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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황작물 Jul 15. 2021

처음 만난 남자가 내 앞에서 비트박스를 했다

2010년 11월 24일, 한 남자를 만났다. 뚜껑이 덮인 아메리카노의 입구 부분을 겨냥해 후후- 열심히 바람을 불어가며 식히는 이 남자. 아니, 그렇게 급하면 뚜껑을 열든가. 우리는 이런저런 대화를 주고받았고, 찰나의 공백이 생기자 그는 처음 만난 내 앞에서 비트박스를 선보였다. 붐 치키 붐 치키 붐붐 칙칙칙.


얼굴이 달아올랐다. 뭔데 이 남자는 이렇게 태연한가. 내가 아무리 힙찔이여도 이건 영 아니다. 하지만 단전 깊숙한 곳에 있는 예의까지 끌어올려 손뼉 치는 시늉을 했고, '신기하다'고 칭찬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


그러자 그 왈,

". 칭찬해  사람 처음이에요. 다들 하지 말라고, 창피하다고 욕하는데."


... 뭐지. 뭔가 당한 기분.


그와 나는 소개팅으로 만났다. 그때 그의 몸은 70kg이 되지 않아 알량한 내 기준에 앙상했다. 나는 마른 것엔 필시 이유가 있다는 못된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나 못지않은 먹성을 자랑했다.


우리는 양꼬치와 맥주로 1차, 술국에 소주로 2차, 파전에 막걸리로 3차를 하고, 집에 가기 전엔  햄버거로 해장까지 마치고 헤어지는 데이트를 반복했다. 나는 술과 먹거리, 대화가 넘쳐나는 이 연애가 너무도 행복해 마른 사람에 대한 편견을 모두 버렸다.


반년도 채 지나지 않아 그의 몸은 100kg를 넘겼다.

... 뭐지. 뭔가 낚인 것 같아.


알고 보니, 그는 소아비만이었고 생애 내내 커다란 덩치로 살아왔다고 한다. 직접 확인한 최대 무게는 120kg이지만, 체중계의 눈금이 한 바퀴 휙 돌아간 뒤부터는 한동안 재지 않았기에 어쩌면 그 이상이었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의 인생을 말하려면 한편에 체중 그래프도 함께 그려야 할 정도로, 그에게 몸은 평생의 화두였다고 한다. 그러니 이십 대 내내 피나는 다이어트를 반복했다고. 그 결과, 가장 성공적으로 본인이 원하던 몸을 만들었던 때, 초등학교 때 이후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67kg이라는 숫자에 도달했던 때, 나를 만나게 된 것.


그렇다. 나는 그의 요요를 부채질하고, 인간 승리를 도루묵으로 만든 셈. 단 5kg도 쉽게 줄이거나 찌울 수 없는 나는 묘한 책임감과 미안함을 느꼈는데, 진상을 알게 된 후 이렇게 물었다.


"아깝지 않았어? 다시 다 찔 거라는 거 몰랐어? 너 쉽게 찌는 체질이란 거 알았을 거 아냐. 먹으면서 신경 쓰이지 않았어? 왜 그랬어? 나한테 말을 좀 하지 그랬어."


이 질문에는 내심, 나랑 노는 게 그렇게 좋았어? 내가 그렇게 좋았어? 어떻게든 나 꼬셔보려고 한 거지? 등등이 담겨 있었는데, 그는 아련한 눈빛을 하고서 답했다.


"그때 참... 맛있었어."


... 뭐지. 뭔가 쎄한 이 기분. 그는 지금 나와 함께 산다. 여전히 몸무게와 투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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