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하는 것을 한다는 것
예전에는 녹색 운전면허증이란 것이 있었다. 아마도 5년 이상 무사고, 무벌점을 달성한 경우 발급되었던 것 같다. 검색을 해봐도 관련 정보가 많지 않은 것으로 보아 진작 폐지된 듯한데 나는 철없던 시절, 이미 이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다름 아닌 엄마가 그 녹색 운전면허증을 소지했기 때문에.
운전을 한 뒤 겁이 더 많아져 교통 상황을 주시하게 되었지만 어릴 때는 그렇지 않았다. 멀미가 심해 차창을 열고 바깥공기를 마시느라 바빴지만 도로를 살핀 적은 없다. 신호 체계에 대한 이해도 없어서 보고 있어도 보는 게 아니었다. 아슬아슬한 상황이 지나가 주변 사람들이 가슴을 쓸어내려도,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엄마가 운전할 때만큼은 달랐다. 감정 표현이 풍부한 가정이 아니었음에도 나와 언니, 동생은 롤러코스터에 탄 양 소리를 지를 때가 많았다. 엄마는 일방통행을 잠시 어기는 정도가 아니라 왕복 4차선 도로에서 역주행으로 달린 적도 있다. 무려 지하철 한 정거장의 거리를. 초행길도 아니고 매주 일요일마다 다니는 길이었는데.
엄마 역시 뭔가 잘못되었음을 알았지만 당황한 나머지 해결책을 떠올리지 못했던 듯하다. 그날 우리는 평생 들어야 할 경적 소리는 다 들었을 것이다. 엄마는 그 후에도 운전대를 잡았지만 술에 취했다는 의심을 사 순찰차의 검문을 받기도 했고 차량 한쪽을 깊은 고랑에 빠뜨려 수습을 어렵게 만들기도 했다. 결국 운전을 포기하고 한참 후, 녹색 운전면허증이 발급되었다.
그 제도가 유지되었다면 나 역시 녹색 운전면허증 소지자가 되었을 것이다. 2008년에 면허를 땄지만 2022년까지 한 번도 운전을 하지 않았으니 명실상부한 무사고다. 운전자가 아니었을 뿐.
고백하자면, 사실 무사고라고 하기에도 찔리는 부분이 있다. 나는 운전면허학원에서 기능 연습을 하던 중 표지판 하나를 들이받았다. 표지판도, 차도 멀쩡했고 작은 흠집은 이미 너무나 많았으므로 관리자도 가볍게 웃고 넘겼다. 나는 잔뜩 위축되었지만 다행히 기능 시험은 백 점 만점으로 가볍게 통과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이후 도로 연수를 받다가 또 사고를 쳤다. 변명을 하자면, 기록적인 폭설이 내린 날이었다. 그런 날은 베테랑 드라이버도 운전을 삼가야 하건만 학원에서는 예정된 수업을 진행하지 않으면 수강회차를 차감한다 했다. 그놈의 돈이 뭔지, 나는 꾸역꾸역 나갔고 차선도 하나 보이지 않는 도로 위에서 엉금엉금 거북이 운전을 했다.
내 운전이 믿음직스러웠는지, 피로에 굴복한 것인지, 조수석에 앉은 강사님은 어느새 잠이 들었다. 나는 겨울왕국으로 변해버린 도로 위의 고요함을 즐기며 신호에 맞춰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아뿔싸. 차가 멈추지 않고 스르르 미끄러져 앞차에 닿고 말았다. 내 느낌에는 과연 닿았나 싶을 정도로 살짝이었지만 앞차 운전자는 TV나 영화에서 익히 봐왔던 대로 뒷목을 잡고 내렸다.
큰 사고가 아니었고 학원과 보험사에서 모든 수습을 했지만 나는 한번 더 위축되어 운전에 대한 열의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 옛날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나는 유면허 비운전자로서 십여 년을 살았다.
평생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정 필요하다면 택시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자차를 가진 적도 없고 내내 이렇게 살아왔으니 크게 불편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할머니의 장례식 날,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그녀와 가장 각별하던 막냇삼촌이 제일 늦게 내려오게 되었는데, 시외버스는 끊겼고 가족 중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삼촌은 큰 수술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아 운전을 하기엔 무리였고 다른 가족들은 나와 같은 생각으로 면허도 따지 않았던 것이다. 삼촌과 숙모, 사촌들은 간밤의 답답함을 토로했다. 서울에 사니 운전하지 못해 불편하다고 여긴 적이 없었는데 출발하지도 못하고 밤을 지새우며 너무도 괴로웠다고.
게다가 아빠는 그날, 어딘가 모르게 이상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아무리 예상 가능한 이별이었다 해도 그도 처음 겪는 일인지라 큰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같다. 그러니 같은 말을 반복하고 말을 하다 문득 멈추고 상주석에서 잠이 드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어리둥절했다. 할머니가 떠나셨으니 아빠는 영락없는 독거노인이 된 상황. 여러모로 운전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래서 작년부터 운전대를 다시 잡았다. 면허를 딴 것이 14년 전이고 면허만 땄을 뿐 운전을 해본 적이 없으니 '다시'라는 말보다는 처음이란 말이 어울린다. 바들바들 떨며 운전하기를 한 달. 겨우 용기를 내어 혼자 길을 나선 날, 또 사고를 내고 말았다. 공사 중이라 도로가 막힌 상황에서 무리하게 옆 차선으로 들어가려다 접촉사고를 낸 것이다.
그것이 마지막이라고, 그 후 운전이 일취월장했다고 큰 소리 뻥뻥 치고 싶지만, 그렇지는 않다. 차엔 나의 실수를 드러내는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처음엔 흠집이 나자마자 수리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대로 두게 되었다. 한 가지 위안이랄 것은 그 모든 일들이 운전을 한 지 3개월 이내에 일어났다는 것이랄까.
이제 운전대를 잡은 지 1년 반쯤. 그래서 지금은 곧잘 하느냐고 묻는다면 조용히 고개를 저어야겠다. 편도 네 시간 거리의 시골을 매달 한두 번은 다녀오고 서울 시내도 별 탈 없이 활보하고 있지만 여전히 어설프다. 콩알만 한 자신감이 생길라 치면 심장이 덜컹하는 일이 생겨 다시 쪼그라들고 마니 베테랑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과연 이 쫄보가 태평하게 운전석에 앉는 날이 오기는 할까.
그럼에도 나는 하고 있다. 못한다는 것을 겸허하게 인정하며, 포기하지 않고. 앞서 가는 차를, 마주 오는 차를 모두 고마운 선배로 여기며. 처음부터 잘하면 좋겠지만 어떻게 모든 일을 잘할 수 있으랴. 못하는 것을 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런대로 잘 살고 있다는 뜻은 아닐까.
그 옛날로 돌아간다면 엄마에게 잘하고 있다고, 기죽을 것 없다고 말해줄 텐데. 다음엔 또 어떤 못하는 것을 해볼까. 상상만으로도 즐거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