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월간 여선

길가에 선 나무, 다시보기

by 여선

길가에 선 나무, 다시보기

늦었다, 를 외치며 헐레벌떡 중앙도서관으로 뛰어갔다. 중앙도서관에 있는 글쓰기클리닉 상담예약을 했는데 시간 계산을 잘못해서 한 10분정도를 지각했다. 클리닉 상담 예약 잡을 때 어떤 글이냐고 묻는 말에 수필이라고 대답하자 클리닉 조교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게 아직도 기억난다. ‘여기에 오시는 분들이 자기소개서나 과제 글 때문에 찾아오는 건 있지만, 수필이라....드문 케이스네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 말 한마디에 기대감이 둥실둥실 날라갔다. 아 뭐 크게 기대 안 해도 되겠구나. 그래도, 사람 말은 많이 들으면 들을수록 좋으니까. 라는 생각들을 채 정돈하지 못한채 헐레벌떡 도서관 안의 클리닉으로 들어섰다. 상담선생님과 인사하고, 상담 재료글인 5번과 길가에 선 나무를 드리고 안쪽에 마련된 상담 테이블에 잠시 앉아있었다. 몇 번 읽어보시더니 선생님께서 빙긋 웃으시며 테이블에 다가오셨다.

30분 정도 지났을까, 중앙도서관을 나오며 친구에게 전화했다. 같이 점심 먹으러 가자고. 클리닉 어땠냐는 친구의 물음에 음, 오길 잘 했어. 라고 대답했다. 실제로 그러했다. 선생님께서 5번 글을 가지고 몇 마디 해 주신 뒤에 이어서 길가에 선 나무를 가지고 말씀하셨는데, 거기에서 상상도 못했던 말이 튀어나왔다. “학생은 이 나무를 슬픈 시선으로 바라보거나, 슬픈 이미지를 투영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보면 길가에 서 있는 이 나무는 결코 우리 학교 명륜당에 있는 은행나무처럼 클 수 없어요. 그러나 그 나무가 크지 못하다고 해서 의미가 없는 건 아니잖아요. 그 나무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상상도 못했었다. 정말 그러했구나. 4년 동안 단 한 번도 생각 못한, 어찌보면 단순했던 것일지도 모를 사실을 타인에게 가르침 받았다는 것이 부끄럽지는 않았다. 다만, 클리닉에 대해서 시큰둥했던 생각이 단번에 깨져서 다른 이미지로 재조립 되어지는 것을 머릿속에서 느끼면서 신선하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상담을 마친 뒤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고 도서관을 나섰다. 문득 그 당시의 나는 정말 힘들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 때의 내가 이런 모습을 바란 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간에 그 기간을 터널 지나듯이 견뎌왔고, 지금 돌이켜보면 그 때에 비해서 좀 실망스러운 인간상이긴 해도, 나름 괜찮은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정말 감사할 일이다. 그 길로 친구를 만나서 점심을 같이 먹고 서대문역으로 나섰다. 교육과정평가원의 자료실을 들러서 졸업논문 관련된 자료들도 구상해 보고, 역사 교직 과제도 준비하며 책 속을 쏘다니다가 몇 시간 후 가득 교과서를 복사한 출력물을 들고 걸어 나왔다. 올 때는 서대문역 쪽으로 나왔지만 걷다보니 덕수궁을 지나 서울시청 역으로 향했다. 더 학교에 갈 일도 없고, 깔끔히 원당으로 가서 공부하는 게 낫겠다 싶은 판단이었다. 그 유명한 덕수궁 돌담길을 처음 걸으면서, 길가에 심어진 나무들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적으로 4년 전 바라보았던 창경궁 앞에 심어진 나무가 떠올랐다. 그 나무들을 바라보면서 담배를 피우지는 않았고, 너는 나를 닮았구나, 라는 말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나무들은 나무였고, 나는 나였다. 조금 피곤한 감이 있어서 빨리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과 그 곳을 지나는 사람이 많아서 나무 밑에서 느긋하게 담배 피우다간 온갖 사람들이 얼굴 찌푸릴 게 뻔해서 빠르게 걸어서 서울시청역 쪽으로 나왔다. 3호선 지하철로 갈아 탄 뒤에 의자에 털썩 앉아서는 흐르듯 덜컹덜컹하며 움직이는 기차에 몸을 맡기며 집으로 돌아갔다. 정말로, 정말로 내 마음이 모든 것을 결정짓는다는 것을 깨닫는 하루였다. 이렇게 쓰고 보니 사소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직접 눈앞에서 놓쳐보고, 그걸 다시 누군가가 주워줌을 겪은 나로서는, 오늘 다시 본 나무를 잊지 못할 거 같다. 그 나무는 내 마음속에도 자라지 않고, 그 자리 그대로 있을 테고, 그저 상담 좀 받고 조금 더 바쁘게 돌아다닌 하루였지만, 그럼에도 왠지 오늘은 기분좋게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왜 그랬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뭐 그런 하루였다. 조용한, 잔잔한.


20151028

원당에서

여선

매거진의 이전글조각모음, 세 번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