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불안한 마음의 원인은 무엇인가.

by 곽준원

불안이라는 감정은 참 묘합니다. 그 마음을 견디기 힘들어 상담실 문을 두드리게 만들었던 것도, 그 마음을 이해해 보고 싶어서 두꺼운 심리학 책을 펼치게 했던 것도, 결국은 같은 감정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마음은 분명 독서와 글쓰기가 가져다준 선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선물의 이면에는 어쩔 수 없이 ‘나’라는 사람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는 시간이 따라붙었습니다.


어느 날은 누군가에게 멘토링 글을 쓰다가 마음이 환해졌다가, 또 어느 날은 심리학 책을 읽다가 이유 없이 가라앉기도 했습니다. 도움을 주는 일과 나를 돌아보는 일, 행복과 불안이 하루 안에서도 엇갈리며 오르내리는 시기가 한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까. 이 질문은 예전부터 내 안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저 사람 눈에는 내가 괜찮은 사람으로 보일까?”

“이 말을 하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예전의 나는 이런 생각이 떠오르면 가능한 한 빨리 고개를 돌렸습니다. ‘생각하지 말자. 그냥 지나가자.’ 회피가 가장 빠르고 쉬운 해결책 같았으니까요. 하지만 심리학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이 질문은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얼굴로 다가왔습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내가 그동안 밀어두었던 마음들이 책 속 개념과 사례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타인에게 잘 보이고 싶은 욕구, 거절당할까 두려운 마음, 내가 틀렸다는 말을 들으면 견디기 힘들었던 예민함.


예전 같으면 “다들 그렇지 뭐” 하고 넘어갔을 부분들이 어느 순간부터는 정확한 이름을 가진 개념이 되어 눈앞에 놓였습니다.


‘아, 이게 바로 내가 가진 패턴이었구나.’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 감정은 더 이상 막연한 안개가 아니었습니다. 독서 커뮤니티에서 100명 앞에서 발표를 해야 했던 날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발표는 저녁이었지만, 불안은 아침부터 이미 시작되어 있었습니다. 출근길에 지하철 손잡이를 잡고 있으면서도 머릿속에는 발표 화면이 떠 있었고, 점심을 먹으면서도 '순서를 어떻게 말해야 하지'를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발표 직전에는 손이 약간 떨렸습니다. 마이크를 잡을 때 손가락 끝이 찌릿거렸고, 잠깐이라도 눈을 들면 수십 개의 시선이 나를 향해 있다는 사실이 숨을 더 가쁘게 만들었습니다.


사실 이런 불안은 이미 낯선 손님이 아니었습니다. 예전에는 이보다 더 심할 때도 많았습니다. 일상생활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결국 심리상담실의 문을 두드렸던 적도 있습니다.


“이 정도면 그냥 성격 문제가 아니라, 조금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렇게 시작한 상담은 쉽지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그때부터 나는 내 불안을 조금씩 문장으로 만들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상담실에서 나는 내가 왜 이렇게 힘들었는지를 아주 천천히 배우게 되었습니다.


당위적인 문장들이 내 머릿속에 얼마나 깊게 박혀 있는지, “원래 이래야 해”, “이 정도는 해야지”라는 기준이

얼마나 자주 나를 옥죄어 왔는지를 하나씩 들여다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실수하면 안 돼.”

“약해 보이면 안 돼.”

“도움을 주는 사람은 흔들리면 안 돼.”


이렇게 살아오면서 정작 나는 내 안의 불안과 두려움을 인정해 본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언제나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고, ‘잘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마음 한편에서는 이런 생각이 조용히 올라왔습니다.


“나를 잘 다스리지 못하면서 어떻게 타인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멘토링을 하면서 나는 분명 행복했습니다. 질문을 보내온 사람의 상황을 떠올리며 글을 쓸 때, 진심을 다해 조언을 건넬 때, “정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라는 답을 받을 때마다 어디선가 조용히 불이 켜지는 듯한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심리학 책을 읽으며 나 자신을 탐구하는 시간은 전혀 다른 감정을 데려왔습니다. 책 속에서 내 어린 시절을 닮은 사례를 발견할 때, ‘당신은 늘 남의 기대에 맞추며 살아오지 않았나요’라는 문장을 읽을 때,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물이 고일 때도 있었습니다.


과거를 탐색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고된 작업이었습니다. 잊은 줄 알았던 장면들이 어딘가에 봉인해 두었다고 믿었던 감정들이 하나둘 꺼내져 빛을 쬐는 순간마다 마치 오래된 흉터를 다시 만지는 사람처럼 조심스럽고 예민해졌습니다.


상담만으로 모든 게 해결되지는 않았습니다. 어느 날은 세상이 조금 더 밝게 느껴졌다가도, 다시 비슷한 패턴으로 돌아가 자기 비난에 빠질 때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변화가 있었다면 이제는 내 사고의 습관을 조금은 더 잘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또 당위형으로 생각하고 있네.”

“또 모든 책임을 나 혼자 지려고 하네.”


마치 내 마음속에서 자동으로 돌아가던 프로그램을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볼 수 있게 된 느낌이었습니다. 상담 과정에서 내가 자주 들었던 말 중 하나는 “그럴 수 있지”라는 문장이었습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별로 와 닿지 않았습니다. 내 귀에는 그냥 “대충 이해합니다” 정도의 의미로만 들렸습니다.


나는 더 논리적인 설명을 원했고, 더 정확한 분석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이 짧은 문장이 얼마나 많은 것을 품고 있는지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그럴 수 있지”라는 말은 전후 사정을 다 따지고, 누가 옳고 그른지를 가르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그 상황에서 그런 감정이 드는 것이 '이상한 게 아니다'라는 허락에 가까웠습니다.


100명 앞에서 발표를 앞두고 온종일 불안해하는 나도, 질문 하나에 사흘을 고민하는 나도, 남들이 어떻게 볼까 전전긍긍하는 나도,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인정해주는 태도였습니다. 처음엔 입으로만 말했습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뭐.”


하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그래도 이러면 안 되지'라며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있었습니다. 독서와 상담, 그리고 심리 독서 모임을 거치며 이 문장은 조금씩 몸으로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불안이 올라올 때, “왜 또 이러지?”라는 비난 대신 “아, 내가 또 이런 상황에서 불안을 느끼는구나”라고 조금 더 부드럽게 말해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문제를 포기한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는 것이 변화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조금씩 믿게 되었습니다.


심리 독서 모임에서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상담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나를 비추어 주었습니다. 누군가는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내며 울컥했고, 누군가는 현재의 직장 스트레스를 털어놓다가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또 어떤 이는 “나는 아직도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깨달았습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불안과 혼란, 자기 비난과 후회 속에서 하루를 버티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그 사실만으로도 조금 덜 외로워졌습니다.


그 모임을 통해 상담의 효력이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다가가는 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심리 이론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해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학 교재로 쓰이는 이론서를 찾아 구입했습니다. 프로이트, 융, 아들러, 인지행동치료, 애착 이론.. 처음에는 낯설고 어려웠지만 조금씩 기본 개념을 익혀가며 읽었습니다.


이론을 공부한다고 해서 당장 내 삶의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습니다. 이론을 공부하는 만큼, 나는 내 마음을 이해하는 언어를 하나씩 더 갖게 되었다는 것.


언어가 생기자, 감정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설명할 수 있게 되자, 감정을 조금 더 다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 저는 예전보다 불안이 올라오는 순간을 조금 더 빨리 알아차립니다.


발표를 앞두고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할 때, 낯선 사람들과 만날 약속이 있는 날 아침, “이 글이 별로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고개를 들 때, 예전에는 그 감정에 휩쓸려버렸습니다. 불안을 느끼는 나와, 그 불안을 바라보는 나 사이의 거리가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사이에 아주 얇은 숨 한 칸이 생긴 것 같습니다. ‘아, 내가 또 불안해하고 있네.’, ‘지금 내 안에서 이런 생각이 떠오르고 있구나.’ 이렇게 말해줄 수 있는 조금 물러나서 나를 바라보는 눈. 심리학에서 말하는 ‘알아차림’, 그리고 ‘배경 자아’라고 하는 녀석입니다.


화면 앞에서 긴장하고 있는 ‘나’ 뒤에서, 조용히 그 장면을 지켜보는 또 다른 ‘나’가 있습니다. 도망치라고 재촉하지도 않고, 억지로 멈추라고 명령하지도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해주는 존재입니다.


“그래, 또 불안해졌네. 그럴 수 있지. 그래도 이번에는 예전보다 조금 덜 흔들릴 거야.”


나는 여전히 불안한 사람입니다. 100명 앞에 서면 손이 떨리고, 새로운 자리에 가면 분위기를 살피느라 눈치부터 보게 됩니다.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그 불안이 나를 모두 집어삼키지는 못한다는 것을.


그리고 누군가를 돕는 일과 나를 돌보는 일이 서로 다른 일이 아니라, 결국 같은 뿌리에서 나온다는 것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남을 돕고자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멘토링을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나 자신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거쳐 저는 조금 더 단단한 어른으로 자라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불안한 마음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책과 상담,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 천천히 배우고 있는 중입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45화] 소명을 찾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