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 년 전 남편, 지금은 고객입니다

by 구황작물

엄마는 프로 N잡러다. 그녀의 하루를 들여다보면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다. 그래서 부자가 되었느냐고? 열심히만 하면 다 된다는 것은 가진 자의 헛소리임을, 삶은 그리 만만치 않다는 것을, 나는 엄마를 통해 배운다. 동시에, 삶이라는 녀석이 아무리 잔인하더라도 절대 무너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현재 엄마는 작은 학원을 운영하고 있으며, 손님 앞에서 진땀을 흘리는 초보 부동산 중개보조원이기도 하다. 주말이면 친구의 밭에서 주인보다 더 땀 흘려 일하는 농부가 된다. 또한, 누구도 못 말릴 열정을 가진 열혈 다단계 판매원이다.


엄마가 다단계에 몰두한 뒤, 가족이 모여도 대화를 이어가기가 어려워졌다. 무슨 말을 꺼내든 엄마가 낚아채 다단계 회사의 홍보로 마무리하기 때문이다. 가령, 누군가 코감기에 걸렸다고 하면 그녀는 얼른 미용티슈를 꺼내 들고 보드라운 품질을 자랑한다. 반찬이 맛있다고 하면 맛간장을 손에 들고 뿌듯한 표정으로 말한다. 딱 이거 하나만 바꿨을 뿐이라고. PPL도 아닌, 직접 광고가 따로 없다.


그녀의 눈에는 만나는 모든 사람이 고객으로 보이는 게 분명하다. 엄마는 내게도 물건을 강매했다. 나는 예의 그 보드라운 미용티슈와 두루마리 휴지 등 몇 가지 물건을 샀고 필요한 것이 생기면 또 사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엄마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어떻게 아등바등 살려고 노력하는 어미를 도우려 하지 않느냐며 강하게 섭섭함을 표시한 것이다.


나는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사야 속이 시원하겠느냐고, 자식한테까지도 물건을 팔아서 이윤을 남겨야겠느냐며 지지 않고 대거리를 했다. 엄마를 걱정하고 진심으로 응원하지만, 쓰지도 않을 물건을 사라고 하는 것은 부당하게 느껴져 받아들일 수 없었다. 때마다 내 형편이 허락하는 만큼 용돈을 드리지만 그것과는 다른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 혼자 사는 시골에 내려갔다가 기겁을 하고 말았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내 눈에 보인 것은 무더기로 쌓여 있는, 아직 포장을 뜯지도 않은 물건들이었다. 나는 상자들을 한쪽으로 밀면서 발걸음을 내디뎌야 했다. 아빠가 정리정돈과 거리가 먼 사람이기는 하나 이 정도는 아니었다.


물건들을 살펴볼수록 가관도 아니었다. 물티슈와 칫솔, 각종 세제, 휴지, 하다 못해 오메가3는 그렇다 치자. 일흔 살의 할아버지에게 '이너콜라겐'이 웬 말인가.


pill-gaa0d197d2_1920.jpg @pixabay


물건의 출처는 분명했다. 엄마는 결국 아빠에게도 물건을 팔았던 것이다. 자신의 생계를 온전히 감당하지 못해 시시때때로 자식들에게 손을 벌리는, 늙고 병든, 이십여 년 전 헤어진 전 남편에게 말이다.


아빠는 불과 몇 달 전에도 자동차 보험료를 낼 돈이 없어서 전전긍긍했고 결국 그 돈을 메워 준 것은 자식들이었다. 이번엔 언니였지만, 나와 동생 역시 번갈아 그의 물망에 오르곤 한다. 그런 그에게 엄마는 몇 년이 지나도 쓰지 못할 물건과 영원히 쓰지 않을 물건들을 팔아넘긴 것이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때가 마침 김장철이었다. 아빠는 매해 그래왔듯이, 엄마에게 햇고춧가루와 김장용 배추를 넉넉히 보냈다고 했다. 여태 궁금해한 적이 없지만 문득 호기심이 생겨 값은 제대로 받았는지 물어보니 그의 대답,

"니 엄마한테 돈 받은 적 한 번도 없는데?"


억장이 무너질 것 같았다. 건강하지도 못한 몸으로 노인이 되어버린 아빠의 노동은 보는 것만으로도 고되다. 어떻게든 생계를 유지하고 싶다는 욕심 때문인지 아빠는 매해 혼자서 감당하지도 못할 양의 농사를 짓고, 땡볕 속에서 그 일을 돕는 것은 나와 남편이다. 나는 부아가 치밀어 말했다.


"누가 인심을 쓰래? 고추 농사 아빠 혼자 했어? 심고 따고 말리고 우리 다 같이 했잖아. 8시간씩 왕복하는데 아빠가 기름값을 준 적이 있어, 밥을 한 번 해준 적이 있어? 우리 노동력은 공짜야? 우리도 쉬고 싶고, 하고 싶은 일도 있는데 포기하고 오는 거잖아, 아빠 자립하라고! 근데 그걸 막 거저 퍼 줘? 우린 뭐가 돼? 나는 맨날 허공에 삽질하는 거야? 어?"


아빠가 히죽 웃으며 말한다.

"그래도 니들 엄마니까."


나는 안 해도 될 말들이 튀어나가려는 것을 애써 속으로 삭인다. 그럼 진작 좀 잘해주지 그랬냐고, 왜 시도 때도 없이 부정을 저질러서 엄마 인생을 파괴하고 자식들까지 위태롭게 했냐고, 왜 이제서 안 해도 될 일을 하면서 사람 속을 뒤집어 놓냐고 말이다. 나는 한때 부부였던 이들의 마음을 예나 지금이나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 말이다.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있어 금세 무색해지지 뭔가. 내가 엄마에게 아무런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김장 김치를 얻어먹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나는 격양되었던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아빠에게 말했다. 고춧가루와 배추는 잘 보냈다고, 계속 보내시라고.


눈앞에서 먹고 먹히는 야바위판이 벌어지는 것 같은데, 누가 야바위꾼인지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