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무작정 시작한 독서와 글쓰기.

by 곽준원

독서를 시작한 건 거창한 결심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한 번 해볼까 하는 마음이었고, 솔직히 말하면 오래갈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때의 저는 책과는 별 인연이 없는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무작정 시작한 그 행동 하나가, 어느새 8년이라는 시간을 건너와 지금의 저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문장이 되어버렸습니다.


'저는 책을 읽고, 그 내용을 글로 정리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 말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정체성이 아니라, 작은 습관이 포기되지 않고 이어지면서 조금씩 만들어진 결과였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책 한 권을 읽고, 감명받은 부분에 밑줄을 긋고, 마음에 남는 문장을 옮겨 적는 수준이었습니다. 머릿속이 금방 지워질 것 같아, 블로그에라도 남겨야겠다는 단순한 생각이었지요.


글을 쓴다고 해서 누가 읽어주리라는 기대도 없었습니다. 조회 수는 신경 쓰지 않으려 했고, 누군가의 ‘좋아요’를 받기 위해 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날 읽은 내용을 제 언어로 다시 정리하면서 “아, 나는 이 부분이 마음에 남았구나”를 확인하는 그 과정 자체가 좋았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그렇듯이, 조금씩 욕심이 생겼습니다. 글이 쌓이고, 누군가가 우연히 글을 읽고 댓글을 달기 시작하면서부터였습니다.


“이 부분 정리가 너무 잘 되어 있네요.”

“덕분에 이 책에 관심이 생겼어요.”

“이 문장, 저도 참 좋아했는데요.”


익명의 누군가에게서 날아온 짧은 댓글 한 줄이 생각보다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의외였습니다. 그저 혼자 정리하려고 쓴 글이었는데, 누군가에게도 작은 도움과 자극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 묵직한 보람처럼 느껴졌습니다.


블로그에 글을 쓰면, 저는 다시 그 글을 읽어보게 됩니다. 댓글이 달리면, 그 댓글을 읽고 다시 책을 펼쳐봅니다. '내가 이 부분을 이렇게 이해했는데, 이 사람은 이렇게 느꼈구나' 하고 비교도 해봅니다.


읽고, 정리하고, 다시 읽고, 수정하고, 댓글을 읽고, 답글을 달고. 이 모든 과정이 결국 하나의 ‘반복 학습’이 되었습니다. 집중해서 읽은 책의 핵심 키워드들이, 이런 반복을 통해 제 장기 기억 속으로 천천히 내려앉았습니다.


시간이 지난 뒤에도 문득 어떤 개념이나 문장이 떠오를 때면, '아, 이게 글로 정리하는 힘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독서를 이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취향의 궤적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독서 커뮤니티에서 추천해 준 책들을 읽다가, 유독 자주 표시가 되는 영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심리학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사람 마음이 궁금하다'는 정도였습니다. 내 마음도 잘 모르겠고, 남의 마음도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을 때, 심리학 책은 조금 더 정직하게 인간을 해석해 주는 안내서처럼 느껴졌습니다. 조금 더 확장해서 보면, 그것은 인문학이었고, 그 끝에는 철학이 있었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둘러싼 여러 학문의 조각들이, 하나의 퍼즐처럼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무렵, 독서 커뮤니티에 무료 독서 모임 참가자를 모집한다는 글이 올라왔습니다. 망설임은 길지 않았습니다.


‘무료’, ‘심리학’, ‘독서 모임’이라는 단어들이 한 문장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바로 신청 버튼을 눌렀고, 그날 이후로 결과를 기다리는 며칠 동안은 조금 들뜬 기분으로 지냈습니다. 신청자가 많다고 했기에 혹시 떨어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있었는데, 다행히 저는 그 모임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그 12주의 독서 모임이 제 삶의 방향을 또 한 번 크게 틀어놓았습니다. 그 모임의 규칙은 단순하지만,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매주 책 한 권을 읽을 것.
반드시 서평을 쓸 것.
모임에서 각자의 글을 공유하고 토론할 것.

말로는 쉬워 보이지만, 직장 생활과 병행하면서 매주 한 권을 읽고 서평까지 쓰는 일은 생각보다 강도가 높았습니다. 피곤한 날, 솔직히 책을 덮고 싶을 때도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내가 쓴 글을 읽어줄 사람이 있다.'


그 사실이 꽤 큰 힘이 되었습니다. 혼자 블로그에 올려두는 글과는 또 다른 감정이었습니다. 이 모임에서는 내가 쓴 문장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소리 내어 읽히고, 때로는 질문을 받고, 동의를 얻고, 반박을 듣기도 했습니다.


“이 부분을 이렇게 해석하셨군요. 저는 조금 다르게 느꼈어요.”

“여기에서 왜 이런 감정이 드셨는지 궁금해요.”

“저는 이 문장이 너무 좋았는데, 여기에는 언급이 없네요.”


그런 대화를 나누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 나는 책을 읽는 것만이 아니라, 내가 읽은 책을 통해 나라는 사람을 드러내고 있었구나.' 같은 책을 읽어도, 어떤 문장에 밑줄을 긋는지, 어디에서 멈춰 서서 오래 생각하는지는 사람마다 모두 다릅니다.


그 차이를 나누는 시간이, 결국 서로의 세계를 조금씩 엿볼 수 있는 시간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12주의 모임이 끝나갈 무렵, 모임 담당자로부터 제안을 하나 받았습니다.


“다음 기수 때, 모임장을 한 번 해보시는 건 어때요?”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습니다. 놀랍고, 기쁘고, 동시에 겁이 났습니다.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내가 진행하는 모임이 누군가에게 의미가 될 수 있을까?’


그런 생각들이 뒤엉켰지만, 결국 저는 “네, 해보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한 번쯤은 내가 그렇게 좋아하던 심리학 책들을 직접 골라 사람들과 함께 읽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모임장이 되었습니다.


12권의 책을 선정하는 일부터가 큰 고민이었습니다. 가볍게 읽히지만 깊이가 있는 책, 개인적인 치유에 초점이 맞춰진 책, 관계와 사회를 함께 보게 해주는 책, 마음의 구조를 다룬 책, 뇌과학과 연결된 책.


결국 제가 그동안 가장 깊이 파고들었던 심리학 관련 도서들로 목록을 채웠습니다. 이 분야라면 적어도 누구보다 진지하게 읽어왔다고 말할 수 있었으니까요. 모임장은 단지 책만 선정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시간을 관리하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끌어내고, 때로는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고, 갑자기 조용해진 방 안에 질문 하나를 던져야 하는 사람입니다. 처음에는 많이 떨렸습니다. 하지만 몇 차례 모임을 진행하면서, 조금씩 요령이 생겼습니다.


“이번 책을 읽고, 가장 오래 머릿속에 남은 장면은 무엇이었나요?”

“이 책의 문장을 하나만 들고 일상에 가져간다면, 어떤 문장을 고르시겠어요?”

“저자는 이렇게 말하지만, 여러분은 동의하시나요?”


이런 질문들을 나누다 보니, 책은 더 이상 종이 묶음이 아니라 대화의 시작점이 되어 있었습니다. 커뮤니티에서 공식적으로 진행된 3번의 독서 모임이 끝날 때쯤, 저는 이 시간을 쉽게 놓을 수 없겠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다시 모았습니다.


“우리, 그냥 계속 읽지 않을래요?”


그렇게 시작된 작은 모임이 어느새 5년을 넘겼습니다. 그 사이 함께한 사람들은 조금씩 바뀌었지만, 책과 읽기, 서평과 대화라는 틀은 꾸준히 이어졌습니다. 돌아보면, 그동안 읽은 심리학 도서만 해도 꽤 됩니다.


책장 한 켠에는 익숙한 제목들이 줄줄이 꽂혀 있고, 노트와 블로그에는 제가 남긴 흔적들이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책을 많이 읽었다고 해서 아는 것이 늘 '많아졌다'고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저는 그 반대의 경험을 했습니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내가 모르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되었습니다. 심리학이라는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그 끝에는 뇌과학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감정은 뇌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알고 싶어 지니, 자연스럽게 생물학으로 이어졌고, 진화에 대한 이야기를 읽다 보니, 인류의 기원과 우주에 대한 책으로 시야가 넓어졌습니다.


우주를 이야기하려면, 다시 역사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문명을 만들고, 어떤 전쟁을 치르고, 어떤 경제 시스템을 발명해 왔는지 따라가다 보면, 역사는 전쟁과 경제, 탐험과 문명, 철학과 지리로 흩어졌다가, 결국 다시 한 곳으로 돌아옵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 질문 앞에 서게 될 때마다, 저는 처음에 심리학 책을 펼쳤던 그 순간을 떠올립니다. 단지 내 마음이 왜 이렇게 힘든지 알고 싶어서 책장을 열었을 뿐인데, 결국 다시 인간 전체를 바라보는 지점까지 와 버렸다는 사실이 신기했습니다.


그리고 조금 늦었습니다. 40대 중년이 되어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것이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내 20대와 30대는 더 다르게 흘러갈 수 있었을까.’ 이런 생각이 스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곧 다른 생각도 뒤따랐습니다. ‘어쩌면 누군가는 아직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오히려 운이 좋은 편일지도 모른다.’ 알게 된 시점이 늦었다는 아쉬움보다 그래도 이제는 알게 되었다는 안도감이 조금 더 컸습니다.


무작정 시작한 독서와 글쓰기는 이제 제게 하나의 정체성이 되었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묻는 질문 앞에서 예전에는 직업이나 역할만을 떠올렸다면 지금은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꾸준히 책을 읽고, 그 내용을 글로 정리하며 세상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이 정체성은 대단한 타이틀은 아닙니다. 유명 작가도 아니고, 학자도 아니고, 강연자도 아닙니다. 하지만 한 사람의 일상과 생각의 방향을 설명하기에는 지금의 저에게 딱 맞는 문장입니다.


앞으로도 저는 아마 계속해서 '읽으면 읽을수록 내가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책을 펼칠 때마다, 또 다른 분야로 가지를 뻗게 될 것입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 끝에서 저는 결국 다시 ‘인간’으로 돌아올 테니까요. 그리고 그 인간이라는 존재 안에는, 여전히 잘 모르지만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나’도 포함되어 있을 테니까요.


오늘도 저는 책을 펼칩니다. 몇 줄 읽고, 마음에 남는 문장을 노트에 옮겨 적고, 언젠가 블로그에 글을 써 올릴 생각을 합니다.


이 단순한 반복이 앞으로의 8년, 그 이후의 시간을 또 어떻게 바꿔 놓을지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무작정 시작했던 그날의 선택이 제 삶의 가장 잘한 선택 중 하나가 되었다는 것만큼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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