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학교"의 다른 의미
제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지역에서 제법 이름을 날리던 학교였습니다. 입시 실적도 괜찮았고, 선배들 중에는 명문대에 진학한 사람도 꽤 있어서인지 "다른 건 몰라도 명문대 진학률은 높은 학교"라는 이미지가 있었죠. 어른들이 말하길, 거긴 분위기가 엄하다, 관리를 잘한다, 공부에 집중하게 해 준다, 그래도 그 고등학교에 가면 사람 만들어준다... 이런 식이었습니다.
그 "사람 만들어준다"라는 말의 진짜 의미를 그때는 몰랐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말은 "말을 듣지 않으면 때려서라도 하게 만든다"에 가까웠습니다.
90년대의 학교는 지금과 많이 달랐습니다. 물리적인 체벌이 일상처럼 허용되던 시대였죠. 교사가 학생을 때리는 장면은 비밀도 아니었고, 은밀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일상의 구성 요소 중 하나였습니다. 마치 복도에 소화전이 있는 것처럼 수업에 들어오는 교사들은 야구방망이, 각목, 회초리를 아무렇지 않게 출석부와 함께 들고 다녔습니다.
그것을 "훈육의 수단"이라고 불렀습니다. 말이 참 좋죠. "훈육"
하지만 제가 직접 맞거나 다른 친구들이 맞는 장면을 보면 훈육이라기보다는 감정 배출에 가까울 때도 종종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학생을 체벌하는 이유를 가만히 보면, 정말로 학생이 객관적으로 큰 잘못을 했다기보다는 "기분 나쁘게 굴었다", "수업 시간에 졸다니.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같은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수업 시간에 잠깐 졸았다는 이유로, 모든 학생을 책상 위에서 무릎 꿇고 오래도록 벌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저는 이상하게 한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이런 상황은 졸음 때문에 벌어지는 게 아니라, 선생님이 오늘 뭔가 쌓인 걸 풀고 있는 건 아닌가?'
그때는 학생이 교사를 의심한다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교사를 불신하는 눈빛만 가져도 "너는 태도가 왜 그러냐"라는 말을 들었으니까요. 그러면 그다음은 뻔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묻지 않았습니다. "선생님, 저에게 화가 난 게 아닌 거죠?", "지금 이건 교육이 아니라 감정 표출 아닌가요?" 이런 질문을 하는 학생은 존재할 수가 없었습니다. 존재하지 않게 만들어졌다고 말하는 편이 맞겠네요.
우리 학교에는 학생회가 없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에는 굉장히 의아한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학생회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제가 알던 "학생회"라는 것은 최소한의 상징이었습니다. 학생들이 스스로 학교의 일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통로, 행사나 의견이나 요구 같은 것을 모아서 전달하는 소통 창구. "우리가 여기에 있다"라는 걸 증명하는 작은 시스템입니다.
그런데 제가 다닌 학교에는 "학생회"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창립 이후로 계속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학급 대표"라는 직함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선생님들이 보기 좋은 학생"에게 내려오는 일종의 역할이었지, 학생을 대표한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 친구는 말하자면 '전달자'에 가까웠습니다. 위에서 내려온 지시를 아래로 알리는 사람. 그러니까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단방향의 파이프였습니다.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파이프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구조를 보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우리는 의견을 낼 권리가 없을까? 왜 우리는 우리 학교의 하루를 우리가 결정하지 못할까? 학생은 단순히 학교에서 시키는 공부만 하면 끝이란 말인가?
이건 단순히 행사 개최권의 문제를 넘어서서, 존재감에 관련된 질문이었습니다. '나는 여기에서 존재하는가? 아니면 그냥 관리 대상인가?' 그 질문은 생각보다 무겁습니다. 고등학생에게는 더욱 무겁습니다.
어른들은 고등학생을 "철없는 애들"이라고 쉽게 말하기도 하지만, 고등학생은 본인이 존중받고 있는지 아닌지를 정확하게 감지합니다.
존중이 0인 곳에선 발언도 0이 됩니다.
발언이 0인 곳에선 책임도 0이 됩니다.
책임이 0인 곳에서는 결국 관심도 0이 됩니다.
그리고 그게 바로 제가 다니던 학교가 원했던 상태처럼 보였습니다. 조용하고, 말 잘 듣고, 상부의 지시만 잘 따르면서 명문대를 비롯한 상위권 대학에 진학하는 구조. 그러면 학부모는 아무런 불만 없이 아이를 학교에 보냈습니다.
동아리도 축제도 없는 학교
주변 다른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그 친구들의 일상에는 '학교'말고도 '학교 생활'이 있었습니다. 동아리 활동, 가을 축제 준비, 밴드부 공연, 전시회 같은 것들 말입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낯설었습니다. 저희 학교에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활동이니까요.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에서는 자율 동아리나 창작 활동 같은 것은 사실상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공부 외의 에너지 사용"을 학교가 경계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축제 분위기나 학생 주도 행사가 만들어내는 '학생들끼리의 결속'도 불편해하는 듯싶었습니다. 결국 학교는 이런 메시지를 던지고 있었습니다.
"너희는 지금 공부만 하면 된다."
"나머지는 전부 방해 요소다."
"좋은 대학을 가고 나서 해도 늦지 않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싶은 게 있습니다. "공부만 해라", "명문대 진학으로 우리는 보답하겠다."라는 말은 얼핏 듣기에는 다른 생각하지 말고 집중하라는 조언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말 안에 다른 뜻도 숨어 있습니다.
"너희 개인은 지금은 중요하지 않다."
"개성, 취향, 목소리, 관계, 다 대학에 가서 해라."
"지금은 일단 조용히 따라와라."
즉, 학교는 공부를 강조하는 척하면서 실은 통제 가능성을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그 구조 안에서는 '다른 것에 눈 돌리지 않기'가 미덕이 됩니다. 그리고 '의문을 제기하지 않기'가 성숙이 됩니다.
말 잘 듣는 게 성숙이고, 질문하는 건 버릇없음이었습니다. 이건 민주주의의 언어가 아닙니다. 그건 복종의 언어였습니다.
밤 10시까지의 "자율 학습"
학교에는 "자율학습"이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자율입니다. 말 그대로 자발적으로 남아서 공부한다는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제 현실은 '자율'이 아니라 '의무처럼 운영되는 자율'이었습니다.
정규 수업이 끝나도 집에 가는 학생은 많이 않았습니다. 대부분은 교실에 남아 책상에 앉아 있었습니다. 시간은 길게 늘어졌습니다. 해가 지고, 저녁이 지나고, 밤 10시 가까이 될 때까지 교실은 여전히 환했습니다. 그리고 그 환한 교실 안에는 공부하는 학생들, 졸면서 버티는 학생들, 문제집을 기본자세처럼 들고 있는 학생들이 줄지어 있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 풍경이 '선택 중 하나'가 아니라 '기본값'이었다는 점입니다. 교사는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자율이야.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하지만 그 말의 마지막에는 항상 이런 공기가 따라붙었습니다. "그 대신 너는 포기한 애라는 눈으로 우리가 본다."
자율이라는 단어는 그날 이후로 저에게 약간 씁쓸한 단어가 되었습니다. 자유의 모양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선택지는 하나뿐인 구조. 즉, 선택 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선택이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이건 나중에 회사에 가서도 자주 보게 되었습니다. "이건 의무가 아닙니다"라고 말하면서 하지 않으면 불이익이 뒤따르는 일들. 저는 그것을 이미 고등학교에서 보고 있었습니다.
밤 10시까지 학생을 관리하는 학교를 어른들이 보기에는 "참 열심히 가르친다"라고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학생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감시 아래에서 자기 시간을 국가시험 시스템에 바치는 훈련"에 가까웠습니다. 그 훈련은 한 가지 능력을 길러줍니다.
"나를 미루는 법"
그리고 동시에 한 가지 감각을 마비시킵니다. "나는 뭘 좋아하지?"라는 질문을 덜 하게 됩니다. 그저 시키는 그대로 하면 되는 수동적인 인간으로 굳어버립니다. 저는 지금도 이 부분이 상당히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어른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에 자기 욕구를 스스로 점검할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타인이 대신 정해준 일정 속에서 타인이 정해준 기준을 지키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쓴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이것입니다. "나는 시키면 할 줄은 아는데, 내가 하고 싶은 걸 말하라고 하면 답이 잘 나오지 않는다." 저는 그 상태 자체가 교육 시스템의 산물이라고 생각합니다.
학교는 민주주의의 반대편에 있었습니다.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학교에서 배웠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교과서에 나옵니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국민은 대표자를 뽑고, 그 대표자는 국민의 뜻을 반영해야 한다. 이런 이야기들 말입니다. 하지만 제가 경험했던 학교의 현실은 그 문장과 정반대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대표를 뽑지 못했습니다. 학교가 정했습니다.
우리는 의사를 모아 전달할 통로가 없었습니다. 만들어지지도 못했습니다.
우리는 규칙 제정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 규칙은 공지로 내려왔습니다.
규칙을 어기면 토론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냥 처벌로 끝났습니다.
심지어 처벌 과정에서 감정이 개입되어도, 그 감정을 문제 삼을 제도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조건을 나열해 보면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제가 다녔던 학교는 민주주의를 가르칠 수 없는 구조였습니다. 왜냐하면 학교 자체가 민주적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는 정보가 공유되고, 절차가 예측 가능하고, 서로에게 질문할 수 있어야 굴러갑니다. 그런데 질문이 금지되고, 절차가 교사 재량에 달려 있고, 우리가 무엇을 왜 하는지 설명받지 못하는 곳이라면, 그것은 민주주의의 반대쪽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공부를 잘해서 상위권 대학에 진학하면 된다"라는 말은 단순한 교육 방침이 아니라 일종의 통치 방식처럼 작동합니다. 그리고 상위권 대학에 진학한 학생의 수는 모든 감정이 섞인 체벌에 면죄부를 줍니다.
체벌이 심해도 공부만 잘 가르쳐서 상위권 대학에 진학하면 그만이라고 믿기 시작하는 순간, 학생은 체제가 불공정해도 문제 삼지 않게 됩니다. 체벌이 부당해도 참습니다. 토론 구조가 없어도 그냥 받아들입니다. 대신 이렇게 스스로를 설득하게 됩니다.
"성적만 잘 나오면 나중에 떳떳하게 살 수 있어."
즉, 개인 생존 논리로 전체 구조의 문제를 덮어버리는 겁니다. 이건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길들여지면, 나중에 사회에 나가서도 똑같은 논리를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조직이 조금 이상해도, 여기서 성과만 내면 혼자는 잘 살 수 있어." 이건 민주주의의 문장이 아니라 생존주의의 문장입니다.
"민주주의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가 사회에 나가면 생기는 일
고등학교 시절을 지나 성인이 되었을 때, 저는 한 가지를 자주 목격했습니다.
회의 자리에서 말하지 않는 사람들.
부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공식적으로 문제 제기하지 않는 사람들.
"아.. 그냥 좀 조용히 넘어가면 안 될까요."가 입에 붙어 있는 사람들.
자신이 부당한 걸 당해도 기록을 남기지 않는 사람들.
그걸 저는 예전에는 그냥 '성격 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민한 사람들만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이런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아, 이건 성격 문제가 아니구나. 훈련의 결과구나.'
민주주의는 투표만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민주주의는 "내가 질문할 권리가 있다"라고 믿는 마음에서 시작합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3년 동안 질문하지 않고, 이의제기는 버릇없음이 되고, 단체행동은 금지되고, 대표를 뽑을 기회마저 박탈당한 채로 위에서 아래로만 명령을 내리는 구조를 겪은 학생이 사회로 나오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요.
그 학생은 이제 회사원이 되고, 부모가 되고, 어떤 자리에서는 관리자가 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민주주의를 '경험'해 본 적이 없습니다. 민주주의를 '암기'는 했지만, 실제로 '살아본' 경험은 없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합니다. 그런 사람은 나중에 누군가 자신에게 질문을 할 때, 그걸 위협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질문이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는 것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폭력이 대물림됩니다. 꼭 때리는 행동만 폭력이 아닙니다.
"입 다물어라"라는 말도 폭력입니다.
"우리 방식이 맞으니까 그냥 따라와"라는 말도 폭력입니다.
"너는 시키는 것만 해"라는 말도 폭력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배웠나
그 시절을 돌이켜 보며 가끔 이런 질문을 합니다. 그럼 그 학교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대학을 가는 방법? 문제 풀이 방식? 효율적인 암기 요령? 어느 정도는 맞습니다. 하지만 제가 진짜로 배운 건 다른 종류의 지식이었습니다.
힘의 방향은 항상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위에 있는 사람의 감정은 규칙보다 우선한다.
나의 하루는 나의 것이 아니라 위에서 설계된 스케줄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조심해야 하고, 너무 솔직하면 위험하다.
살아남으려면 조용히 있어야 한다.
이러한 다섯 가지는 아이에게 가르치고 싶은 삶의 규칙이 아닙니다. 그런데 저는 학교에서 암암리에 배웠습니다. 민주주의를 가르친다고 했던 교육 제도 안에서 저는 오히려 "조용한 복종의 기술"을 배웠습니다. 아이에게 절대로 물려주고 싶지 않은 유산입니다.
지금의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지금의 저는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학교는 단순히 지식을 가르치는 곳이 아닙니다. 학교는 "사회를 미리 경험하게 하는 곳"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학교는 작은 사회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사회는 공정했는가.
절차는 투명했는가.
목소리는 들렸는가.
책임은 위아래로 나뉘었는가, 아니면 아래쪽만 책임졌는가.
서로에게 질문할 자유가 있었는가.
우리는 민주주의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습니다. 민주주의를 배운 경험이 없는데 사회에 나가서 "민주적으로 일하라"라고 요구받았습니다. 그건 마치 수영장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사람을 물에 던져놓고 "수영은 기본 소양이지. 왜 못 해?"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저는 중년이 된 지금도 배워가는 중입니다. 질문해도 되는 자리에서 질문하는 법, 부당함을 말할 때 흥분만 하지 않고 구조를 짚는 법, 내가 맞다고 믿는 걸 주장하면서도 타인의 맥락을 주의 깊게 경청하는 법. 그건 교과서가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학교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학교가 막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저는 이렇게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학교에서 민주주의를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저는 뒤늦게라도 배우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우리는 모두 소중하다"라는 선언이 아니라, "너도 나에게 질문할 수 있고, 나도 너에게 질문할 수 있다"라는 약속입니다. 그 약속이 없던 공간에서 자랐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부터가 저에게는 이제야 시작된 공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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