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월간 여선

9번

거울 조각

by 여선

1. 욕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어찌 보면 안일한 판단이었을 수도 있었다. 모교는 교생 받아줄 것이다, 라고 말은 했다만 어물쩡하게, 흐지부지하게 "내부 사정으로 미안하게 됐다"라고 넘어갈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렇게 김천의 한 고등학교로 아버지 차를 타고 함께 가면서 참 비참했다. 잘해야겠다는 구름 같은 생각이 뭉게뭉게 들었고, 그 구름이 뿌리는 싸늘한 봄비 같은 어두운 감정들도 모락모락 들었다. 끝없이 되뇌었다. 난 잘할 수 있을까. 욕먹는 짓을 하면 어떡하지.


2. 아마 교생 3주차 때의 일일 것이다. 집에 들렀다가 내려오는 길에 학생들을 만났다. 알고보니 내 부담임 반의 학생들이었다. 수업시간에는 자고 있던 데다가 뒷자리에 앉아서 수업 때나 종례 때 눈길도 잘 주지 못했던 학생들. 그들과 어울려 저녁으로 치킨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그리고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교사가 수업 외로 준비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더 나아가 사범대의 커리큘럼 외에도 준비할 것은 무엇인지. 진지하게 상담 수업을 받아보고 싶다, 는 생각도 들었다. 한때는 카운셀러 라는 별명을 자칭하기도 했고, 주변에서도 이를 수긍하기도 했던 나였지만 이번에는 좀 어려웠다. 마치 군종병 때 상담 해주는 느낌이었다. 다들 원하는 것은 휴가인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던, 그런 어려운 시절.


3. 5월 넘어서 tv쇼 진품명품에 출연한 적이 있었다. 우쭐했었다. 방송 나간 것을 이전부터 알고 있었던 박 군과 강 군에게 어디서 나 방송나갔다고 말하지 말아요, 라고 엄포놓듯이 말하면서 친구들과는 그걸로 웃고 떠들었었다. 나란 놈은 참 이기적이기도 하고, 허영심 많기도 했구나. 단순히 방송 5분 못되게 나간 것이 무슨 자랑이라고, 내 내면을 충실히 하지도 못하면서 무슨 보여주기나 하고 앉았냐고. 올해의 밝은 면을 상징하는 방송 출연 사건을 놓고, 이런 저런 검은 생각들을 많이 하게 되었다.


4. 여름방학 때 아픈 것이 핑계가 되어 이렇게 또 망가지게 되었다. 공부를 성실히 꾸준히 해줘야 하는데도 전혀 그러질 못했다. 쌓이지 않았다. 세월은 파도 같아 하루 쌓은 한 줌 공부를 야금야금 갉아가 끝내는 깨끗하게 만들어주는고만, 나는 그냥 어린 마음만 앞섰을 뿐이다. 이것은 지금도 그렇다. 넉넉하고 꾸준한 마음으로 걸어가야 되는데 한번 살짝 크게 뛰는 제스쳐를 취하고 네 다섯 호흡을 쉬다가 우물쭈물 해버리니. 나란 놈도 참 이런 면에서는 한결 같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여담. 글이 많이 짧아서 죄송합니다. 한 2주 가까이 이 글감을 놓고 고민했는데 저란 사람이 아직 많이 교만해서 제 흠을 아직 직시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시간을 들여서 제 명암을 분명히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겠다는 생각이 많이 드는 아침입니다.


201512228

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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