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황작물 Jul 13. 2021

'더치페이'를 배우지 못한 나, 이상한가요

관대하기라도 하면 좋겠습니다

몇 년 전, 친구가 어느 게시판에서 재미있는 글을 봤다며 전해 주었다. 그 내용을 옮기면 '대략' 이렇다. 


"며칠 전에 내가 떡볶이가 먹고 싶었어. 그런데 혼자 먹긴 좀 그래서 동네 친구를 불렀지. 그런데 친구가 자긴 떡볶이가 먹기 싫다고, 어묵을 먹겠대. 그래서 분식집에 가서 어묵 이천 원어치랑 떡볶이 사천 원어치를 시켰어. 친구는 정말 딱 어묵만 먹더라고. 


다 먹고 계산하려고 하니까, 친구가 딱 이천 원을 내는 거야! 이게 말이 돼? 나는 당연히 1/n 할 거라 생각했거든. 친구 사이에 그게 당연한 거 아냐? 난 사실 돈도 삼천 원 밖에 없었어. 그래서 친구한테 이런 법이 어딨냐고 했더니, 걔는 나보고 이상하대. 자긴 떡볶이 입도 안 댔다 이거지!! 


형님들, 걔가 이상한 거지? 그렇지?”


댓글에는 네가 옳다, 그르다, 친구가 옳다, 잘못됐다 하는 의견이 분분했고, 그 와중에 눈에 띄는 베스트 댓글은 이거였다고.

니들 제발 만나지 마…. 그냥 절교해….



이 이야기를 들은 나는 폭소를 터뜨렸는데, 문득 궁금해지기도 했다. 사람들은 언제부터 소위 '더치페이'를 배우는 걸까? 또, 총액의 1/n 혹은 내가 먹은 것의 각각 계산, 어느 것이 더 상식으로 받아들여질까? 


나 역시 학창 시절 친구들과 어울려 떡볶이깨나 먹으러 다녔는데, 더치페이를 하진 않았다. 먹으러 가기 전엔 교복 주머니를 뒤져 주섬주섬 갹출을 했지만, 늘 서로 같은 금액은 아니었다. 그런데 대학을 가니 어떤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더치페이를 실천하고 있었다. 


나는 그게 어색해서... 호구 짓을 꽤 하고 말았다. 한 학기 내내 수업이 끝난 후 내가 음료를 대접(!)한 친구도 있는데, 정말이지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그녀는 동작이 느렸고, 나는 쓸데없이 빨랐을 뿐. 


얼마 전, 식당을 운영하던 친구가 전해 준 이야기도 인상 깊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요즘 아이들'은 계산이 더 확실하다고. 여럿이 고기와 찌개, 냉면 등등을 잘 시켜 먹은 뒤엔 이런 진풍경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고깃값 n분의 일 하고, 넌 아까 공깃밥 먹었으니까 천 원 더하고, 넌 아까 시킨 콜라 천 원, 넌 냉면 먹었으니 플러스 사천 원, 그래서 넌 만천 원, 나 만 오천, 넌 만 사천 원."

"(누군가 이의 제기) 아냐, 나 콜라 얘랑 같이 먹었어."

"아, 그래? 그럼 넌 만 오백 원, 쟨 만 사천오백 원."


뭐, 이런 일이 허다하다는 이야기.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무척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처음 저 얘기를 들었을 때는 남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나 역시 그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우연히 참여하게 된 모임에서 나를 제외한 몇몇의 멤버들이 술자리를 가진 모양이었다. 이튿날, 단톡방에는 영수증과 함께 각각 내야 할 금액이 올라왔다. 그 금액은 다 달랐으며, 백 원 단위까지 디테일했다. 


난 참석하지 않았으니 상관없었지만 언뜻 본 금액이 하도 이상하여 눈길이 갔다. 알고 보니, 생맥주는 각자 마신 잔 수를 헤아려 계산하고, 안주값은 n분의 일로 나눠 산출한 것. 그러니까 그들 역시 친구가 말한 ‘요즘 아이들'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요즘이고 옛날이고 떠나서, 우리의 세계는 이렇게 분리되어 있던 건가. 나는 나대로 이상한 나라에서, 그들은 그들대로 이상한 나라에서, 이렇게 각자가 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먹은 것만 칼 같이 계산하기. 어찌 보면 억울한 사람 없이 깔끔한 것 같고, 어찌 보면 조금도 손해 보지 않으려는 것 같아 스산하기도 하다. 하지만 나 역시 살다 보니 그 편의성에 손을 들어주고 싶을 때가 많다. 문제는, 내가 그에 관한 긍/부정 어떤 생각을 갖고 있든지 간에, 여전히 어색함을 느낀다는 거다. 


아예 다수의 사람이 다 같이 더치페이를 하면 자연스럽게 룰을 따르게 되는데, 단 둘일 경우. 나는 계산대 앞에 서는 짧은 시간 동안 민망함을 느낀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계산하려고 하거나 1/n을 정확하게 정리하는 것일 텐데, 어영부영 그렇지 못한 날이 많다. 


나는 왜 돈에 관대하지도 못한 주제에 손이 빠른가! 태연하게 돈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나의 배배 꼬인 천박함도 원망스럽다. 


호구 짓을 몇 번 했더니 호구만은 되고 싶지 않은 것도 문제다. 내 지갑이 열려 있을 때는 한없이 다정했던 누군가가, 내가 지갑을 닫게 된 순간 남이 되어 버리는 것을 겪은 바 있다. 처음엔 지난날의 돈과 시간이 아까웠지만, 나중으로 갈수록 나라는 인간이 만날 가치가 없는 건 아닐까, 심각한 고민에 빠졌더랬다. 


내가 단지 쉽게 열리는 지갑이어서 만난 거고 인간적인 매력이 하나도 없으면 어쩌나. 바꿔서 생각해 보면, 그건 상대에게도 못할 짓 아닌가. 돈 때문에 이어지는 관계라니. 아, 말해놓고 보니 참으로 부끄럽다. 가난한 인간이 생각하기엔 참으로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닌가! 


관대한 인간이 되기란 죽었다 다시 깨어나야 할 일처럼 아득히 느껴지니, 태연히 돈을 말하는 기술. 그것을 배우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할머니는 손녀사위에게도 밥을 차리라 하셨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