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월간 여선

7번

호에 대한 이야기 - 로목, 오주, 여선에 이르기까지

by 여선

써야지 써야지 해두고 안 써둔 주제였다. 그러나 결국 쓸 글은 쓰는 거였을까. 이렇게 형태를 갖춰서 딱 마주칠 줄이야. 사연은 이렇다. 이전에 사부로 모시던 형이 하나 있었는데, 그 형과 우연히 연락이 닿아 이야기하던 중 ‘너, 내가 지어준 호는 안 쓰는가보네’라는 바늘 같은 말을 꺼내셨다. 물론 형님은 농으로 하셨을 수도 있겠다마는, 그게 그 어떠한 명검보다도 예리하게 다가왔다. 인과응보니 어쩌랴, 속죄하는 겸 해서 그동안의 묵혀온 이야기들을 ‘또’ 꺼낼 때가 되었나 보다.


한창 연애하다가 어긋나서 헤어지고 난 뒤에, 펑펑 울었었던 적이 있었다. 밥 한 그릇 대신 담배 세 까치가 위안을 주던 시절, 그렇게 추하게 말라가던 시절, 그 슬픈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하루에 A4 한 장 정도로, 글도 아닌 글자들을 남겨두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것들을 글이라고 차마 말은 못하겠다. 물론 그 와중에 자신있어하는 ‘길가에 선 나무’ 같은 것들도 나왔지만, 그게 그나마 겨우 낫고, 그 미만의 함량미달의 쓰레기들을 토해내던 시절. 그 시절의 나는 로목(路木)이라는 호를 스스로 지어 썼었다. 인터넷에서 주로 쓰던 별명이나 ID를 Lomok로 지었을 때였다. 그리고 그 당시의 기록들을 로목기(路木記)라고 불렀었다. 이게 내가 자유롭게 글을 쓴 시점이었다.


그러다 앞서 언급했던 사부를 만났다. 그 당시 고통에 힘겨워하면서 사람에 목말랐는데, 그 당시 접했던 것이 페이스북(facebook)이었고, 그곳을 통해서 사부 말고도 여러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 사람들 덕에 내가 조금이나마 추스르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힘을 얻은 것이다. 그러던 중에 사부가 나에게 말씀하시길 “로목 아우, 너 호를 바꿔야 할거 같아.” 라 하시는 거다. 이름과 호에 나무의 기운이 많다고 말씀하신 것 같았다. 네? 하면서도 바뀌길 바라는 마음이 있어서 “그러면 어떤 호가 좋을까요?” 라고 여쭤봤더니 낮 오(午)에 달릴 주(走)를 써서 오주가 좋겠다 하시는 것이었다. 좋아요, 라고 하면서 오즈와 발음이 비슷함을 이용해 오즈(Oz)라는 별명을 인터넷에서도 사용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게 또 흔한 별명인지라 무언가 더 꾸며야 될 필요가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용하게 된 것이 마술사오즈(wizardOZ)였고, 한동안 오주는 내 호로 붙었다.


그러다 또 호를 바꾼 것이 올해 초였다. 겨울방학 때 공부하다가 뛰쳐나가려는 나를 억누르고자 참선하듯이 하나의 화두를 스스로 만들었는데, 지금 이 화두는 발전하여 다음과 같은 글의 모양을 나타내고 있다.

나는 들불이다. / 낮게 가라앉아 넓게 번져나간다. / 나는 내 마음을 태워 정(靜)하게 한다. / 서두르지 말고 넉넉하게 나아간다.


여기서 바로 등장한 것이 여선이다. 넉넉할 여(餘)에 들불 선(烍) 자를 쓰고 있다. 사람들한테 이야기할 때는 불조심하라는 의미라고 우스갯소리로 말한다만, 이 네 마디는 요새 내가 흐트러질 때마다 되뇌이고, 그 이미지를 살려서 내 안을 불로 가득 채우는, 그런 이미지이다. 들불은 빠르게 번지는 것인데 어찌 넉넉하고 여유로울 수 있겠는가. 이런 말이 안 되는 경지를 바라고 있으니 내가 항상 뜬구름 잡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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