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모르는 순간에 마음은 방향을 정한다.
방 안에서 지내던 그 한 달은 길게 보면 멈춤이었지만, 안쪽에서는 아주 느린 재부팅 과정이었습니다. 눈을 뜨고, 밥을 먹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서 컴퓨터를 켜고,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 접속하고, 사람들과 던전을 돌고, 사냥하고, 장비를 맞추고, 가끔은 그날의 억울한 감정을 채팅에 흘리기도 하고. 그건 겉으로 보면 '현실 도피'라는 한마디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한 가지 중요한 기능이 있었습니다. 저는 거기서 무너진 자존감을 조금씩 다시 세우고 있었습니다. 현실에서는 '너 필요 없다.'라는 말만 들었는데, 게임 안에서는 '같이 하자.'라는 말을 듣고 있었으니까요.
그 반복 속에서 제 마음이 아주 조금씩 숨을 돌렸고, 긴장이 풀렸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이었습니다. 정확히 어느 날이라고 날짜로 찍을 순 없지만, 분명히 기억나는 그 순간이 있습니다. 던전 끝나고 혼자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올라왔습니다.
“이렇게 끝낼 거야?”
포기가 편할 수도 있다
그 질문은 의외로 조용하게 찾아왔습니다. 드라마처럼 번쩍하고 뜬 게 아니고, 극적으로 울컥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이제 그만할래?'라는 자문이었습니다. 스스로에게 던져보고 싶은 말이었습니다.
“게임 업계는 이제 그만 가도 되지 않겠어?”
“두 번이나 잘렸잖아.”
“운도 없고, 환경도 나쁘고, 사람도 믿을 수 없는데... 여기서 계속 버티겠다고 하는 건 그냥 고집 아닌가?”
그 질문은 조금 무서웠습니다. 왜냐하면 그 질문에는 한 가지 매우 달콤한 선택지가 숨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냥 포기하자.”
포기는 이상하게도 달콤합니다.
책임이 사라지거든요.
다시 도전할 필요도 없고, 떨어질까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면접 자리에서 내 지난 6개월을 설명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만둬버린 사람'이 되면, 더 이상 상처받을 일이 줄어듭니다.
저는 그 유혹을 꽤 오래 바라봤습니다. 정말로 포기할까를 고민했습니다. '그래, 그냥 다른 일 해도 되잖아. 내 인생은 아직 길잖아.'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 문장이었습니다.
“다른 일은… 뭔데?”
‘다른 일’을 상상해보려 했지만 저는 프로그래머입니다. 적어도 그때 저는 제 자신을 그렇게 정의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개발자다.”
UI로 시작했건, 야근으로 버텼건, 병원에 실려 갔건, 저는 제 자신을 개발자로 부르고 싶었습니다. 프로그래머라면 갈 수 있는 길은 많습니다.
그건 사실입니다. 보안 쪽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사내 툴 개발 쪽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업무 자동화 솔루션, 관리시스템, 백오피스 도구 같은 걸 만드는 쪽으로도 갈 수 있습니다. 웹서비스도 있고, B2B 솔루션도 있고, 애플리케이션 쪽도 있고. 길만 놓고 보면 세상은 넓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길 어디에도 제 마음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한 가지씩 상상해 봤습니다.
“내가 회사 내부용 관리툴을 만들면서 하루를 보내는 모습은 어떤가?”
“내가 보안 장비 설정하고 로그 모니터링하면서 새벽 알람을 받으면 어떤 기분일까?”
“내가 사내 ERP 시스템 유지보수하면서 오는 민원 처리하고 버그 고치면서 하루를 보내면 행복할까?”
하나하나 그려봤는데, 마음이 전혀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색이 없는 화면 같았습니다. 소리가 없는 TV 같았습니다. 반면 게임을 떠올릴 때는 달랐습니다.
레이싱 게임의 UI를 붙잡고, 화면의 흐름을 어떻게 잡을지 고민하던 시간들. 버튼 하나 눌렀을 때 서버와 통신이 어떻게 갔다 오고, 그 결과가 다시 레이아웃에 박히는지 보던 그 순간들. 내가 만든 화면 위에서 실제로 누군가 웃고 경쟁하고, 아이템 던지고 승부 내고 “야, 방금 봤냐!” 하고 소리치던 장면들.
그건 여전히 제 안에 불을 켰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저는 다른 업계에서 일하는 나를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게임을 만드는 나를 떠올리자 마음속에서 여전히 ‘하고 싶다’라는 반응이 튀어나왔습니다. 그 차이는 결정적이었습니다.
나한테는 게임 개발이 맞아.
그날 저는 조용히 하나를 인정했습니다. '나에게 맞는 일은 게임 개발이다.' 이건 '게임 말고는 난 아무것도 못 해'라는 투항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반대였습니다. '이건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이다.'라는 고백이었습니다. 회사 두 곳에서 잘리고, 연말을 방 안에서 보내고, 한 달 내내 사람을 피하고, 그 과정에서 자존감은 바닥에 닿을 만큼 닳아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게임 개발자’라는 말만큼은 여전히 버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게 제 안에서 다시 일어서는 첫 연료였습니다. 다른 사람의 칭찬도 아니고, 시장 상황도 아니고, 안정성도 아니고, 월급도 아니었습니다. 그건 그냥 제 안에서 나온 문장이었습니다.
“그래도 나는 이걸 하고 싶다.”
마음이 정해지면, 행동은 따라오는 법입니다. 확신이 생기니까, 그다음 행동은 생각보다 빨랐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훅 하고 몸이 움직였습니다. 책상을 정리했습니다. 이력서를 열었습니다. 문서를 새로 만들었습니다.
이게 재미있는 부분인데요. 한 달 동안 저는 거의 아무것도 못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방에서 나가는 것도 힘들고, 누굴 만나는 것도 싫고, 연락도 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방향이 정해지니까, 마치 고장 났던 모터에 다시 전원이 연결되듯이 움직임이 돌아왔습니다.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은 이거다.' 목표가 생기자,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건 정신력이 대단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사람은 목표가 없을 때는 한 걸음도 못 나가지만, 목표가 한 줄만 잡히면 자기 스스로를 다시 기동 하기도 합니다.
저는 확신을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확신은 에너지를 만들어줍니다. 의지는 에너지의 결과물일 뿐입니다. 저는 그날 그걸 몸으로 이해했습니다.
이력서를 다시 쓰다
그다음으로 한 일은 기록이었습니다. 저는 이력서를 완전히 새로 작성했습니다. 그동안의 일을 되짚어 써보기 시작했습니다. '고작 5개월 했는데, 뭘 써?'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막상 적기 시작하면 쓸 건 생각보다 많았습니다.
클라이언트 UI 전담으로 맡았던 화면들
CBT(클로즈 베타 테스트) 단계에서의 대응 경험
유저 피드백 반영 과정
UI 전면 리뉴얼 일정 관리
팀 내 디자이너와 협업하며 일정과 우선순위를 조율했던 경험
서버와 연동되는 인터랙션 처리 경험
실제 론칭(OBT 직전) 수준까지 다듬어 본 구조들
야근으로 지탱한 게 아니라, 실제로 구조를 이해하려 했고 직접 개선 방향을 제안했던 기록들
그걸 다 적어 내려가는 동안, 저는 제 자신에게서 한 가지를 다시 발견했습니다. '나는 그냥 들러리로 있던 게 아니었구나.' 회사에서 “신입”은 쉽게 들러리처럼 보입니다. '그냥 이것도 좀 해보고, 저쪽도 좀 도와보고.' 존재감 없이 굴러다닌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기록을 해보면 달라집니다.
‘아, 이건 내가 직접 맡았던 거구나.’
‘이 부분은 사실상 나 없으면 안 돌아갔겠네.’
‘아, 이건 진짜로 내가 해결했던 거였네.’
쓰다 보면 스스로를 재발견하게 됩니다. 그건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건 단순히 취업 준비 단계가 아니었습니다. 이건 제 자신을 복구하는 단계였습니다.
'나는 무가치하지 않다.'라는 말은 누가 밖에서 주는 게 아닙니다. 가끔은 내가 내 손으로 적어야 겨우 믿게 됩니다. 그게 저는 이력서 쓰는 과정에서 처음 가능해졌습니다.
경력기술서라는, 나만의 작은 역사
이력서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저는 따로 경력기술서를 만들었습니다. '내가 무슨 일을 했는가'를 항목별로 정리하는 문서였습니다. 거기에는 이런 식의 문장이 들어갔습니다.
“UI 전면 개편을 혼자 맡아, CBT 피드백을 반영한 구조를 다시 설계하고 구현함”
“디자이너와 협의하여 화면 흐름(첫 진입, 방 생성, 매칭 대기, 레이스 결과 등)을 사용자에게 더 자연스러운 순서로 교체함”
“서버/클라 동기 문제로 인한 크래시 케이스를 파악하고 대응 절차 수립에 참여함”
“테스트 기간 중 긴급 수정 사항을 밤새 반영하고, 다음 빌드에 반영된 결과를 확인 및 조치함”
이건 누가 인정 안 해줘도 괜찮았습니다. 제가 그걸 썼다는 사실 자체가 저한테는 의미였습니다. 이건 제 인생 첫 '내가 해냈다.'라는 증거였습니다. 졸업장도 아니고, 상장도 아니고, 자격증도 아니고. 그냥 내가 살아온 현장의 기록. 그걸 문장으로 만드는 순간, 저는 이상하게도 다시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습니다.
“나는 그냥 잘린 사람이 아니라, 여기까지 온 사람이다.”
이게 제 마음속에서 아주 천천히 자리 잡았습니다.
다시 바깥으로 손을 내밀다
문서를 정리하고 나서 저는 구인 사이트를 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게임 업계 채용 공고를 모아두는 곳들, 특히 게임 개발자들을 위해 따로 운영되는 채용 게시판들. 일명 '게임잡' 같은 곳들을 다시 보기 시작했습니다.
마우스를 움직이면서 제가 느낀 감정은 ‘자신감’은 아니었습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조건부 시도’였습니다. 저는 제 마음에 이렇게 선을 그어놨습니다.
“2주만 해보자.”
2주 동안 연락이 오면 계속 도전하자. 2주 동안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으면, 그때부터는 방향을 바꿔보자. 다른 업종도 알아보자. 이건 저에게 아주 중요한 장치였습니다.
왜냐하면 완전한 배수진은 너무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죽기 살기로 다시 가겠습니다!!!'라고 선언하면
그 선언이 실패했을 때 무너지는 충격이 너무 큽니다.
저는 솔직해지기로 했습니다.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된 것도 아니고, 정신도 멀쩡한 것도 아니고, 자존감은 여전히 낮았습니다. 그런 제가 반드시 필요한 건 ‘희망’이 아니라 ‘안전장치’였습니다.
2주라는 시간제한은 저에게 안전장치였습니다. '너, 실패해도 괜찮아. 그럼 그냥 다음 선택을 하자. 인생은 끝나지 않았다.' 저는 그 말을 스스로에게 쿨하게 허락하고 싶었습니다.
면접 제의 연락이 왔다
놀랍게도, 연락이 왔습니다.
“면접 보실 수 있나요?”
“경력이 짧으신 건 알고 있습니다만, 프로젝트 참여 경험이 있다고 하셔서요.”
“한 번 얘기 들어보고 싶습니다.”
거짓말처럼 면접 제의가 몇 군데에서 왔습니다. 저는 솔직히 떨렸습니다. ‘나 같은 이력으로도 불러준다고?’
‘정말로 날 필요로 하는 곳이 있어?’ ‘이건 장난 아니지?’ 그 면접 자리에서 저는 그동안 들었던 질문과 정반대의 질문을 처음 들었습니다.
“당신은 왜 게임을 만들고 싶습니까?”
이 질문은 칼이 아닙니다.
이 질문은 문입니다.
저는 거기에서 그동안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어떻게 처음 코딩을 붙잡게 됐는지 UI를 맡아 어떤 걸 해봤는지 베타 단계에서 어떤 걸 겪었는지 서버랑 맞물려 돌아가는 화면을 만드는 게 왜 매력적이었는지 버그 때문에 유저가 욕을 할 때도, 결국 고치고 나면 다시 접속해서 게임을 해주는 걸 봤을 때 어떤 이상한 보람이 생겼는지 '내가 만든 화면 위에서 사람들이 웃더라'라는 감정이 인생에서 얼마나 강하게 남았는지 그걸 말하는 동안 저는 숨이 막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조금 편안했습니다. 이건 거짓말이 아니었으니까요. 이건 꾸며낸 답이 아니라, 진짜 제 이야기였으니까요.
그 순간, 선택
그리고 결국, 한 회사에서 먼저 연락을 주었습니다.
“저희랑 함께 하시죠.”
그 순간은 어떤 화려한 축하도 없었습니다. 폭죽도 없었고, 드라마 같은 눈물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제 안에서는 아주 조용하게 이런 소리가 났습니다.
“살아났다.”
그 한마디였습니다. 살아났다. 다시 바깥으로 나갈 수 있다. 다시 ‘나는 개발자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출근합니다’라고 말하고 집을 나설 수 있다. 그건 월급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건 재취업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건 존재의 복귀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조언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좀 더 알아보고, 더 좋은 회사도 찾아보고, 협상도 하고, 좀 더 기다려도 되지 않았을까?' 맞는 말입니다.
충분히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때의 저는 계산보다 회복이 더 시급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오래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제안을 준 회사에 입사 날짜를 맞췄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단 다시 선다. 거기서부터 다시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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