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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2주 만에 다시 온 시련 .

by 곽준원
'괜찮아질 거야'라는 믿음 한 조각

첫 번째 회사에서 사업이 정리된 뒤, 팀 단위로 다른 회사에 합류하기로 결정됐을 때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좀 안정되겠지.’ 그건 희망이라기보다는 자기 위로에 가까웠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이미 바닥 가까이까지 내려간 상태였습니다. 몸은 병원에서 막 나온 몸이었고, 정신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불안에 계속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경력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짧은 5개월이었고, 그 5개월 안에 저는 야근, 클로즈 베타, UI 전담, 입원, 사업 철수, 권고사직까지 다 겪었습니다.


이제 새 회사로 간다고 했을 때, 저는 그걸 새로운 기회라고 부르진 않았습니다. 그건 그냥 숨구멍이었습니다.

‘이걸로 다시 일할 수 있으면 다행이지. 이게 그냥 살아 있는 거지.’ 그 생각 하나로 버텼습니다.


새로운 회사, 그러나 익숙하지 않은 공기

이직 이후 첫 출근 날이 왔습니다. 사이에 공백은 약 2주 정도였습니다. 이상하게 짧은 시간입니다. 충분히 쉴 만큼은 아니고, 의미 있게 준비할 만큼도 아닌 시간. 다만 멘털이 바닥에서 살짝 올라올 정도였다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새 회사에 출근해서 인사를 했습니다. 제일 먼저 느낀 건, 이곳은 '게임 개발 전문 회사'라는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다는 점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기존 회사는 게임을 팔아서 먹고사는 집단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만드는 게임으로 돈을 벌어야 한다'라는 목적이 선명했죠. 그래서 일정이 압박이었고, 베타 테스트 일정이 목숨 줄처럼 다뤄졌습니다.


그런데 새 회사는 조금 달랐습니다. 느낌이 이랬습니다. ‘우리도 게임 한 번 만들어보고 싶다. 근데 그걸 해줄 개발자가 필요하다.’ 말을 조금 거칠게 하면 이렇습니다. 전문 게임 개발 조직이라기보다는 '게임이라는 걸 만들어보고 싶은 회사가 개발자를 불러 모아본 상태'에 더 가까웠습니다.


이 차이는 굉장히 큽니다. 전자는 생존입니다. 후자는 실험입니다. 전 회사는 '우린 이거 못 내면 죽는다.' 모드였고, 새 회사는 '이거 잘 되면 좋고 안 되면 다른 걸로 또 생각해 보자.'에 가까운 공기였습니다. 저는 그 공기를 앉자마자 느꼈습니다. 그리고 약간 불안해졌습니다.


‘…이 회사, 진짜 오래갈 수 있는 그림이 있나?’

‘여기서 나는 어디에 놓이는 거지?’


캐주얼 레이싱은 ‘최소 인원만’

출근해서 들은 첫 지시는 이랬습니다.


“캐주얼 레이싱 게임은 최소 인원만 배정하겠습니다. 기존에 하던 분들만 붙어서 유지해 주세요. 나머지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준비해 봅시다.”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들고 온 그 캐주얼 레이싱 게임은 회사의 주력은 아니다. 유지 인력만 붙여두고, 당장 수익화 가능성은 크게 기대하지 않겠다.


대신 새로운 걸 해보자. 이 말은 표면적으로는 선택지처럼 들립니다. '여러 방향을 동시에 시도해 보자.'라는 식으로요. 하지만 실제 의미는 훨씬 구체적입니다. 역시 생존이라 아니라 게임 업계에서 발을 한 번 담가보자는 의도가 다분했습니다.


'너희가 들고 온 건 회사의 메인 카드가 아니다.' 저는 그 말을 곧장 이해했습니다. 그건 말없이 순위가 매겨졌다는 뜻이었습니다. 우리의 게임은 1순위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그 게임을 만들기 위해 함께 온 저희 역시 1순위의 인력은 아니라는 뜻이었습니다. 꼭 누가 대놓고 '당신들 비주류예요'라고 말한 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분위기는 말보다 더 정직합니다. 분위기가 말하고 있었습니다. ‘너희는 여기서 중심이 아니다.’


새로운 개발: 2D 횡스크롤 RPG

그다음에 회사에서 나왔던 얘기는, 다소 흥미로우면서도 현실적이었습니다.


"메이플스토리 같은 2D 횡스크롤 RPG를 한번 만들어보면 어떨까요?”

당시 시장 상황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는 방향이었습니다.


그 장르는 이미 증명된 모델이었고, 유저층도 있었고, BM(과금 구조)도 어느 정도 틀이 잡혀 있었고, 무엇보다 '우리도 저런 거 만들 수 있지 않을까?'라는 유혹을 자극하는 장르였습니다. 그 얘기가 회사 안에서 자연스럽게 나왔습니다.


“그 방향으로 새 프로젝트를 기획해 보자.”

“기술적으로 가능한지 검토하자.”

“리소스 스타일은 이런 느낌이었으면 좋겠다.”

“맵 구조를 세로로도 쓸지 가로만 쓸지.”

“직업, 스킬, 성장 루프를 어떻게 가져갈지.”


지금 말로 하면 약간 회의록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반쯤 꿈이었습니다. 확정된 것도 없고, 정리된 기획서도 없고, 팀 배분도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모두가 말 그대로 상상력을 꺼내놓는 단계. 그런데 여기에도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 상상은 재미있었지만, 기반은 불안정했습니다.


“어떤 서버 구조로 갈지?”

“지금 사내에 그걸 감당할 서버 인력이 있는지?”

“라이브를 상정한 설계를 지금부터 할 여력이 있는지?”

“개발 기간 동안 회사를 지탱할 돈은 있는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은 없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걸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회사가 어쩌면 ‘게임을 해보고 싶은 회사’였다고 말씀드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정식으로 게임을 만들어 본 경험이 없는 조직은, 만들고 싶은 게임에 대해 '하고 싶은 얘기'는 많지만 '끝까지 만든 다음 어떻게 운영하고 유지하고 살릴 건지'에 대한 감각이 없습니다. 저는 그걸 2주 동안 매일 느꼈습니다.


입으로는 “우리도 할 수 있지 않을까?”라면서 눈빛은 '근데 진짜 할 수 있긴 한가?'라고 묻고 있었습니다. 그 묘한 어긋남이 계속 쌓이던 시기였습니다.


그날, 점심시간

그리고 그 일이 벌어진 날이 왔습니다. 아무것도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날도 평소처럼 출근했고, 평소처럼 앉았습니다. 아침 인사했고, 눈에 띄는 긴급한 기류도 없었습니다. 평범했습니다. 그저 회사의 한낮일 뿐이었습니다.


점심시간이 되었습니다. 다 같이 밥을 먹었습니다.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대화도 했고, 가벼운 농담도 오갔습니다. 정말로, 그 직전까지는 아무 일도 없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점심이 끝나고 자리로 돌아왔을 때 통보가 내려왔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단어를 조금 다듬어 표현하는 회사도 있고, 직접적으로 '그만 나오셔도 됩니다.'라고 말하는 회사도 있습니다. 그 회사는 비교적 직접적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저는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나가게 되었습니다. 복귀가 아니라 퇴장이었습니다. 그날 점심시간에, 그 자리에서, 저는 회사 사람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드는 감정은 예상과 다릅니다. 사람은 이런 상황에서 '화를 낼 것 같다.'라고 상상합니다. “왜요?”라고 따지고, 이유를 묻고, 억울함을 표출하고, 말싸움을 하고, 이런 장면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실제로는 멍해집니다. 정말로 멍해집니다. 머리가 텅 비고, 아무 말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네?” 같은 짧은 말조차 입 밖으로 잘 안 나옵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의 핵심은 분노가 아니라 현실 확인이기 때문입니다. ‘아, 이제 나는 여기 소속이 아니구나.’


그 사실을 이해하는 데 온 에너지가 다 쓰입니다. 물건을 정리하라고 하면 보통 상자를 줍니다. 그런데 제 자리는 달리 정리할 것도 없었습니다. 책상 위엔 데스크톱 PC 하나뿐이었습니다. 개인 물품이라고 할 만한 게 거의 없었습니다. 그게 조금은 다행이었습니다.


사무실 한복판에서 상자에 인형, 컵, 사진, 화분 같은 걸 담아 나오는 장면도 없이, 저는 그저 빈 몸으로 회사를 나가면 됐으니까요. 그 다행히 씁쓸했습니다.


‘나는 여기서 아직 아무것도 쌓아 올리지도 못했구나.’

‘내 흔적은 이 자리에도, 이 조직에도 안 남았구나.’


그런 생각이 동시에 올라왔습니다.


그 길, 버스

회사를 나온 뒤 저는 버스를 탔습니다. 버스를 타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때까지도 실감이 잘 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멘털이 무너질 때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가 '현실감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마치 내가 지금 겪는 일이 내 일이 아니라, 그냥 TV 화면 안에서 벌어지는 장면 같다는 느낌. 제가 정확히 그랬습니다.


‘이게 진짜인가?’

‘내가 지금 나가는 게 맞아?’

‘근데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점심 먹고 같이 얘기하지 않았나?’

‘방금까지 그냥 회사원이었는데, 지금은 뭐지? 뭐라고 불러야 하지 나를?’


두 발은 버스 바닥을 딛고 있는데, 마음은 공중에 떠 있는 느낌. 내 삶이 몸하고 연결이 안 된 느낌. 멀미 같은 멍함. 그 상태로 집에 갔습니다. 이른 오후였습니다. 퇴근 시간이라고 하기엔 너무 이른 시각, 집에 있을 시간이 아닌 시간.


집 문을 열자마자 어머니가 놀라셨습니다. 당연합니다. 아직 한창 일하고 있을 시간인데 아들이 집으로 걸어 들어왔습니다. 그 표정은 정말 많은 걸 말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 있니?”


저는 그 질문이 너무 아파서 바로 대답을 못 했습니다. 대답을 고르고 있다가 결국 아주 단순한 문장 하나만 꺼냈습니다.


“엄마. 회사에서 그만 나오래요.”


말을 해놓고 나서 제가 제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제 목소리가 너무 낯설었습니다. 그 목소리는 화도, 분노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무너진 사람의 목소리였습니다.


그 말을 하고 저는 제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냥 침대에 앉았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TV도 안 켰고, 음악도 안 켰고, 휴대폰도 제대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벽을 바라봤습니다. 빈 방, 조용한 공기, 아무 소리 없음. 제 머리도 비어 있었습니다. 어떤 감정으로 설명하면 좋을까요. 분노? 아니었습니다. 좌절?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눈물? 아직 안 나옵니다. 그건 그냥 “막막함”이었습니다.


막막함이라는 건 감정이라기보다 상태에 가깝습니다. 움직일 수 없게 만드는 공기 같은 것.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지…”


그 문장만 계속 떠올랐습니다.

대책이 없었습니다.

진짜로 없었습니다.


2주 만에 또다시

타이밍을 숫자로 보면 더 잔인합니다. 첫 번째 회사에서 사업 종료 통보. 팀 단위 이직 결정. 2주 쉬고 새 회사 출근. 그리고, 2주 만에 다시 나가라는 통보.


시간으로 계산하면 한 달도 채 안 되는 구간에서 저는 두 번 회사를 잃었습니다. 이건 머리로는 “그럴 수도 있지”라고 말할 수 있는 일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몸으로 겪으면 완전히 다릅니다. 회사는 단순히 돈을 받는 곳이 아닙니다. 회사는 '내가 아직 사회적으로 유효하다.'라는 감각을 유지시키는 장치입니다. '나는 지금 역할이 있는 사람이다.'라는 확신을 주는 공간입니다. 그걸 두 번 연속으로 잃으면, 사람은 자기 자신을 의심합니다.


‘나는 문제 있는 사람인가?’

‘나 때문에 이렇게 되는 건가?’

‘내가 뭔가 결정적으로 못 하는 게 있는 건가?’

‘나는 업계가 원하는 사람이 아닌가?’


이 질문이 정말 깊이 파고듭니다. 객관적으로 말하면 회사 사정이었고 구조 문제였고 방향성 문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20대 후반의 저는 그걸 그렇게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나한테서 원인을 찾아야 마음이 편해진다.' 그게 인간의 습관입니다. 그날 저는 제 잘못을 억지로 찾아 헤매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가 남긴 것

지금 돌이켜보면 이 시기에서 배운 게 있습니다. 그때는 몰랐지만, 나중에 제 인생을 붙들어준 깨달음들입니다. '회사=안전지대'라는 환상은 빨리 깨야 한다는 것 저는 첫 회사에 들어가던 날 '이제 됐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6개월도 안 돼서 회사가 사라졌습니다. 두 번째 회사에 가서도 '이제 괜찮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2주 만에 잘렸습니다. 저는 이걸 통해 깨달았습니다.


“어떤 회사에 몸을 얹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안정이 아니다.”


조직의 계획은 내 계획이 아닙니다. 회사의 방향은 회사 사정으로 언제든 바뀔 수 있습니다. 그 회사가 살아남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대표의 판단 때문일 수도 있고, 투자자의 기분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그 변화가 ‘내 인생 준비도’와는 상관없이 온다는 겁니다. 저는 아무 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바뀌는 방향을 그냥 맞아야 했습니다.


'경력'은 길이가 아니라 버틴 흔적입니다. 이때 저는 '5개월, 2주'라는 숫자를 부끄럽게 느꼈습니다. 마치 실패의 증거 같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이건 실패의 증거가 아니라 생존의 기록이었습니다. 고작 몇 달 안에 서비스 준비, CBT 대응, UI 총괄, 긴급 리뉴얼, 야근, 병원 입원, 팀 해체, 강제 이직, 재정리까지 경험해 본 신입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숫자는 짧지만, 내용은 얕지 않았습니다. 이건 나중에 제가 다음 면접에서 스스로를 설명할 때 굉장히 중요한 무기가 됩니다. '저는 현장이라는 게 어떤지 압니다.'라는 말이 그냥 말이 아니게 된 순간들이었습니다.


멘털은 한 번에 무너지지 않습니다. 천천히 닳습니다. 저는 그날 집에 와서 울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완전히 지치면, 울 힘도 없습니다. 울음이 터지는 건 그 다음날, 혹은 며칠 뒤, 혹은 부모님과 밥을 먹다가 갑자기일 때도 있습니다. 정신은 그렇게 천천히, 조용히 닳습니다. 저는 이걸 몸으로 배웠습니다.




#시련 #권고사직 #짧은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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