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해라"로 시작해서 "왜요?"로 끝난 어린 시절
어릴 적 저는 학교에서 문제를 잘 일으키지 않는 학생이었습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개근상을 받았습니다. 물론 수업시간에는 고개를 떨구며 졸기도 했지만, 교복 단정히 입고, 선생님이 시키는 기본 규칙은 웬만하면 다 지켰습니다. 말썽을 피우지도 않았고, 친구들과 크게 싸우는 일도 거의 없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얘는 착하다”라고 불릴 만한 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저는 공부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공부라는 행위 자체보다도 공부하라는 말의 목적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는 일을 억지로 하는 건 저에게는 굉장히 비효율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는 불만이 많았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던 학생이었습니다. “공부해라”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저는 마음속으로 묻곤 했습니다.
왜 공부를 해야 하나요?
공부를 하면 뭐가 달라지나요?
어른들이 말하는 ‘공부 잘하는 애’가 되면, 그다음 단계는 무엇인가요?
이러한 질문 중에 그나마 "왜 공부를 해야 하나요?"라는 질문은 가끔 던졌습니다. 하지만 제가 받는 대답은 대부분 비슷했습니다.
“학생이 해야 할 일은 공부야.”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거야.”
“남들 다 하는데 너만 안 하면 뒤처져.”
어떤 날은 이런 말도 들었습니다. “지금은 몰라도 나중에 알게 돼.”
저는 그 답이 명확하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들은 모두 ‘공부 자체의 의미’를 설명하지 않고, 분위기를 이용해 ‘공부 안 하면 사회적으로 위험해진다’라는 공포만 간접적으로 주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위협받아 움직이는 건 제 방식이 아니었거든요. 명쾌한 답변을 듣지 못하면 오히려 공부가 하기 싫어졌습니다.
저는 ‘규칙은 지키는 편이지만, 납득하지 못한 일은 하지 않는 스타일’이었습니다. 그 두 가지는 같이 갈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반항하지 않으면서도 내적으로는 동의하지 않은 상태로 버티는 것. 저는 그걸 굉장히 오래 했습니다.
“남들도 하니까”는 답이 아닙니다.
공부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항상 따라붙는 문장이 있었습니다.
“남들도 하니까 너도 해야지.”
"좋은 대학 안 갈 거야?"
그 말은 저에게 크게 두 가지 인상을 남겼습니다.
첫째, 어른들도 사실은 공부의 의미를 잘 설명하지 못하시는 거구나. 그냥 본인도 그렇게 하셨으니까, 우리 세대도 똑같이 하라고 하시는 거구나.
둘째, ‘남들도 하니까’라는 말은 편한 말이지만 무책임한 말이구나. 왜냐하면 그 말에는 책임의 주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나중에 제가 제 삶에서 길을 잃어도 “나는 책임 없어. 그리고 너는 남들만큼 안 했잖아.”라고 말할 수 있게 해주는 방패 같은 문장이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그런 말을 조금 의심했습니다.
“남들도 하니까”는 신호등을 건널 때는 좋은 이유일 수 있습니다. 다 같이 건너니까 지금 건너도 안전하겠구나라는 추론이 가능하니까요. 하지만 인생을 설계하는 문제에 “남들도 하니까”를 쓴다는 건, 제 머리로 생각하는 권리를 포기하라는 말처럼 들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질문을 바꿔 보기로 했습니다.
“내가 진짜로 좋아하는 것만 공부하면 안 되나요?”
이 질문에 대해서도 대답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안 돼.”
이유는요?
“내신 망가져.”
“대학 못 가.”
“그러면 인생의 선택지가 없어져.”
그 말을 들으면서 저는 이상한 감각을 경험했습니다. 제가 느낀 건 이런 것이었습니다. ‘아, 공부는 지적으로 탐구하는 활동이라기보다는, 선택지를 유지하기 위한 보험에 가깝게 취급되는구나.’
즉, 공부는 ‘하고 싶은 걸 찾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나중에 뭘 하고 싶어 질지 모르니까 일단 문을 닫지 않기 위해 미리 쌓아둬야 하는 점수 저장’처럼 들렸습니다. 저는 그 설명 방식이 싫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저는 살아있는 사람이지, 보험 상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선택적으로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타협했습니다. 완전한 순종도 아니고, 완전한 거부도 아닌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관심 있는 과목은 끝까지 파고들고, 흥미가 없는 과목은 최소한 정도로만 했습니다. 스스로에게 내린 규칙은 명확했습니다.
납득되는 목표가 있으면 최선을 다한다.
납득이 안 되면 의무만 지킨다.
이 방식은 장점도 있었고, 단점도 있었습니다.
장점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흥미가 있는 분야에서는 정말 빠르게 성장할 수 있다는 걸 저는 직접 경험했습니다. 머리 회전이 빨라졌다, 이런 게 아니라 “아, 내가 집중만 하면 이렇게까지 깊게 이해할 수 있구나”라는 자기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확신은 성적표보다 훨씬 저를 든든하게 해 줬습니다. “나는 못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안 하는 사람일 뿐이다.” 이건 저에게 굉장히 중요한 인식이었습니다. 자기혐오를 막아주는 방패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단점도 컸습니다. 학교의 평가는 ‘균형’을 요구합니다. 전체 평균이 중요합니다. 저는 과목별로 너무 들쑥날쑥했기 때문에 늘 누군가에게 설명해야 했습니다. “왜 여기는 잘하는데 여기는 바닥이야?”라는 질문을 들을 때마다 저는 속으로 “관심 없어서요”라고 답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대답은 어른 세계에서 무례한 답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말 대신 침묵을 택했습니다. 겉으로는 조용한 학생이었지만, 속으로는 늘 계산하는 학생이었습니다.
이걸 어떤 분은 “게으름의 합리화”라고 부르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는 게으름을 부린 게 아니라, 우선순위를 정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때도 이미 ‘해야 하는 일’과 ‘의미 있는 일’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이건 해야 한다"라고 처음 납득했던 순간: 한국사 수업
제가 “아, 이건 해야겠다”라고 마음 깊이 납득한 첫 과목은 한국사였습니다. 첫 한국사 시간에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과거를 공부하는 이유는 단순히 옛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구경하기 위한 게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보다 중요한 건, 과거에 벌어진 사건들이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 반복을 알아차린 사람만이 다음 선택을 조금 더 현명하게 처신할 수 있다는 점이라고 하셨습니다.
요약하면 이 말이었습니다.
“역사는 답안지를 외우는 게 아니라, 살아있는 사례집입니다. 누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만들었는지 실제로 본 사람은 같은 상황이 왔을 때 덜 흔들립니다.”
이 말은 제 안에 굉장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왜냐하면 이건 단순히 “공부해라”가 아니었습니다.
이건 “너 앞으로 살다가 이런 상황 분명히 마주칠 거야. 그때 쓸 수 있는 실제 사례를 지금부터 너한테 미리 준다”라는 약속처럼 들렸습니다. 그 순간 저는 처음으로 ‘공부’라는 것을 제 일상과 연결해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아, 이거는 내가 나중에 살아남는 데 쓸 수 있는 도구구나.
아, 이거는 그냥 시험지용 지식이 아니구나.
아, 이거는 내 미래의 리스크를 줄여주는 매뉴얼이구나.
그래서 저는 한국사를 정말 열심히 파고들었습니다. 단순히 연도와 사건을 외우는 방식이 아니라, “왜 이 인물은 이런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나?”를 따라갔습니다. 그 사람의 사정, 그 시대의 제약, 그때의 분위기, 그때 주어진 정보의 한계까지 같이 상상했습니다.
이걸 따라가다 보면 한 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사람들이 항상 합리적으로 행동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비합리의 결과는 어떤 세대에게는 비극으로, 어떤 세대에게는 기회로 남습니다. 저는 그걸 보고 조금 무서워졌습니다.
“아, 나도 언젠가 어떤 결정을 하겠지. 그 결정이 누군가에게는 비극일 수도 있겠구나.”
그 무서움은 저를 진지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진지함이, 공부를 하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설명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한국사’를 좋아한 게 아니라, ‘이해된 공부’를 좋아했습니다. 이해되면 저는 몰입합니다. 납득되면 저는 책임을 집니다. 하지만 납득하지 않으면 저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수학은 왜 해야 합니까? 지금도 저는 솔직히 완전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반대로 말씀드리고 싶은 과목이 있습니다. 바로 수학입니다.
저는 지금 게임 개발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게임을 만들다 보면 수학은 도구처럼 쓰입니다. 예를 들어, 물리적인 움직임을 시뮬레이션하려면 벡터와 속도, 가속도 같은 개념이 필요합니다. 화면에 캐릭터가 자연스럽게 움직이게 하려면 좌표, 회전, 보간 같은 계산을 합니다. 그 계산은 컴퓨터가 대신하지만, 저는 그 계산이 왜 이런 식으로 돌아가는지는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상하게 움직일 때 어디가 문제인지 추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학은 확실히 씁니다. 지금 제 일에 필요한 수학은 “현상을 수식으로 표현하고 예측하는 언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건 사실입니다.
그런데요. 딱 여기까지는 설명이 됩니다.
“게임 개발에 물리 계산이 필요하니까 수학이 필요하다”
이 문장은 말이 됩니다.
하지만, 제 아들이 “아빠 근데 그러면 내가 왜 중학교 수학을 해야 해요?”라고 물어보면, 저는 한 순간 멈춥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답은 이렇습니다.
세상은 수로도 설명될 수 있어서, 수를 다루는 감각을 잃으면 세상을 읽을 때 불리해진다.
수학을 알면 ‘대충 이건 말이 되네 / 안 되네’를 감으로 판단할 수 있게 된다. 누가 엉터리 숫자로 나를 설득하려 들 때 속지 않을 수 있다.
복잡한 걸 단순한 구조로 바꾸는 훈련은 결국 다른 문제를 해결할 때도 도움이 된다.
이 정도까지는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수학을 하면 논리력이 길러진다”라는 문장은 저는 함부로 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은 너무 많이 소비되었고, 너무 쉽게 던져지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논리력은 수학으로만 기를 수 있는가?”라고 되물으면,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 솔직한 감정은 이렇습니다.
저는 아직도 아이에게 수학의 필요성을 완벽하게 설명하지 못합니다. 중학교 때 받았던 답을 저는 그대로 전달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 필요해, 그냥 해”라는 방식은 저는 이미 불신하고 있습니다. 제가 납득하지 않은 말을 제 아이에게 복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건 부모로서 아직 풀지 못한 숙제입니다. 아이에게 “왜 해야 하는지”를 설명할 수 없는데 “해라”라고 말하는 게 맞는가? 저는 지금도 이 지점에서 멈춰 서게 됩니다.
‘이해 없이 복종하라’는 메시지를 인생 전체에서 거부해 왔습니다.
이제는 학생이 아닌 회사원으로 이야기를 옮겨 보겠습니다. 회사에서 일을 하다 보면 이런 순간이 있습니다.
“이번 분기에는 이 프로젝트 먼저 처리합시다.”
“이번 건은 우선순위가 높으니까 다 붙으세요.”
저는 그 말을 들으면 일단 고개를 끄덕입니다. 팀으로 일하는 사람은 협업에 참여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동시에 저는 예전과 똑같은 질문을 꺼냅니다.
왜 이걸 지금 해야 하나요?
우리가 이걸 하면 어떤 변화를 만들 수 있나요?
이 일의 목적은 숫자인가요, 신뢰인가요, 구조인가요?
어느 쪽이든 답은 나와야 합니다. 답이 나오면 저는 전력으로 움직입니다. 하지만 답이 없으면, 저는 속으로 브레이크를 밟습니다. 이건 회사에서 “까다로운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왜 자꾸 따지냐”, “일단 하면 되지”라는 분위기가 만들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학생이건, 부모이건, 회사원이건, 결국 사람은 자기의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서 무언가를 만듭니다. 그 시간과 에너지는 유한합니다. 저는 그 유한한 자원을 어디에 쓸지 결정할 때, ‘이해’ 없이 쓰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원하는 건 단순합니다. “우리가 왜 이걸 해야 하는지”를 공유해 달라는 것입니다. 공유해 주신다면 저는 책임을 공유합니다. 하지만 공유해 주지 않으신다면, 그건 ‘지시자만의 목표’이고 ‘내 목표’는 아닙니다. 이건 제 고집일 수도 있고, 제 생존 방식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걸 생존 방식 쪽에 가깝다고 보고 있습니다.
공부의 의미를 누가 설명해 주는가.
학창 시절을 돌아보면, 저를 바꿔준 건 ‘열심히 해라’라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저를 바꾼 건 ‘왜 해야 하는지’를 설명해 준 단 한 사람, 단 한 문장이었습니다. 한국사 선생님은 저에게 역사라는 과목을 열어주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아, 공부라는 게 나와 무관한 숙제가 아니구나”라고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 일의 의도는 이거고, 이걸 해내면 우리는 이 구조를 바꿀 수 있어요”라고 말해주는 리더가 있으면 저는 진심으로 존중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제 노동을 숫자가 아니라 의지와 맥락 속에서 인식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도 믿습니다. 사람은 ‘무조건 해’라고 해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사람은 ‘이걸 하면 당신이 이런 사람이 됩니다’라고 말해줄 때 움직입니다. 공부도, 일도, 심지어 관계도 저는 그렇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도 “공부해야 하나요?”라고 묻습니다.
이제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저는 규칙을 잘 지키는 학생이었습니다. 하지만 규칙 준수와 공부 의욕은 별개였습니다.
저는 “왜?”라는 질문에 답이 돌아오지 않을 때 거부감을 느꼈습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공부에 멀어졌습니다. 저는 관심 있는 영역에 대해서는 깊게 파고들었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얻었습니다.
저는 한국사에서 처음으로 ‘공부의 의미’를 들었습니다. “과거의 선택을 안다는 것은, 나의 미래 선택을 지키는 일이다.” 저는 이 말에는 지금도 고개를 끄덕입니다.
수학에 대해서는 아직도 완벽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제 아이에게도 완전히 자신 있게 강요하지 못합니다. 이건 저의 솔직한 현재 위치입니다.
성인이 된 지금도 저는 똑같은 질문을 합니다. “왜 해야 합니까?” 납득하면 전력으로 움직이고, 납득하지 못하면 한 발 물러섭니다. 이건 게으름이 아니라 기준입니다.
그리고 이 기준은 앞으로도 쉽게 바뀌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왜 꺼내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흔히 “공부는 원래 하기 싫은 거야”라고 말합니다. 저는 그 말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생각합니다. 하기 싫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하기 싫은 이유 중 절반은 ‘이해가 안 돼서’라고 생각합니다. 목적을 모르는 활동은 사람을 지치게 합니다. 내가 왜 이걸 하고 있는지 모르면, 남는 감정은 피로뿐입니다.
제가 바라는 건 거창하지 않습니다. 아이에게도, 후배에게도, 동료에게도, 그리고 사실은 제 자신에게도.
공부(혹은 일)를 시작하기 전에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배우려고 하는가.
그걸 배우면 우리의 시야는 어디까지 넓어지는가.
그 넓어진 시야는 누구를 지킬 수 있는가.
이 세 가지 질문에 답할 수 있다면, 저는 기꺼이 책을 펼칠 수 있습니다. 그게 역사든, 수학이든, 새로운 언어든, 회사의 새로운 프로젝트든 상관이 없습니다.
저는 여전히 묻습니다.
“공부해야 하나요?”
그리고 저는 여전히 답을 기다립니다.
“왜요?”
그 답을 찾는 과정이, 아마도 제가 살아온 이야기 전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WHY #공부해야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