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월간 여선

5번

내 말과 글

by 여선

뻔한 이야기를 해보자. 어쩌면 술주정으로 나올 이야기일수도 있고, 힘들 때마다 징징대면서 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고. 남들만큼의 사연이다. 즉 별거 없다는 이야기이다.

인천 산곡동에 살적의 이야기이다. 중학교 2학년 때였는데, 학교를 가든 학원을 가든 경남 3차 가장자리를 둘러 가곤 했는데 경남 3차와 뉴서울 아파트 단지 사이의 블록에 상가가 있었다. 그곳 2층에 한 층짜리 작은 교회가 있었는데 그곳에 영문도 모른 채 이끌리듯이 들어갔었다. 그곳의 작지만 뭔가 경건한, 사람들을 다 품어줄 듯한 분위기에 매료되고 숨이 막혀왔다. 그러고서는 드는 생각이, 아, 이런 곳에서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보듬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보람찰까! 였다. 물론 그 뒤로 펼쳐진 상상의 나래는 인기척에 나온 목사님에게 막혔지만. 이리저리 얼버무리다가 도망쳤다. 그 뒤로 나는 신부님을 꿈꿨다. 모태종교로 천주교였고, 천주교나 기독교나 어차피 같은 예수님을 섬기고 있었기에 어찌되었든 성직자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사람들과 대화할 때 주로 상담자 같은 역할이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나와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주로 어린 사람들이었으니. 어쩌면 내가 그 당시 친하던 형, 누나들을 좀 지나치게 깍듯하게 대하느라 친해지지 못한 것도 있을지 모른다. 나중에는 그것이 불만이었지만, 그렇게 동생들과 대화를 하면서 그들의 고민거리를 진심으로 들어주고 해결할 수 있는 것은 해주고 싶었다. 그런 생각과는 무관하게 듣는 것의 9할은 실질적인 도움은 되지 못했던 것 같다. 어찌되었든 나는 그 당시 어렸고, 돈도 없고, 행동력이 왕성한 것도 아닌, 그저 찌질한 모범생인 척하는 어정쩡한 학생이었으니 말이다. 이런 성향은 대학생까지 계속되었던 것 같다.

2009년 3월, 야간에 누워있으면 별이 너무나 예뻤던 홍천의 하늘 밑에서 군복무를 하던 나는 천주교 군종병이 되었다. 모태종교다 보니 주말마다 성당을 자주 간 것이 크게 작용되었으리라. 사실 그 때는 성당 말고는 스트레스를 풀 길이라고는 인터넷 중독자답게 사이버 지식방을 이용하는 것 빼고는 없었으니 말이다. 천주교 군종병이래봐야 사단 군종병도 아니고 중대 군종병이라 부대 일과 다 받고 주말에만 성당에서 일해주는 척 노는거 빼고는 별거 없었다. 다만 인상깊었던 것이라면 군종병이 상담병 역할도 같이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당시 받은 상담병 수첩의 문장 중 하나가 아직도 기억난다. 상담자는 내담자의 거울이다. 내담자의 내면까지 비출 수 있는 거울이 되어야 한다. 내담자는 모두 제각기 그 안에 대답을 갖고 있기에, 자신 안에서 대답을 찾을 수 있도록 유도를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큰 감명을 받았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불사조의 알 이미지가 떠올랐다. 누구나 가슴속에 담고 있는 불사조. 타오르고 잿더미가 되지만, 기어이 다시 부활해 타오르는.

제대하고 나서 자주 연락하던 여자아이와 사귀게 되었다. 첫사랑은 아니지만, 처음으로 사랑이 서로에게 형태가 만들어진 모습이었다. 나는 그 아이의 아픈 부분을 보듬어 줄 수 있다, 는 확신이 들어서 사귀었는데 내 함량이 너무나 부족했다. 그래서 결국 헤어졌다. 헤어지면서 한 마지막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너 무서워, 농담 아니야. 진심이야. 난 그제서야 펑펑 울면서 후회했다. 내가 잘못했구나, 내가 이끌 수 있다 믿었던 것들이 결국엔 아무것도 아닌 지독한 약함이었구나. 나는 약한 사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구나. 그 때 이후로 뭐, 수라 같은 삶이었다. 밥도 못 먹었다. 담배가 밥이었다. 담배 세 대로 억지로 마취시키고 이리저리 헤매는 모습은, 그렇잖아도 비쩍 마른 모습을 더 비쩍 마르게 해 주었다. 그것을 치유하는 과정, 그 이전에 군대에 있던 도중, 그리고 연애하던 중,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내가 너무나 어렸다. 나는 그때마다 자책했다. 나는 왜 이럴까, 나는 왜 이다지도 쓰레기란 말인가.

그 결과로, 패배주의가 나에게 물들었다. 그렇잖아도 음울한 녀석이 더 암울해졌다. 나는 옳지 않구나, 나는 틀리구나, 라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러나 그것을 삼키고, 2012년 다시 학교를 재입학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나아졌다. 나아져야 했다. 어쨌든 난 집안의 장남이고, 스물 다섯이 다가오고, 캥거루같이 부모님 뱃속에만 쏙 숨어있을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회복은 완전하지 않았고, 그 때부터 내 독특한 대화 스탠스가 만들어졌다.


내 말은 틀리다. 하지만 내 말을 반박함으로서 더 나은 결론이 만들어지고, 그것이 대화하는 사람, 혹은 단체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친구들과 어울려 다닐 때, 밥먹을 데를 정하기 힘들어하면 내가 무언가를 던진다. 야 저기 감자탕집 가자. 그러면 반박 의견이 나온다. 무슨소리냐, 저기 맛없는 데다. 가자, 더 좋은데 있다. 거진 이런 패턴이다. 나중에는 그래서 내가 침묵하고 있으면, 나보고 뭐라도 말해보라 한다. 그것을 반박하면서 더 좋은 의견이 나올 것이라고. 그 대화는 사소한 대화였지만, 나는 거기서 뭔가를 느끼게 되었다.

내가 글을 쓰는 것도 똑같다. 나를 꺾어보라고. 나 같은 별 시잘데 없는, 엉터리 같은 놈도 글을 쓸 수 있으니 이 글을 보는 당신들도 글을 써 보라고. 나도 할 수 있는데 당신들이 못 할리 없다고. 나보다 더 나은 글을 써 보라고. 그러면 저절로 문학은 부흥하지 않을까. 문학의 위기는 별 거 없다. 사회에 치이는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감추고 사회에 살기 위해 아등바등하니, 글이라는 녀석이 일상생활에 발 디딜 틈조차 없는 것이다. 글을 써 봐야 기획서, 제안서 같은 상업적인 것이랄지, 대학생의 경우라면 자기소개서랄지, 과제 레포트, 졸업 논문. 더 나아가서 대학원생의 경우라면 학위 논문이랄지. 이런 글 말고 쓰는게 없어지는 것이다. 여기에 딴죽을 걸어보고 싶었다. 당신들, 나 같은 허접한 놈이 이렇게 쓰레기보다도 못한, 함량 미달의 글을 쓰는데 화도 안 나냐고. 써 보라고. 써서 나를 꺾고, 더 나은 글을 만들어 보라고. 내가 글을 쓰는 것은 단순히 이런 이유이다. 정말 별것 없는 이유이다. 그러니 난 오늘도 글을 쓰면서 속으로 외치고 있다. 이겨 보라고. 날 이기고, 더 멋진 글을 보여 달라고. 나정도 이기기는 쉽지 않냐고.


20151007

원당에서

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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