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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황작물 Dec 28. 2022

까치가 되고 싶다

제비도 좋습니다. 은혜 갚은 새들이니까요.

엄마는 자녀들이 성인이 되자마자 이혼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녀의 최종 선택. 집을 나갔다. 아빠는 실종 신고를 하려 했지만 언니가 제지했다. 그럴 일이 아니라는 거였다. 아빠는 언니에게 물었다. 너, 뭐 알고 있지. 언니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맹세했다. 단지 엄마의 의사는 확실히 알겠다고. 왜 그걸 모르냐고. 


머지 않아 집은 엉망이 되었다. 설거지도, 빨래도 해본 적 없는 뻔뻔한 이들만 남았다. 적대감이 넘쳐났다. 특히 아빠를 향해. 크게 표출되는 일은 없었지만 아빠의 권위 같은 것은 한줌도 남지 않았다. 


어느 날, 아빠는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집에 당신의 여동생, 나의 고모를 불렀다. 언니는 고모가 온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이꼴저꼴 다 보기 싫다며 서둘러 외출했다. 나도 따라나가려 했지만 아빠 간곡히 말하길, 넌 제발 가지 마라, 같이 있어다오. 


고모가 오자, 아빠는 앓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당신의 여동생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애들 엄마가 사라져서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른다고. 집은 엉망이 되었고, 아이들은 나를 무시한다고. 애들 엄마가 해도해도 너무하지 않냐고. 


나는 사납게 되받아쳤다. 지금까지 아빠가 한 행동을 생각하라고. 엄마가 얼마나 참고 살았냐고. 나 같으면 나가도 골백번은 나갔을 거고, 여태껏 버티지도 못했을 거라고. 지금 그런 말을 왜 하는 거냐고. 


나의 엄마 말하길, 고모는 평생 시누이 노릇 같은 건 한 적이 없다. 하지만 그날, 고모는 악랄한 시누이를 자처했다. 고모는 내게 말했다. 너, 네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구나. 고모는 그날, 내 엄마의 부도덕함을 말했다. 부모 공경이나 예의 같은 것이 아닌, 수위 높은 이야기들. 


나는 꺼이꺼이 울었다. 우는 내가 싫지만 우는 거 말곤 뭘 해야 할지 몰랐다. 얼마 후 고모는 떠났고, 아빠는 불쌍한 홀애비 같은 표정을 지었다. 집에 돌아온 언니는 별일 없었냐고 물었다. 응, 별로. 언니는 아빠 험담을 했고 나는 말했다. 아빠도 속 사정이 있지, 엄마만 있겠냐? 언니는 별말이 없었다.


두고두고 억울했다. 이가 갈렸다. 고모는 왜 내게 그런 말을 했나. 나는 왜 그런 것까지 알아야 했나. 왜 내가 부모의 치부를 남의 입을 통해 들어야 하나. 무엇을 위한 것인가. 내가 부도덕한 인간들의 자녀라는 상처 말고, 남는 게 뭔가.


동시에 나는, 나를 경멸했다. 몇 년에 한 번 볼까 말까한 고모가 대수인가. 왜 나의 엄마를 세 치 혀로 메다꽂는 것을 들으면서도 아무말도 하지 못했나. 왜 그 앞에서 눈물만 흘렸나. 나는 대체 뭐하는 인간인가. 쓰레기인가. 내 부모를 감싸지도 못하는 게 숨 쉴 자격은 있나. 


어영부영 세월이 흘렀다. 나는 직장인이 되었다. 그 사이 아빠는 귀향했고, 우리 자매는 엄마와 함께 살게 되었다. 어느 날, SNS로 사촌오빠와 연락이 닿았다. 고모의 아들. 어릴 때는 스스럼 없이 어울려 놀았지만, 성인이 된 이후 따로 만난 적은 없다. 오빠는 가볍게 술 한 잔 하자고 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나가 술을 마셨다. 


그날 나는, 진정한 쓰레기가 되었다. 술에 잔뜩 취한 나는 말했다. 고모는 나쁜 년이야. 오빠는 웃었다. 나는 계속 떠들었다. 고모는 비치라고, 비치!!! 오빠가 물었다, 비치가 뭐야. 나는 내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던 사전적 의미를 그대로 읊었다.


네이버 사전



오빠는 인사불성이 된 나를 집에 바래다줬다. 엄마는 오빠를 반기면서도 민망해했다. 여전히 정신 없는 내가 말했다. 엄마, 고모는 나쁜 년이야! 엄마가 오빠를 향해 말했다. 미안하다, 쟤가 왜 저런다니. 오빠가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오늘 하루종일 들었어요. 취해서 그러는데요 뭘. 나는 그런 대화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엄마는 나 때문에 민망해서 혼났다고 했다. 오빠에게 택시비라도 꼭 주고 싶었는데 현금이 하나도 없어서 그냥 보낸 게 계속 마음에 걸린다고, 내게 어떻게든 보답을 하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물었다. 왜 고모가 나쁜 년이야? 나는 답했다. 몰라, 취해서 헛소리 한 거지 뭐. 엄마는 말했다. 너가 정말 나쁜 년이야. 아무리 취해도 그렇지, 어떻게 자식한테 그런 말을 하니. 못되먹었어. 내가 널 잘못 키웠어.


얼마 뒤, 삼촌으로부터 그날 오빠의 늦은 귀가로 새언니(오빠의 아내)가 화났고 걱정했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연락을 해야 하나, 뭐라고 해야 하나. 나는 골백번도 더 망설였지만 하지 못했다. 그저 오랜만에 만난 사촌동생이 알고 보니 상종 못할 주정뱅이였다고, 오빠가 기억하길 바랐다. 딱 그렇게만 기억해주기를.   


오빠 덕분에, 나는 고모에 대한 가슴 속 응어리를 완전히 지울 수 있었다. 오빠에게, 그리고 고모에게도 미안하고 죄스러울 뿐, 어떤 한이나 울분, 미움도 남지 않았다. 내가 그런 걸 가질 자격이나 있나. 


어쩌면 그 옛날, 우린 아빠가 짜놓은 장기판의 말들이었던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모진 남편을 만나 평생 고생만 한 고모는, 늘 나의 엄마를 깊이 공감하고 연민했지만 그날 그 자리에서는, 그런 역할밖에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자기연민에 빠져있던 아빠가 그 모든 것을 치밀하게 계획한 건 아니었겠지만. 


그 옛날의 기억은 잊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주정뱅이가 되어 떠들었던 그 다음의 일은 잊을 수 없다. 오빠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보답할 수 있길 바랐다. 그렇다고 갑자기 찾아가 그날의 일을 상기시킬 수는 없었다. 자연스럽게 보답하자. 좀처럼 만날 일은 없었고, 고민만 하다 십여 년이 흘렀다. 


그 오빠가 하필, 소곱창집을 개업했다. 


나는 몇 해 전부터 비건을 지향하고 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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