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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문제집을 훔쳤다

정의란 무엇인지, 여전히 헷갈립니다

by 구황작물

주변에 질풍노도의 청소년이 없어서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겠다만, 20여 년 전 내가 단발머리 중학생일 때는 꽤 많은 아이들이 도둑질을 했다. 정의감에 불타오른 친구들은 악덕으로 부를 쌓은 이들의 돈을 훔쳐 어려운 친구들에게 골고루 나눠 주며 새로운 사회 정의를 실현했다.


… 는 개뿔. 홍길동 뺨치는 대도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다. 머리핀이나 껌, 기껏해야 포스트잇 정도의 좀도둑질이 판을 쳤다. 집안 형편이 어렵거나 불량한 아이들의 전유물이었던 것도 아니다. 타의 모범이 되던 우리 반 1등이 내게 했던 말을 또렷이 기억한다.


“요즘 어느 바보가 껌을 돈 주고 사 먹어?”


멀리서 찾지 말자. 그 바보, 바로 여기 있다.


딱히 도덕관념이 투철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내 안엔 예나 지금이나 못된 악마가 수백쯤 득실거리고 가끔 표출되기도 한다. 다만 나는, 만일 발각될 시 집에서 쫓겨날 것을 굳게 확신했다. 곱게 쫓겨나면 다행이지, 엄마에게 머리털을 다 뜯기고 만신창이가 된 상태로 집 밖을 배회할 것을 생각하면 멀쩡한 머리털까지 쭈뼛 섰다.


친구들이 문제집을 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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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친구 둘과 함께 서점에 갔다. 가는 길에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다. 친구들이 문제집을 훔치려고 작당 모의를 했던 것. 나는 절대 그 일에 동참할 수 없다고 말했고, 겁 많고 고지식한 나를 아는 친구들은 서점 안에서는 아예 따로 다니며 내 곁에도 오지 않을 것을 약속해주었다.


더 근사한 사람이었다면 친구들을 바른 길로 설득했겠지만, 난 그럴 능력이 없었다. 이 정도의 소외감을 이겨내는 것만 해도 나에겐 모든 에너지가 필요했다. 터덜터덜 서점에 들어선 나는 당시 유행하던 유달리 긴 제목의 시집들을 구경했고, 친구들은 목표물로 향했다.


한참 책을 읽다 고개를 들어보니 친구들이 보이지 않았다. 부랴부랴 나오는데 어디 있었는지 보이지 않던 친구들이 내 곁으로 와 팔짱을 꼈다. 그저 웃으며 함께 출구를 빠져나가는 순간, 올 것이 왔다. 삐-하는 경보음이 울린 것이다.


친구들의 가방에서 문제집이 나왔다. 우리는 서점 직원에 의해 사방이 책으로 둘러 쌓인 비좁은 창고로 끌려가다시피 했다. 나는 왕따가 될 것을 불사하고 사실 그대로, 나의 결백을 주장했다.


“전 아무것도 훔치지 않았어요. 보내주세요.”


그날, 책등으로 머리를 사정없이 맞은 건 나 하나다.


“네가 제일 나빠. 넌 양심도 없고, 의리도 없냐?”


문득, 얼굴도 가물가물한 그 아저씨에게 자필 편지라도 쓰고 싶다. 아저씨, 그때 그 소녀는 정말 도둑질을 하지 않았답니다. 아저씨에게 의리란 무엇입니까? 저에겐 친구들을 계도할 힘이 없었습니다.


내가 본보기로 맞았기 때문인지 뒤이어 결백을 주장하는 친구들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아저씨는 당장 집 전화번호를 내놓으라고 말했다. 나는 결단코 그 일만은 막아야 했기에 그럴 수 없다고 강하게 저항했다가 몇 대 더 맞았다. 친구 하나가 결국 전화번호를 댔다.


silhouette-2480321_1280.png @pixabay

택시를 타고 헐레벌떡 오신 친구 어머니는 딸에게 정말 네가 훔쳤냐고 물었다. 친구는 그러지 않았다고, 아까 다른 학교 애들과 잠깐 시비가 붙었는데, 그 애들이 넣어 놓은 것 같다고 말했다. 내 눈에도 연기가 약간 어색했지만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어머니는 격분하며 직원에게 따지기 시작했다.


“이봐요! 지금 애가 아니라고 하잖아요. 훔친 게 아니라고 하잖아요. 봤어요? 당신이 봤냐고요? 보지도 않았으면서 왜 사람 말을 안 믿어요? 이렇게 비좁은 데 가둬 놓고 몰아세우면 어떡해요? 내 새끼 상처 받으면 그건 어떡할 거예요? 죄 없는 애 도둑으로 몰아넣으니 속이 시원해요?”


지금까지도 어머니의 기세를 잊을 수가 없다. 일동 모두 당황한 가운데 어머니는 안 되겠다고, 경찰서에 가자고, 모두 다 같이 가서 잘잘못을 따져 보자고 주장했다.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몰랐는지 아저씨는 우리를 황급히 돌려보냈다. 어머니는 여기서 물러서지 않고 아이들에게 사과하라고 주장했지만, 우리의 만류로 그 일은 일단락되었다.


우린 그날 친구 어머니가 사주신 떡볶이와 김밥을 배 터지게 먹었다. 어머니는 살다 보면 별 일이 다 있는 거라며 우리를 위로했다. 떡볶이는 맛있는데 눈물 콧물이 쏟아졌다. 집에 돌아와서도 내내 착잡했다. 나를 콕 짚어 때린 서점 아저씨가 미운데 불쌍했고, 친구가 부러웠고, 뭔가 찜찜한데 할 말도 없고.


가끔, 일 없이 그때가 떠오른다. 나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 친구는 좋은데 도둑질은 싫었다. 소외되긴 싫은데 동참하기도 싫었다. 의리와 정의감을 두루 갖춘 소녀라면 어떻게 했을까. 아, 난 그런 소녀가 아니니 생각해봤자 소용없구나.




...


작은 반전. 그 뒤 며칠 동안 친구와 연락이 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딸을 믿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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