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매일 저녁 10시에 벌어지는 일

by 곽준원

매일 저녁 10시는 제 하루가 살짝 다른 색으로 물드는 시간입니다. 남들은 드라마를 틀거나, 늦은 야식을 고민하는 시간일지 모르지만, 저에게 10시는 알람처럼 다가오는 작은 의식의 시작입니다. 알약 두 개와 물 한 컵,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지는 짧지만 진한 혼잣말의 시간까지요.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오래 이어질 줄 몰랐습니다. 심리학 책을 열심히 읽고, 책을 읽으면 매번 독후감도 블로그에 남기고, 상담도 꾸준히 받으면서 저는 제법 많이 회복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최소한 '예전보다는 낫다'라는 확신은 있었으니까요.


책 속에서 만난 여러 개념들, 상담실에서 나눈 대화들, 그리고 혼자 끄적이던 글들이 저의 정신건강을 조금씩 되살려 주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질문이 조용히 떠올랐습니다.


'정말, 이제 괜찮은 걸까?'


겉으로는 일상을 버텨내고 있었지만, 속에서는 여전히 불안이 쉬지 않고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잠은 자는 것 같았지만 깊지 않았고, 작은 자극에도 마음은 쉽게 요동쳤습니다. 그런 제가 스스로를 '회복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이 어쩐지 거짓말 같았습니다.


그때 아내가 권해준 것이 정신건강의학과 진료였습니다. 그리고 그 진료는 매일 밤 10시에 벌어지는 의식을 제 삶에 가져다주었습니다. 정신과에서 처음 처방받은 약은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와 신경안정제였습니다.


2주치.

“일단 이 약부터 드셔보시죠.”


의사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제 손에 쥐어진 약 봉투는 묵직하게 느껴졌습니다. 첫 항우울제는 시작부터 쉽지 않았습니다. 점심을 먹고 나면 어김없이 속이 울렁거렸습니다. 배가 고픈 것도 아닌데, 헛구역질이 올라왔습니다.


‘기분이 나아지기는커녕 몸이 더 망가지는 것 같은데..’


이런 생각이 들면서도, 2주 동안은 그래도 꾸준히 복용했습니다. '조금만 버텨보자'라는 마음이었지요. 하지만 2주가 지나도 불안은 눈에 띄게 줄어들지 않았고, 몸만 더 지치는 기분이었습니다. 다시 진료실에 들어갔을 때, 저는 그동안 겪었던 부작용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이야기했습니다. 의사는 제 말을 듣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약을 다른 것으로 교체해 주었습니다.


“이 약은 좀 다를 거예요. 한 번 더 해봅시다.”


그렇게 다시 2주.


이번에는 속이 뒤틀리는 느낌은 덜했지만, 하루 종일 설명하기 힘든 불안이 끈처럼 따라붙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이유 없는 초조함이 몸을 감쌌습니다. 회사에서 일을 할 때도 다리를 계속 흔들고 있는 제 모습을 자주 발견했습니다.


무슨 일이 잘못된 것도 아닌데, 마치 곧 큰일이 터질 것만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다시 2주가 흘렀고, 다시 진료실에 앉았습니다. 저는 이번에도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불안이 더 심해진 것 같습니다. 하루 종일 다리도 떨면서 괜히 조마조마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의사의 표정이 약간 굳어졌습니다. 약이 맞지 않는다는 신호였던 것 같습니다. 의사는 망설이지 않고 처방전을 다시 고쳤습니다.


“그렇다면 이 약은 더 이상 드시지 마시고, 이걸로 바꿔봅시다.”


이렇게 몇 차례 시행착오를 거치고 나서야, 드디어 부작용이 거의 없는 항우울제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진단 결과 저는 양극성이 아니라 단극성 우울장애에 가깝다고 했고, 그에 맞는 약을 찾으면서 비로소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항우울제와 수면 유도제는 대개 잠들기 두 시간 전쯤에 먹으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약을 삼킨다고 바로 잠이 쏟아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수면 유도제는 참 묘한 역할을 했습니다.


의식의 검열이 조금 느슨해지는 시간. 머리로는 '이건 쓰지 말자', '이 말은 너무 솔직하다'라고 걸러내던 것들이 슬며시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와 글이 되어버리는 시간.


밤 10시 약을 먹고 나면, 저는 자연스럽게 노트북을 켜거나 노트를 펼치게 되었습니다. 비몽사몽 한 상태에서 쓰는 글들은 문장으로 보면 엉망일 때가 많았습니다. 맞춤법은 자주 틀렸고, 띄어쓰기도 엉성했고, 문장은 중간에 뚝 끊기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이게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이었구나.'


다음 날 아침, 정신이 맑을 때 다시 그 글을 읽어보면 어제의 저는 굉장히 솔직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싫어할까 봐 두려웠다.”

“아버지가 늘 무서웠다.”

“나는 사실 여전히 사랑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이런 문장들이 군데군데 박혀 있었습니다. 평소 같으면 끝없이 수정하거나, 아예 쓰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말들이 약의 도움을 받아 비틀거리는 손끝에서 나와 있었습니다. 물론 이것이 ‘글을 잘 쓰기 위한 방법’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저에게는 내 마음 깊은 곳의 진짜 목소리를 얼핏이라도 들려주는 통로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항우울제와 수면 유도제는 어느새 매일 밤 10시에 반드시 자리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스마트폰 알람이 울리면, 저는 자연스럽게 약 봉투를 찾습니다. 물 한 컵에 알약을 털어 넣고 나면, ‘오늘도 여기까지 잘 버텼구나’ 하는 생각이 잠깐 스쳐갑니다.


약을 먹으면 확실히 숙면을 취하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예전처럼 새벽까지 뒤척이며 천장을 노려보는 시간이 줄어들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그래, 오늘 하루도 한번 살아보자'라는 말이 조금 더 쉽게 나옵니다.


이건 약이 가져다준 분명한 변화였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음이 편안해진 만큼, 몸은 조금씩 무거워졌습니다.


예전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던 체중이 어느 날부터인가 눈에 띄게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허리가 예전 바지에 조금씩 끼기 시작했고, 계단을 오를 때 숨이 더 가빠졌습니다.


거울 앞에 서서 몸을 바라보면 '마음이 나아지는 대신, 몸이 이렇게 변해가는구나' 하는 묘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약을 끊으면 예전 몸을 되찾을 수도 있겠지만, 그 대신 다시 예전의 밤들, 끝없이 이어지던 불안과 악몽, 침대 위에서의 전쟁 같은 시간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선택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래, 조금 천천히 가더라도, 지금은 마음이 먼저다.'


매일 저녁 10시에 벌어지는 일은 그저 약을 먹는 행위 이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시간은 '나는 나를 돌보겠다고 결정한 사람입니다'라고 스스로에게 다시 확인시키는 작은 선언이기도 합니다.


약을 먹는 저 자신을 바라보며, 예전처럼 '왜 이렇게까지 됐을까'라고 자책하는 대신, '여기까지 버티느라 수고했다'라고 말해주려고 노력합니다. 불안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아직도 가끔 이유 없는 초조함이 찾아오고, 잠들기 전 문득 어두운 생각이 스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전처럼 그 감정에 완전히 휘말려 허우적거리는 대신, 이제는 조금 멀리서 그 불안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 또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구나.'

'그래, 그럴 수 있지. 오늘은 약이 있으니까, 조금만 더 쉬어가자.'


그렇게 저는 매일 밤 10시, 알약 두 개와 함께 제 마음의 안부를 확인합니다. 어쩌면 언젠가는 이 약을 서서히 줄이고, 다시 약 없이 잠드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지금의 저는 예전보다 훨씬 더 솔직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매일 저녁 10시에, 조금씩 나아지기 위해 약을 먹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을 부끄럽지 않게 여기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지금은 밤 10시에 알람이 울리지 않습니다. 꽤 오래도록 복용한 약을 모두 의사의 판단으로 끊었거든요. 정신과도 방문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10시가 되면 글을 쓰고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그렇게 하루를 정리하고 나면, 내일도 다시 살아볼 용기가 어느새 조금은 채워져 있을 것이라고, 이제는 조심스럽게 믿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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