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황작물 Dec 15. 2023

무수한 캣콜링에 웃으며 화답했다

캣콜링이란 남성이 거리를 지나가는 여성을 향해 성희롱적 발언을 하거나 휘파람을 부는 행위 등을 말한다. 이는 여성의 활동 반경을 위축시키는 명백한 성폭력이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여성 혼자 외출한다는 것은 무수히 많은 캣콜링에 노출된다는 것을 뜻한다. 게다가 나는 눈에 띄는 외모를 가진 외국인이었으므로 더욱 쉬운 표적이 되었다. 전형적인 수법일까. 차를 타고 지나가는 이들이 유독 심했다. 그들은 속도를 줄이거나 때로는 완전히 멈춰 서서 휘파람을 불고 말을 걸었다. 니하오부터 곤니찌와까지 난무했고 차에 타라고 손짓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때마다 나는 활짝 웃었다. 만면에 웃음을 띠고 손을 크게 내저었다. 때로는 그들이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며 미소를 지었다. 캣콜링이 좋아서 몸 둘 바를 몰라 그랬느냐고? 그럴 리가 있겠는가.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분노가 치솟아 그들의 오늘 일진이 무척 사납기를 기도하고 싶은데.


나는 그들의 말을 조금도 알아듣지 못해서 웃을 수 있었다. 낯선 사람을 휘파람으로 부른다는 것은 상상도 해본 적이 없어서 그 안의 조롱이나 비하도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그들이 외국인인 나에게 호의를 베풀고 싶어한다고 생각했다. 길을 알려주거나 태워주거나. 하지만 그 호의를 받고 싶진 않으니 양손을 내저으며 상냥하게 거절한 것이었다. 


나는 1년 가까이 그 일을 반복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일은 식당에서 성추행을 당한 것이다. 화장실 앞에 있는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있는데 누군가 내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헷갈리거나 모호하게 스치고 지나간 것이 아니라 도저히 무시할 수 없도록 찰싹. 


깜짝 놀라 주변을 살폈지만 내 곁에 있는 것은 열띤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 남성뿐이었다. 내용은 하나도 알 수 없지만 무척 진지하고 심각해 설마, 설마 이들 중 한 명이 내 엉덩이를 만졌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무리 상상을 초과하는 일이 벌어졌다 해도 스스로의 감각과 인지능력을 믿어야 하건만, 나는 쉬운 길을 택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고 믿기로 한 것이다. 


모든 퍼즐을 꿰맞추게 된 것은 거주 등록 문제로 남편의 현지 코디네이터 역할을 하는 직원과 운전사, 내가 함께 차량으로 이동하던 때였다. 그날은 내가 그곳에서 사귄 친구 L도 함께 했는데, 그녀가 영어에 능통하기에 우리는 친해질 수 있었다. 그때 조수석에 앉은 직원이 거리의 여성을 향해 예의 그 캣콜링을 하며 킬킬댔고 L의 표정은 싸늘해졌다. 나는 그제야 뭔가가 있음을 직감했다.


L은 나와 둘이 남게 된 뒤 이야기했다. 그들은 엄청나게 저급하고 성적인 말들을 했노라고. 흔한 일이긴 하지만 직장 상사의 부인이 타고 있는데도 그런 일을 벌이다니, 좀 당황스럽다고. L은 그가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확신하며 그의 인성을 깎아내렸는데 내 귀엔 더 이상 들어오지도 않았다. 


내가 1년 넘게 들은 것이 성희롱이라니. 그 말에 일일이 웃으며 반응했다니. 내 미련함에 치가 떨렸다.


내가 우즈베키스탄에서 가장 후회하는 한 가지는 우즈베키스탄어를 배우지 않은 것이다. 나는 시장에서 매일 써야 하는 말들, 가령 얼마인지 묻고 주문하고 고맙다고 인사하는 법은 배웠지만 그 이상은 배울 의사가 없었다. 솔직히 말하건대, 우즈베키스탄어를 배우는 것이 내 인생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만약 시간을 되돌린다면 나는 반드시 그 언어를 배울 것이다. 그리고 말할 테다. 부끄러운 줄 알라고. 그 말 한마디에 성폭력을 일삼는 자들이 개과천선 할 리야 만무하지만 적어도 내 스스로를 무기력한 허수아비로 인식하진 않을 것이다. 아니, 눈치라도 좀 빨랐다면 한국어로라도 찰진 욕을 선사할 수 있었는데. 통탄스러운 지고. 


내가 경험한 우즈베키스탄에 대해 말하자면 망설임이 앞선다. 내가 보고 겪은 것만이 유일한 진실은 아니며 의도가 어떻든 왜곡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 비루한 자들은 우즈베키스탄의 일부일 뿐, 당연히 전부도 아니다. 안 좋은 편견을 만드는데 일조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 어쩌나. 내 경험 역시 진실이다.  

 

우즈베키스탄과 내 경험에 대한 구구절절한 부연을 하는 지금 이 순간, 내가 대체 뭐 하는 건가 싶다. 마치 세상 어딘가에는 여성을 위한 나라가 있는 것처럼. 


별 근거도 없이 선진국 취급되곤 하는 유럽 곳곳에도 캣콜링은 널리고 널렸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한국도 다르지 않다. 여성들은 일상적으로 도마 위에 올라가 평가당하고 놀림감이 된다. 성희롱을 문제 삼았다가는 까다로운 여자, 농담도 모르는 여자 취급 당한다. 우즈베키스탄에서의 경험은 여성의 지위를 새삼 일깨워주었을 뿐이다. 


우즈베키스탄 어느 공원의 한가로운 풍경


매거진의 이전글 타슈켄트에 대해 욕하기 없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