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플용 텍스트
누군가에게 제 글이 이렇다, 하고 보여줄때 샘플로 가장 많이 고르는 글입니다. 이번 브런치북 작가 신청때도 이 글을 첨부해서 신청하기도 했고, 아직까지는 제일 좋아하는 글입니다. 4년전에 썼는데도 말이죠. 보시고 제가 어떤 식으로 글을 쓰는지 이해하시길 바라며 글을 올립니다.
추신1. 저당시에는 필명으로 로목(路木, Romok)을 썼습니다.
추신2. 요새는 담배 끊고 있습니다.
길가에 선 나무
비가 주룩주룩 왔다. 새벽 다섯 시에 비가 후두둑 하는 소리에 깨다가 다시 잤다. 그렇게 두어 시간을 더 잤다가 일어났다. 이렇게 비가 오면 나른해지고, 쉽게 우울해지는 편이라 비를 개인적으로는 싫어하는 편이다. 꿀꿀한 기분에 대충 씻고 밥 먹고 학교로 나섰다. 집에서 걸어서 10분이면 가는 원당역에서 학교로 가는 길은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충무로에서 4호선으로 갈아타서 혜화역으로 가는 방법이 있고, 다른 하나는 안국역에서 내려서 창경궁을 따라 걸어가는 방법이 있다. 대개는 전자의 방법으로 가는데, 오늘은 왠지 변덕이 생겨서 빗속을 걷고 싶다는 마음에 안국역에서 내렸다. 안국역 3번 출구에서 내리면 현대 건물이 바로 보이고 그곳에서 좀만 더 걸어가면 창경궁이 보인다. 창경궁 돌담길은 덕수궁의 그것보다야 덜 예쁘겠지만, 내게는 편안하다. 사람이 잘 다니지도 않고, 옆에 돌담을 보노라면 옛 멋이 살짝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창경궁의 길가를 쭉 돌아가다가 잠시 다리 쉬어갈 겸 근처에 있는 버스 정거장에 주저앉았다. 버스 정거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윗옷의 주머니를 뒤적이다가 이내 담뱃갑과 라이터를 찾았다. 담배를 물고 불을 당긴 뒤, 한 모금 깊게 들이마셨다. 연기를 뱉으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비다운 비가 오질 않고 빗가루가 내리고 있었다. 빗가루라도 비는 비인지라 주위의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았다. 건너편에는 서울대학교 병원이 있었다. 비 때문인지는 몰라도 사람이 별로 많이 오가진 않았다. 그렇게 휘휘 돌아보다가 바로 앞의 나무를 바라보게 되었다. 나무는 인도와 차도 사이에서, 경계석인 마냥 서 있었다. 그리 굵지도 가늘지도 않은 굵기에 가지는 옆으로 뻗어가질 못했다. 아마 차나 사람이 지나갈 때 방해가 될 까봐 사람들이 정리했나보다. 이렇게 가로로 뻗치지 못하면 그늘이 크게 만들어지지도 못할 것 같다.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무는 그저 묵묵히 떨어지는 빗가루로 자신의 가지와 몇 안되는 잎들을 닦고 있었다. 그렇게 빗가루와 나무를 바라보며 아무 말없이 묵묵히 담배를 피우던 나는, 너는 나구나, 하고 툭 내뱉었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말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무안하던 참에 때마침 담배도 다 피우고 해서 말없이 일어섰다. 담배꽁초를 버릴 데가 없어서 바지 뒷주머니에 찔러 넣고는, 학교를 향해 걸어가면서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생각했다.
분명 나무는 누군가가 기댈 정도로 굵지도 않았고, 가지도 넓게 퍼지지 않아서 그늘에 앉아 쉴 수도 없었다. 애시당초 인도와 차도 사이에 있으니 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저 무심하게 지나가는 차들과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다. 아니, 무심하지 않은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지나가는 모든 것들을 쉬게 해주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었던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렇게 그 나무는 사람들을 보내면서, 슬퍼했을까. 자신에게 기대서 쉬게 해 주고 싶었지만, 부족한 자신 때문에 떠나갔기에, 억울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나는 나무에게 감정 대입을 해서, 너는 나구나, 라는 참 부끄러운 소리를 한 것일까. 모르겠어, 하고 머리를 흔들다가 다시 걸음을 옮겨 왔던 길을 되짚어 걸어갔다. 그 나무 앞에 다가가, 말없이 사진 한 장을 찍고는, 다시 갈 길을 갔다.
왠지 모르게 그 나무는 오래오래 살아서 말없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볼 것 같다. 바람 부는 날에는, 나뭇잎을 흔들면서 춤추고, 비가 오면 자신의 몸을 씻어내고, 눈이 오면 눈옷을 입고, 맑은 날에는 어떻게든 그늘을 만들려고 애쓰면서, 그렇게 지낼 것 같다. 왠지 나무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와줄 수도 없는 이런 동정심, 사치일 텐데. 라는 생각과 함께, 나는 아까 찍은 나무의 사진을 다시 바라보았다. 나무는 무표정하게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는 햇볕을 쬐고 싶은 걸까. 왠지 모르게 나무가 쓸쓸해 보여서 울적한 마음에 담배 한 개비를 더 꺼냈다. 불을 댕기면서, 나를 많이 닮은 나무에게 속으로 한 마디 건넸다. 힘내라. 언젠간, 이 비가 그치면, 무지개를 볼 수도 있고, 다시 해가 뜨겠지.
나무가 내 말을 들을 수나 있으려나, 쓴 웃음과 함께 나는 성균관길을 걸어 올라갔다. 머릿속에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나무 한그루가, 심어져 있었다. 왠지 이 나무는, 오래오래 내 머릿속에서 자라서는 두 팔로 안기도 버거울 정도로 커져서는, 누가 와서 기대도 편안한 느낌을 주고, 가지가 쫙 펼쳐져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지칠 때 그늘에 앉아서 쉴 수 있게 해주고, 자신의 몸 속에 수많은 생명을 따스하게 품을 수 있는, 그런 나무가 될 거 같다.
20110520
맑은 날씨가 다가오기를 기다리며 路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