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집에 도착해서 아내에게 "오늘 하루는 어땠나요?"라는 질문을 들을 때마다 저는 늘 잠깐 멈칫합니다. 입에서는 "음.. 맨날 똑같지요"라고 대답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살짝 불편함이 고개를 듭니다.
'정말 그게 다였나? 음.. 분명 여러 이슈가 있었는데..'
감정에 관심을 갖고 책을 읽고, 글을 꾸준히 써보면서도 막상 제 일상 속 감정을 바로 알아차리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았습니다. 머리로는 '감정을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라고 알면서도 실제 상황이 발생하는 순간에는 그냥 '짜증', '기분이 별로다' 정도의 말만 떠올랐으니까요.
하지만 한 번 마음먹고 '연습'을 해보면 감정을 알아차리는 타율이 조금씩 올라갑니다. 감정을 분석 대상으로 올려 두고 아주 사소한 하루의 장면부터 꺼내보는 연습을 해보면 점차 익숙해지기도 합니다.
회의실 한가운데서 느꼈던 묵직한 답답함
가장 먼저 떠오른 건 회사 개발 회의 시간의 한 장면이었습니다. 그날도 늘 그렇듯 개발 회의가 열렸습니다. 저는 며칠 동안 고민하여 준비한 문서의 내용을 설명했습니다.
"앞으로 개발할 내용은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해야 하고요. 여기에 필요한 기간은 대략 몇 주 정도 소요될 예상입니다."
말을 마치고 잠깐의 정적. 누군가 제 말을 이어받아 논의를 펼쳐 주길 기대하고 있었는데, 본부장은 개발 문서에서 눈을 떼지도 않은 채 한 마디 툭 던졌습니다.
"제가 원한 건 이런 내용이 아니었어요. 다시 한 다음에 이야기합시다."
그 순간 제 안에서 뭔가가 '쿡'하고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입은 다물려 있었지만, 머릿속에서는 이런 말들이 쏟아졌습니다.
'아.. 또 이런 식이네. 내가 말하면 자꾸 이렇게 지나가는구나.'
그 자리에서는 그저 '기분이 별로다'라고만 느꼈습니다. 예전 같으면 그냥 그렇게 넘어갔겠지만, 그날은 집에 돌아와 노트를 펼쳐 놓고 천천히 그 장면을 다시 꺼내 보았습니다.
감정을 네 칸으로 나눠 보니 보이기 시작한 것들
노트 맨 위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1. 상황
2. 감정 이름
3. 신체 반응
4. 해석과 행동 충동
여러 심리학 책에서 읽었던 '감정 인식 4단계'를 그대로 따라 해 봤습니다. 먼저 상황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써 내려갔습니다.
상황: 회의 중에 개발 제안 아이디어가 무시당하고, 사실상 준비한 내용은 모두 발표하지도 못했다. 미리 보내 놓은 문서를 파악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는 피드백만 있을 뿐이었다.
감정 이름: 처음에는 답답함, 그 뒤로는 억울함, 무시당한 느낌, 살짝 수치심, 서운함
이렇게 감정들을 단어로 붙여 보고 나니까 '기분이 별로다'라는 말로는 도저히 담기지 않는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다음 세 번째 칸에는 신체 반응을 적어 봤습니다.
신체 반응: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열이 올랐고, 목 뒤가 뻣뻣해졌다. 말을 꺼내려다가 입술이 마르는 느낌. 회의가 끝나고 나서는 가슴이 답답해서 깊은 한숨이 나옴.
해석과 행동 충동: 역시 난 팀에서 중요한 사람이 아니다. 여러 번 질의하고 작성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본부장의 의도를 파악하기 어렵다. 그냥 난 개발자로 능력이 없는 사람인가 보다. 본부장에게 한마디 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지만, 나의 인사권을 쥐고 있는 사람이라 결국 그냥 웃으며 넘겼다.
네 칸을 다 채우고 보니까 저의 감정이 꽤 자세한 구조를 가진 '사건'처럼 보였습니다. 단순히 회의가 불편했던 것이 아니라, '존중과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감각이 제 안에 깊게 박혔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감정이 사실은 '존중받고 싶고, 내가 노력한 과정만큼은 제대로 인정받길 원한다.'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날의 저는 단지 예민한 사람이 아니라, '존중, 인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조금 더 선명하게 느꼈습니다.
주말 내내 연락이 없던 날, 마음속에서 일어난 일
또 하나 떠오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어느 주말 약속도 특별한 일정도 없이 혼자 집에서 보내게 된 날이었습니다. 아침에 느긋하게 일어나 늦은 점심을 먹고, 컴퓨터를 켜고, 휴대폰을 잠깐 봤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텅 빈 방처럼 느껴졌습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허전하지?"
문득 휴대폰 화면을 다시 켜 보니 새로운 알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픈 채팅방에서는 사람들이 여전히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는데, 정작 제 개인 메시지 창은 조용했습니다. 평소에 활동적이지 않았던 탓도 있지만, 그날따라 유독 공허한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별일 아니라며 넘기려 했지만, 마음은 살짝 결을 바꾸고 있었습니다.
'굳이 누가 찾지 않아도 되는 존재인가..'
그날 밤 저는 그 감정을 그냥 덮어두지 않기로 했습니다. 다시 노트를 펼쳐 네 칸을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상황: 주말 내내 집에 있었고, 누구에게서도 먼저 연락이 오지 않았다. 컴퓨터를 켜서 대부분의 시간을 유튜브 쇼츠를 시청하고 게임을 하며 보냈다.
감정 이름: 처음에는 심심함, 그 뒤로는 외로움, 고립감, 약간의 우울함, 무기력
신체 반응: 오후가 될수록 몸이 무거워지고, 눕고만 싶었다.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한숨이 자주 나왔다.
해석과 행동 충동: 나는 생각보다 그 누구에게도 필요 없는 사람 같다. 내가 연락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누군가에게 연락하고 싶었지만, 괜히 부담 줄까 봐 포기했다. 컴퓨터를 오래 하고 난 후에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 놓고 보니까 이건 그냥 '심심한 주말'이 아니었습니다. 한 사람의 마음이 '사람과 연결되는 관계 욕구'를 간절히 드러내는 장면이었죠. 그리고 제 감정은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다. 서로의 이야기를 편안하게 나누고 싶다'라고 말하는 듯했습니다.
이걸 깨닫고 난 뒤 저는 작은 결정을 하나 내렸습니다. 누군가가 먼저 연락해 주기를 기다리기만 하지 말고, 내가 느끼는 욕구를 인정하고, 먼저 안부를 물어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날 밤 정말 오랜만에 친구에게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오랜만에 연락하네~ 잘 지내?'
생각보다 따뜻하고 반가운 답장이 돌아왔고, 그 순간 저는 조금 덜 외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외로움을 완전히 없앤 건 아니지만, 그 감정을 '신호'로 받아들였을 때 제가 할 수 있는 선택이 하나 생긴 셈입니다.
감정을 적어 보는 작은 습관이 가져온 변화
이런 식으로 몇 주 정도, 하루에 한 번은 '감정 인식 4단계'를 써 보는 연습을 이어나갔습니다. 어떤 날은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어떤 날은 가족과 나눈 대화를, 어떤 날은 그날따라 괜히 마음이 가라앉았던 이유를 천천히 곱씹어 보았습니다.
나름 놀라운 사실은 시간이 지날수록 감정에 휩쓸리는 시간이 조금씩 단축된다는 점이었습니다. 물론 느끼지 못하는 감정을 억지로 적으려고 애쓸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작은 습관으로 예전에는 '기분 별로다'라는 느낌이 하루 종일 이어졌다면 요즘은 스스로에게 감정을 묻는 순간이 생겼습니다.
'잠깐만.. 지금 그 상황에서 내가 어떤 감정을 느낀 거지?'
그러면 자동으로 머릿속에서 네 칸이 떠오릅니다. 발생했던 상황은 무엇인지, 내가 느끼는 감정의 이름은 무엇인지, 몸은 어떻게 반응했는지, 나의 해석과 당장 하고 싶은 행동은 무엇인지 말이죠.
물론 여전히 완벽하게 감정을 다루지는 못합니다. 느꼈던 감정이 어떤 단어로 표현되는지 알기 어려워 단어장을 뒤적거리기도 합니다. 여전히 불편한 말을 들으면 속으로 열 번쯤은 되뇌고, 오래도록 연락이 오지 않으면 살짝 쓸쓸해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는 저의 감정을 '검열'하기보다는 '지금 내 마음이 이렇구나'라며 조금 더 부드럽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를 마무리하는 한 줄의 질문
감정을 인식하는 연습은 거창한 수행이 아니라, 그저 하루를 마무리하며 자신에게 조용히 던지는 질문 하나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매번 깊게 생각하며 침잠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오늘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언제였는지, 그때 나는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를 상황, 감정 이름, 신체 반응, 해석과 충동이라는 네 가지로 한 번 적어보는 겁니다.
처음에는 귀찮고, 몇 줄 쓰다가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일주일 정도만 이어 가도 마음이 조금씩 달라집니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 이런 식으로 상처를 잘 받는 사람이구나', '나는 존중과 관계, 유대감을 생각보다 많이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구나'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순간, 감정은 더 이상 나를 휘두르는 폭풍이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 알려주는 나침반이자 삶의 방향성이 됩니다.
오늘 밤, 잠들기 전 "나는 오늘 ___한 상황에서 ___라는 감정을 느꼈고, 그 감정은 나에게 ___라는 메시지를 전해 주었다"라는 한 문장에 답변하려고 노력한다면 내일의 나를 조금 더 잘 이해하는 출발점이 되어줄 것이라 믿습니다.
감정은 순간에 지나가지만, 그 순간을 붙잡아 언어로 남겨 두면 그것은 더 이상 '기분'이 아니라 나를 알아가는 성찰의 기록이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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