밥은 먹어야 한다고 끼니를 놓치신 적이 없었다. 우리는 훌쩍거리면서도 밥은 먹어야 했다.
이제 설거지를 하기 위해 엄마가 코바늘로 짜주신 수세미들을 꺼내서 줄을 세운다. 엄마의 최애색 보라색 수세미를 집어 들었다. 엄마는 보라색을 참 좋아하신다. 그러다 보라색이 우울감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어쩌면 엄마의 심리가 보라색을 좋아하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었다. 살아오신 세월 속에서 보라색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그런데 언젠가부터 나 역시 보라색이 좋아졌다. 보라색이 눈에 들어올 때 은연중에 내가 우울감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점점 화려한 색을 좋아하게 된다는 수순을 따라가는 건지 모르겠지만 보라색이 좋다.
수세미에 세제를 한번 떨어뜨리고 문지르면 뜨개 수세미는 하얗고 몽실몽실한 거품을 만들어낸다. 뜨개실 사이사이의 공간이 오히려 거품을 더 많이 만들어내게 한다. 엄마가 짜주신 촘촘한 수세미는 공기층이 더 많이 생기면서 적은 세제 양으로도 거품이 잘 나는 것 같다. 특히 광택이 있으면서 가는 실은 코바늘과 만나면 세상 가볍고 폭신한 엄마표 수세미가 된다.
내가 설거지의 수세미나 세제에 신경을 쓴 것은 둘째 아이를 낳고부터였다. 첫째 아이 때는 다리에 임신성 소양증이 생겨 입원을 했었다. 임신 후기에 온다는 소양증이 나는 임신 2개월에 와서 약을 못 먹고 소양증을 견뎌야 했었다. 그래서 둘째 아이 때도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손과 팔 쪽으로 소양증이 왔었다. 그때 민감해진 피부는 오랫동안 세제에 반응을 했었다.
명절에 시댁에 내려갈 때면 내가 쓰던 세제를 어머니 모르게 담아가서 설거지를 하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손에 트러블이 생겨서 쓰던 세제를 가지고 왔다고 말하면 그만인 것을 시어머니께는 내색도 하지 못했다. 설거지 통에 담아서 설거지를 하시는 어머니는 헹굴 때만 물을 틀어 놓으셨다. 나는 이미 트러블에 생긴 상태에서 고무장갑도 소용이 없었다. 빨리 헹구어 내고 끝내야 할 것 같았다. 일주일정도를 있다 서울로 올라오면 며칠은 병원약을 먹어야 했었기에 그때의 설거지는 빨리 완벽하게 끝내야한다는 비장함이 필요했다. 어머니가 부엌에 들어오시기전에 끝내야했다. 그런 나에게 어머니는 왜 담갔다 하지 않느냐고 하셨지만 손 때문이라는 말도 하지 못했다. 아마 물을 아끼지 않는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나는 불편한 내색도 하면 안되는 줄 알던 착하다는 말에 스스로 갇힌 며느리였다.
그런 분위기에 서울에서부터 세제를 담아와 꺼내놓기는 어려웠다. 나는 절실했지만 유난 맞다 생각하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명절 때면 가방 깊숙이 담아 가곤 했었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설거지를 하다 보니 잊고 있던 기억들이 떠 오른다. 다행히 지금은 세제에도 강해진 피부가 됐다. 손을 혹사시켰던 같아 이제는 고무장갑도 사용하지만 헹굴 때 뽀드득 느낌은 맨손으로 느끼는 것이 좋다. 예전 기억에 가끔 설거지가 주저되곤 하지만 거품으로 설거지를 하고 말갛게 헹궈서 나란히 세워 놓고 나면 머릿속이 맑아진다. 밤에는 웬만하면 설거지를 쌓아놓지 않지만 못 치우고 자는 날은 물에 담가도 놓는다. 처음엔 마음이 불편했지만 불려놓았다 해도 괜찮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조용한 새벽에 하는 설거지도 나쁘지 않다. 싱크대 주변에 나와 있는 것들을 서랍 속으로 다 챙겨놓고 물기를 닦으면 설거지가 끝이다. 물론 저녁때가 되면 또다시 설거지가 쟁겨지고 들어갔던 물건들이 나와 어수선해질
것이다. 그러면 나는 또 설거지를 하면 된다. 때론 전투적으로, 때론 음악을 듣듯이 마음을 씻어내겠지. 물에 불릴 시간도 내주고 세월아 가라 천천히 설거지를 마칠 것이다. 설거지하는 시간은 생각을 안 해서도 좋고 생각을 해서도 좋다. 삶이란 생각하기 나름이고 느끼기 나름이다. 그것을 느낄 수 있는 오늘이 다행스럽고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