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중이의 진짜 성격은 무엇일까요
흔히 운전을 하면 그 사람의 숨어 있던 '진짜' 성격이 드러난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남편을 부르는 별명은 많고 많지만 그중 늘보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매사에 느긋하고 동작도 느리다. 나무늘보는 생존을 위해 느리게 적응한 동물이라는데 그는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을까. 그를 지켜보노라면 느리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가 있는 것만 같다.
'저 걸음은, 저 동작은, 저 속도는 무슨 뜻이지? 하기 싫다는 걸까? 무슨 의미가 있을지도 몰라!'
걸음도 동작도 빠른 나는 한때 괜한 고민에 휩싸였을 정도다. 물론 이제 안다. 그는 그저 제 속도에 맞게 움직일 뿐이라는 것을.
함께 산책을 할 때면 나도 그 느긋함과 여유로움을 배우고 싶어서 한껏 느리게 걷는다. 아무리 산책이라지만 어떻게 이 속도로 걸을 수 있을까 내심 생각하며. 그러나 그때마다 여지없이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
"우리 조금만 천천히 가자."
나는 여전히 그의 느림을 따라잡을 수 없다. 십수 년을 함께 했는데도.
여자가 외출 준비에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편견도 우리 커플이 와장창 깨고 있다. 내가 화장을 하지 않기 때문도 있지만 그 역시 노메이크업인 건 매한가지. 그러나 나는 모든 착장을 마치고 그를 기다린다. 그가 양말을 꺼내고 신고 괜히 말을 걸고 웃고 거울을 보고 다시 거울을 보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며.
운전을 할 때도 다르지 않다. 그는 이십여 년 경력의 베테랑 운전자로서 교통 흐름을 방해하는 일은 없지만 과속을 하는 일도 없다. 덕분에 그가 운전하는 차를 타면 불안할 일 없이 편안한데, 아주 가끔은 그럴 때도 있지 않은가. 시간이 빠듯한데, 마침 도로에 차가 하나도 없을 때! 그 유혹적인 순간.
그럴 때도 그는 늘보 그 자체다. 텅 빈 도로는 오히려 느림을 부추긴다. 맞출 흐름도 없으니 50km/h 도로에서 30km/h로 속도가 떨어질 정도. 내가 닦달을 하면 어울리지 않는 속도를 내 나를 잠시 놀라게 하지만 걱정할 것 없다. 신호를 받아 정지하고 나면, 다시 출발할 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제 속도로 돌아와 있다.
그에 비하면 나는 좀 빠르다. 초보 주제에 위험한 짓은 할 수도 없고 할 생각도 없지만, 허용된 범위 안에서는 그렇다. 고속도로 1차선은 추월차선인데 이걸 아는지 모르는지, 천천히 달리며 흐름을 방해하는 차들을 보면 답답해진다. 남편은 웬만하면 주행차선에서 느긋하게 가길 원하지만 나는 '고속'도로를 이용하고 싶다.
이런 걸 보면 평소 성격과 운전할 때의 성격이 다르지 않다. 영락없이 같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면도 있으니, 바로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다.
남편은 앞서 가는 차가 이상 행동을 보이면, 가령 오른쪽 깜빡이를 켠 채 왼쪽으로 들어오려고 하거나, 갑작스럽게 브레이크를 밟거나, 차선을 지나치게 침범하면, 가차 없이 경적을 누른다. 내가 운전을 하고 있을 때도 빨리 경적을 누르라고 다그치고 내가 따르지 않으면 본인이 누르기도 한다.
나는 그의 이런 면에 어색함을 느낀다. 그는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조처라고 하고 나 역시 일면 동의하지만 굳이 배우고 싶진 않다. 대개 내가 피하거나 잠시 기다리면 될 일이고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남편은 잘못된 것을 알려야 상대도 배울 수 있다고 하지만, 나는 사람은 남의 지적이 아니라 스스로 배우기 마련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나는 도로 위 평화가 지속되기를 바란다.
평소 성격을 떠올리면 그와 내가 정확히 바뀌었다. 우리 중 다른 사람의 실수에 관대한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코 그다. 예민하고 옹졸해 화를 품는 것은 나이지, 그가 아니다. 어디서나 큰 소리 뻥뻥 칠 위치였던 것은 아니었기에 참고 또 참은 적도 많지만 그럴 때면 곧 병이 나곤 했다. 그런데 도로 위에서의 나는 퍽 너그러워지는 것이다. 큰 스트레스도 없이.
나 역시 베테랑 운전자가 되면 바뀌게 될까. 초보라서 부릴 수 있는 일시적인 관대함일까. 그럴 수도 있지만 지금으로선 영 그럴 것 같지 않다. 혹시 여성이라서 학습된 태도일까. 물론 모든 여성이 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모든 남성이 같지 않듯이.
또 다른 가능성도 떠올려 본다. 나는 주로 누군가를 이해하려다 실패해 분노하곤 했다. 모두를 이해할 넉넉한 품을 가진 것도 아니면서 섣부른 이해를 시도했고 결국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느냐는 피해의식만 쌓아갔다. 그저 스쳐지나 보내면 되는 짧은 인연이었을 뿐인데.
하지만 도로 위에서는 그럴 일이 없다. 누군가 굳이 나를 골라서 골탕 먹일 리가 없으니 약간의 불편을 겪더라도 피해의식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깊게 이해하려 하거나 이해에 실패할 일도 없다. 이 순간이 지나고 나면 다 괜찮아질 테니까. 그래서 나는 관대해지는지도 모른다.
어떤 것이 내 진짜 성격일까. 쉽게 상처받는 나와 한없이 관대한 나. 어설픈 추측과 고찰을 해볼 수도 있겠지만 과연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싶다. 이런 비유가 어떨지 모르지만 평소 저염식을 먹는 나인데, 라면을 먹을 때만큼은 물을 적게 잡아 유난히 짜게 먹는다. 둘 다 내 진짜 입맛이다.
결국 사람을 알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모습을 다 봐야 한다는 시시한 결론을 내리게 된다. 모든 행동이 그 사람을 보여주니까. '나도 모르게' 같은 실수를 하는 사람은 그 역시 나의 일부라는 것을 인정해야 할 테다. 그리고 더 마음에 드는 나를 키워가는 것이 어떨까.
나는 운전할 때 관대해지는 내가 마음에 든다. 실력이 늘더라도 쭉 이렇게 운전하기를, 일상 속에서도 더 관대한 나를 만나기를 바라본다. 상처받을 일은 기어코 생기겠지만 쉬이 흘려보내고 또 다른 인연에 대한 기대감으로 설렐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