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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업계의 처참함. 타인이 주는 피해

by 곽준원
다시 모인 자리

두 번째 회사에서 “오늘까지만 나오세요.”라는 말을 들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다시 모였습니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얼굴들은 다들 알고 있는 얼굴들이었고, 모두 표정이 비슷했습니다.


말로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한 번 무너진 사람이 또 무너졌을 때 나오는 얼굴. 우리 모두는 위로가 필요했습니다. 누군가는 “괜찮아질 거야” 같은 말이라도 듣고 싶었고, 또 누군가는 “아.. 진짜 힘들겠다.”라는 말이 필요했을 겁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도 그랬습니다. 그 자리는 술자리라기보다는 정리 자리였습니다. 서류로 정리되지 않은 것들. 통보에서 빠진 것들. 회사라는 이름이 절대 알려주지 않는 것들. 그걸 서로의 입으로 채워 넣는 시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왜 이렇게 갑자기 잘린 거야?”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한 거야?”


그날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듣는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답은 생각보다 단순했지만, 동시에 잔인했습니다.


한 사람의 행동으로 시작된 이야기

그날 들은 핵심은 이거였습니다. 우리를 잘라낸 사유는 '신규 프로젝트 팀 전체에 대한 신뢰 붕괴'였습니다. 들어보니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신규 프로젝트를 준비하던 팀이 있었지요.


저는 그 팀에 배치될 예정이거나, 그 팀의 일부로 묶여 있는 상태였습니다. 캐주얼 레이싱은 최소 인원만 남겨두고, 나머지 리소스는 새로 기획하던 2D 횡스크롤 RPG 쪽으로 돌린다는 방침이 계속 논의되고 있었으니까요.


그 팀에는 그래픽 디자이너 한 명이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밤늦게까지 회사에 남아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모습을 보면서 솔직히 좀 안심했어요.


“아, 그래도 이 팀은 진짜 뭔가 하려고 한다.”

“밤까지 남아서 계속 그릴 정도면 방향성 잡히는 거 아니야?”

“그래, 아직 우리도 할 수 있어.”


야근은 당연한 게 아니어야 하지만, 그 시기에는 야근이 곧 의지처럼 보였습니다. 버티겠다는 선언처럼 보였습니다. 나 자신도 그렇게 버텼고, 그 친구도 버티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문제는 그 확신이 완전히 오해였다는 점입니다. 어느 날 밤, 사업부장이 늦게까지 회사에 남았다가 우연히 그 디자이너의 자리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모니터 화면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 일이 터졌습니다.


“이 그림, 우리 거랑 다르잖아”

사업부장이 본 건 단순한 콘셉트 스케치가 아니었습니다. 회사에서 논의하던 신규 프로젝트의 방향성과는 전혀 다른 그림체, 전혀 다른 스타일의 작업물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이런 느낌입니다. 우리가 논의하던 건 밝은 톤의 캐주얼이었다면, 그 디자이너가 그리던 건 훨씬 하드코어 한, 다른 실사풍의 일러스트. 한눈에 봐도 달랐다고 합니다.


같은 프로젝트에서 나올 수 있는 다양성의 문제 수준이 아니라, '이건 아예 다른 게임'이라고 말할 수 있는 차이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사업부장은 바로 물었습니다.


“이건 뭐예요?”

“이건 우리 프로젝트 이미지 맞아요?”

“이거 어디에 쓰려고 그리는 거예요?”

“왜 회사에 남아서 이런 걸 하고 있어요?”


그 질문에는 사실 답이 이미 들어 있습니다. 사업부장의 말투는 ‘확인’이 아니라 ‘추궁’이었습니다. 그 순간 이미 분위기는 나빠졌습니다. 그리고 그 디자이너는 더 이상 둘러대지 못했습니다. 이건 스킨톤이나 옷 주름 수준의 스타일 차이가 아니었습니다. 완전히 다른 방향성이었고, 완전히 다른 목적을 가진 그림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이렇게 털어놓았다고 합니다.


“이직하려고 포트폴리오 만들고 있었습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그냥 개인 사정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회사가 불안하니까 이직 준비할 수도 있잖아.”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생각입니다.


지금 이 업계를 살고 있는 누구도 그 생각을 비난할 순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회사 리소스를 썼다는 의미

일반적으로 면접용 포트폴리오를 준비하는 건, 업계에서 드문 일이 아닙니다. 특히 회사가 불안해 보일 때는 자연스러운 행동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두 가지가 동시에 걸렸습니다.


회사 사무실에서, 회사 시간에, 회사에서 제공한 도구와 라이선스를 사용해, 회사의 프로젝트와 무관한 결과물을 만들고 있었다. 이건 단순히 '퇴근 후 개인 그림을 좀 그리고 있었다.'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회사 눈으로 보면 이렇게 해석됩니다. 회사 비용으로 개인 포트폴리오를 만들었다.


즉, 회사 리소스를 밖으로 반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정작 회사 프로젝트의 방향은 집중하지 않았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이 팀은 이미 ‘여길 떠난 뒤’ 버전을 준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마지막 문장이 아주 치명적입니다.


“이 팀은 이미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회사는 두려움에 굉장히 민감합니다.


실패보다도, 내부 유출을 더 무서워할 때가 있습니다. 기획, 콘셉트, 방향성, 그래픽 스타일 — 이런 것들은 외부에 나가는 순간 회사의 '차별점'이 사라집니다. 그걸 회사는 ‘통제 불가’라고 부릅니다. 그날 밤, 그 디자이너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사업부장은 그렇게 받아들였던 겁니다.


'얘 혼자만 저러는 게 아니고, 팀 전체가 내일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건가?'


다음 날 아침의 결과

그리고 그 결과가, 우리가 당한 '점심 해고'였습니다. 개별 사유가 아니라 팀 단위 통보. “오늘 여기까지 하자.” 즉, 회사는 이렇게 판단한 겁니다.


회사가 내부적으로 불안정하다. (사실이었다)

이 팀은 핵심 전력이 아니라 새로 들어온 인력이다.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 팀 내부에서 이미 밖을 보고 있다. (그렇게 보였다)

이 상태로 계속 끌고 가면, 회사 쪽 리스크가 더 커진다. (사업부 시선에선 합리적이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그 팀은 그냥 잘라야 한다.' 누군가는 이렇게 묻고 싶으셨을 겁니다.


“아니, 그 디자이너 한 명만 내보내면 되는 거 아니야?”

“왜 전체를 한꺼번에?”


저도 그 생각을 했습니다. 정말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회사는 사람을 예쁘게 보지 않습니다. 회사는 사업 단위로 판단합니다. ‘불안 요소가 섞인 팀’은 리스크다.


'리스크를 분해해서 한 명만 제거하자'가 아니라 '리스크를 한꺼번에 없애자'로 움직이는 게 회사의 방식입니다. 우리는 그 방식 아래에서, 그냥 한 번에 같이 잘려나간 겁니다. 우리 전체를 하나의 '리스크 블록'으로 본 거죠.


말 그대로 연대책임이었습니다. 아무도 우리를 개인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너는 잘했고, 너는 아직 할 수 있고, 너는 괜찮고' 이런 구분은 없었습니다. 우리는 묶음이었고, 묶음째 버려졌습니다.


남은 사람과 남지 못한 사람

그 디자이너는 모임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을 기다리다가 결국 오지 않는 걸 확인했습니다. 죄송하다는 메시지만 남았다고 들었습니다. 그게 참 묘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해가 안 되기도 했습니다.


“네 행동 때문에 우리 전부 잘린 거잖아.”

“우리는 이제 뭐 먹고살아?”


다른 한편으로는 이해가 됐습니다. 그 사람 입장에서는 얼굴을 들 수가 없었을 겁니다. 자기도 살려고 한 행동이었을 겁니다. 불안하니까, 다음 회사를 준비한 거겠지요.


여기 오래 못 버틴다는 걸 느꼈으니까, 그 흔들림 속에서 자기만의 탈출구를 만든 거겠지요. 문제는 그 자구책이 타인에게 직접적인 피해로 번졌다는 점입니다. 그 한 행동이 고스란히 팀 전체를 날려 버렸습니다.


저는 그 사실을 그날 처음 제대로 받아들였습니다.

“한 사람의 결정이, 다른 사람의 생존을 날려버릴 수도 있구나.”


이건 이상할 정도로 단순한 사실인데, 실제로 겪기 전까지는 절대 체감하지 못하는 종류의 사실입니다. 그날 이후로 저는 이 생각을 진심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하는 행동 하나가 다른 사람 밥줄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날은, 책임이라는 단어가 감정이 아니라 현실이 된 날이었습니다. 서로 얽혀 있는 구조 안에 들어온 이상, '내 일은 내 일'이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걸 몸으로 배운 첫 순간이었습니다.


업계의 현실, 그리고 마음에 생긴 균열

그 모임에서 우리는 다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한 거야?”

“이 업계가 원래 이런 거야?”

“그럼 버티면 뭐가 남는 거야?”

“나 이 길 계속 가도 돼?”


그 질문과 함께 딱 한 목소리가 제 머릿속에서 다시 되살아났습니다. 아버지가 했던 말씀입니다.


“야, 그거 만들어서 밥 벌어먹을 수 있겠어?”

저는 그 질문에 대놓고 맞섰던 사람입니다.


“아빠, 인간이 존재하는 한 게임은 사라지지 않아요.”

“명절마다 화투치고 윷놀이하는 것도 다 게임이에요.”

“게임은 인간 사회의 본능이에요. 저는 그쪽을 할 거예요.”


저는 그 말을 믿었습니다. 지금도 그 말 자체는 믿습니다. 그런데 이때 처음으로 다른 문장이 제 안에 생겼습니다. ‘게임은 사라지지 않겠지. 하지만 게임을 만드는 이 구조 안에서 내가 살아남을 수 있겠나?’


이건 전혀 다른 질문이었습니다. 게임이라는 산업은 남는다. 하지만 그 안의 개인은 갈아 없어진다. 그럼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저는 비로소, 산업과 나를 분리해서 보기 시작했습니다.


성공하는 게임 vs 살아남는 사람. 그 둘이 같은 곡선을 그리지 않는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건 솔직히 말하면 좌절이었습니다. 아주 큰 좌절이었습니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말자'라는 문장

그날 이후 저는 하나의 기준을 마음속에 새기게 되었습니다.

“적어도 남한테 피해를 주지는 말자.”


이건 단순한 윤리라고 말하면 가볍고, 직업윤리라고 말하면 조금 무겁습니다. 정확히는 제 식으로 말해서 이랬습니다. 내 불안 때문에 다른 사람을 끌어내리지 말자. 내 개인적 도피 때문에 주변 사람의 밥그릇까지 깨지게 만들지는 말자.


같이 엮여 있는 사람들의 생존권이 걸려 있는 순간에는, 최소한 선을 넘지 말자. 그때는 몰랐지만, 이 기준은 이후 제 커리어 전반을 이끌었습니다. 나보다 팀이 먼저여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말은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회사는 언제든 팀을 버리니까요.


제가 말하는 건 이겁니다. '내가 살려면 누군가를 밟아야 한다.'는 선택지 앞에서, 정말 그게 전부인지 한 번은 의심하고 가자. 그때 그 디자이너에게 그 한 번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한 번의 부재가 팀 전체를 잘려 나가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그걸 직접 겪었습니다.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깨달았습니다. 업계는 냉정하다. 타인의 행동이 내 인생을 뒤흔들 수 있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최소한 남에게 피해를 만드는 방식으로 살지는 말자.


동시에, 저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정말 이 업계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가?”


그 질문은 그 순간부터 제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 질문은 지금 이 이야기를 쓰는 이 순간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권고사직 #연대책임 #생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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