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내가 누군지도 모른채 중년되었습니다.

by 곽준원

나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의심해 본 것은, 아이를 키우던 어느 평범한 저녁이었습니다. 퇴근해서 밥을 먹고, 아이는 옆방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저는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시간. 별생각 없이 페이스북을 내리다가 자동 재생된 한 영상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인생선배의 개념 주례사’라는 제목이었습니다. 가볍게 보다가, 이상하게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돌아가며 자기 꿈을 말하는데, 정작 그 꿈이 자신에게 왜 중요한지, 무엇을 원하는지 설명하지 못하고 맴도는 모습이 낯설지 않았습니다.


영상 속 사람들이 하는 말이, 마치 제가 몇 년 동안 입안에서 뱅뱅 맴돌게만 했던 변명과 비슷하게 들렸기 때문입니다. 말만 번듯한 축사 같은, 허공을 떠다니는 말들이 아니라, 결혼하는 부부에게 서로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존중하고 인정하며, 완벽한 조력자가 되어 함께 성장하라는 의미를 담은 주례사입니다.


핵심 내용은 상대방을 바꾸려 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서로의 꿈을 돕는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주는 것이 행복의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영상에 나온 분이 누구인지 검색해 봤습니다. 여러 영상이 팟캐스트에 있더군요. 여러 영상을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한 영상 말미에서 이런 문장이 나왔습니다.


“독서와 글쓰기가 삶을 달라지게 합니다.”


사실 그런 말은 여기저기서 많이 들어봤습니다. '책을 읽어라', '쓰면서 정리해라', '기록이 곧 자산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날따라 그 문장이 꽂혔습니다. 그래서 정말 충동적으로, 영상에서 언급된 책 몇 권을 바로 주문했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습니다. 책은 도착했습니다. 택배 상자를 뜯어 거실 테이블에 올려두고, 표지를 한 번 쓰다듬고, 냄새를 맡고, 그러고는 그대로 덮었습니다. “주말에 천천히 읽어봐야지.” 머릿속으로는 그렇게 다짐하면서요.


하지만 주말은 늘 힘겨웠습니다. 아이와 충분히 놀아줘야 했고, 피곤해서 눕기만 하면, 손은 책이 아닌 휴대폰을 찾았습니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일주일이 가고, 한 달이 지났습니다. 책은 점점 집 안의 풍경이 되어 갔습니다. 눈에 익으니까, 오히려 더 안 보였습니다.


“나는 원래 책 읽는 인간이 아니지”라는 말이, 마치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던 사실처럼 자연스럽게 떠올랐습니다. 그렇게 세 달쯤 흘렀습니다.


책은 여전히 거의 새 책이었지만, 이상하게 독서 관련 팟캐스트는 꾸준히 듣고 있었습니다. 출퇴근길에, 설거지를 하면서, 잠들기 전까지도 귀에는 이어폰이 꽂혀 있었습니다. 어떤 방송은 심리학 이야기를 하고, 어떤 방송은 인문학을 이야기했습니다.


하나의 방송은 다른 방송으로 이어졌고, 가끔은 유튜브 영상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알고리즘이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영상을 하나 추천해 주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의 영상이었습니다. 별생각 없이 눌렀다가, 그 영상은 제게 꽤 오래 남는 질문 하나를 던져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떠오르는 대답은 몇 개 있었습니다.

“저는 개발자입니다.”

“저는 아빠입니다.”

“저는 ○○회사에 다니는 ○○입니다.”


그런데 그게 전부였습니다. XX라는 이름, 개발자라는 직업, 아빠라는 역할, 회사라는 소속을 빼고 나면, ‘나’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이 거의 남지 않았습니다.


“좋아하는 게 뭐냐”라고 물으면 “게임이요, 코드 짜는 거요” 정도만 겨우 말할 수 있었고, “그럼 왜 그걸 좋아하냐”라고 한 번 더 묻는다면, 그때부터는 말문이 막혔습니다.


나는 누군가.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는 사람인가.


질문은 많았지만, 답이 없었습니다. 그 순간, 어쩌면 저는 제 인생에서 가장 솔직한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여기까지 와버렸구나.' 그때쯤, 한 권의 책 제목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어디선가 추천을 받았던 책,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되었다.’ 제목을 보는 순간, 뒷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했습니다. '아, 이거 내 얘기구나.' 마흔이라는 숫자,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라는 표현이 너무 날것이라, 피하고 싶으면서도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상자만 뜯고 덮어 두지 않았습니다. 주말,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조용히 앉아 책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는 책을 내려놓고 엉엉 울었습니다. 어떤 문장이 특별히 슬픈 문장이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책 속 사례들이 곧 제 일이어서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그 문장들이 너무도 정확하게 '자신이 누군지 모른 채, 어떻게든 버티기만 해온 사람'의 내부를 해부하고 있어서였습니다. 내가 나를 얼마나 방치해 왔는지, 내 마음의 울음을 얼마나 오랫동안 못 본 척해 왔는지, 그제야 조금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책을 읽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나는 나를 꽤 심하게 학대해 왔구나.'


다른 사람에게는 나름대로 친절하려 했지만, 정작 자신에게는 참 가혹했습니다.


“이 정도는 해야지.”

“이걸 못하면 넌 가치가 없어.”

“이 나이에 아직도 이 수준이야?”


말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늘 이런 말을 자신에게 쏟아붓고 있었습니다. 그 상태로 버티고, 버티고, 또 버텨서 여기까지 온 겁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자, 눈물이 그냥 흘렀습니다. 누군가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종류의 울음이었습니다. 어딘가에 숨어서, 소리 내지 않고, 오래 울고 싶은 날의 눈물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조금 다른 마음으로 책을 다시 보기 시작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책을 통해 ‘나’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이제는 정말로 알고 싶었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까지 스스로를 몰아붙이며 살아왔는지, 내가 중요하게 여겨 온 것들은 정말 내 마음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그저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고 배운 삶의 매뉴얼을 따라온 것인지.


개발자로 살아온 시간은 길었습니다. 코드로 문제를 해결하고, 시스템을 설계하고, 버그를 잡는 일에는 익숙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존재, 특히 ‘나’라는 인간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일에는 거의 경험이 없었습니다. CPU 사용량, 메모리, 네트워크 로그는 읽을 줄 알았지만, 제 마음의 사용량, 에너지의 흐름, 관계에서의 패턴은 읽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조금 엉뚱한 선택을 하게 되었습니다.


“개발자이면서,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되어보자.”


문장으로 적어보니 거창해 보이지만, 실제로 한 일은 아주 작았습니다. 퇴근길에 한 챕터라도 읽기, 인상 깊은 문장은 노트에 베껴 쓰기, 책을 덮고 나서 ‘나는 왜 이 부분에서 마음이 흔들렸지?’라고 한 줄이라도 적어 보기. 그게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그 작은 실천들이 쌓이며, 제 안의 무언가가 조금씩 변해가기 시작했습니다. 독서는 남의 언어로 쓰인 타인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책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를 먼저 떠올리게 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되었다’를 읽으며 울었던 것도, 결국 책 속 사례가 딱 저여서가 아니라, 그 문장을 통해 이제야 제 얼굴을 제대로 마주 보게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글쓰기는 그제야 조금 보이기 시작한 ‘나’를 아주 천천히 문장으로 옮기는 작업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멋진 문장 말고, 조금은 지저분하고, 정리가 덜 되어 있고, 이리저리 튀어나오는 날것의 문장들.


“나는 왜 내 이름 말고는 나를 설명할 말을 갖고 있지 못할까.”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며 살아왔을까.”

“나는 어떤 상황에서 가장 힘들어하는 사람인가.”


이 질문들에 완벽하게 답하지 못해도 괜찮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제는 최소한 질문에서 도망치지 않겠다는 태도였습니다. 돌이켜보면, 그전까지의 저는 '개발자 ○○입니다'라는 명함으로 충분하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회사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월급을 얼마나 받는지, 어떤 프로젝트를 했는지가 곧 저의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고, 우연히 본 영상 하나, 귀에 꽂은 팟캐스트 몇 개, 그리고 주말에 읽은 책 한 권이 그 믿음을 뒤흔들었습니다. 아이 앞에서 “너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라고 묻고 싶은데, 정작 제 자신에게도 답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선뜻 대답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다만 예전처럼 ‘이름’만 말하고 끝내지는 않습니다. 이제는 이렇게라도 덧붙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는 내가 누군지 알고 싶어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사람입니다.”

“나는 개발자이지만 인간이 무엇인지 궁금해 인문학 책을 펼쳐보는 사람입니다.”

“나는 예전보다 나를 조금 덜 학대하면서 살아보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아직도 모르는 게 훨씬 많습니다. 가끔은 여전히 제 안에서 길을 잃기도 하고, “이게 대체 무슨 소용인가”라는 허무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는 그 상태를 있는 그대로 적어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나를 모르겠어서 오늘도 나를 들여다본다.”


어쩌면 인생의 후반부는, 대단한 성취를 쌓는 시간이 아니라 이 문장을 조금씩 바꾸어 가는 시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누군지도 몰랐다'에서 시작해 언젠가 조용히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그래도 이제는 예전보다 조금 더 나를 알아가는 사람이 되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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