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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황작물 Dec 21. 2020

"나 오늘 가스라이팅 하고 왔어"

로빈 스턴의 '가스등 이펙트'를 기반으로 하지만, 리뷰는 아닙니다

동거인이 내게 '가스라이팅'이 뭐냐고 물어왔다. 가끔은 서로 잘 모르는 것들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는 지라 덤앤더머의 대화가 되기도 하지만, 이번엔 최근에 본 책도 있겠다, 그것을 기반으로 성심성의껏 설명을 이어 나갔다. 


"예전에 나온 영화의 제목이야. 주인공 남자는 아내를 정신 이상으로 몰아서 재산을 가로채려고 해. 그래서 그녀에게 심리적인 불안을 야기하지. 특히, 그가 그녀 몰래 창고에 가서 이것저것 물건들을 뒤질 때마다 방에 가스등 불빛이 약해지거든. 20세기 초반이니까 그랬나봐. 


여자는 그 불빛에 관한 이야기를 해. 불이 흐릿해졌다고. 남편은 그때마다 당신이 지금 정신이 쇠약한 거라고, 미친거라고 하지. 처음엔 믿지 않던 여자도 서서히 그런 생각을 하게 돼. '내가 지금 이상한가 보다!'


거기에서 따와서 한 심리학자가 은근슬쩍 심리적인 조종을 가해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것을 가스라이트 이펙트라고 명명했고, 가스등 효과라는 말로 번역되기도 하다가 요즘은 그냥 가스라이팅이라고 그대로 쓰이고 있는 것 같아. 


그런데 영화에서, 그녀는 벗어났다고 해. 어느 날, 형사인가 뭔가 하는 사람이 놀러 왔을 때, 그가 말해. 불빛이 흐려졌다고. 그때 여자는 깨닫지. 내가 미친 게 아니구나! 그래서 남편은 뜻대로 하지 못했대. 이게 정말 많은 점을 시사하는 것 같아. 사실 뭔가를 깨닫거나 수렁에서 헤어나오는데 꼭 대단한 일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가끔은 실낱 같은 작은 것, 나와 상관 없는 사람의 말이나 존재가 희망의 불씨가 되곤 하지. 


한 가지 알아둘 건, 가스라이팅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꼭 사이코패스이거나 못된 인간인 건 아냐. 가령, 엄마가 자식한테 “넌 하는 일마다 그 따위지.” 라고 한다면, 이것도 대표적인 가스라이팅이야. 그녀는 자녀를 망치려는 게 아냐. 그냥 다소 생각없이 말한 거겠지. 그런데 그 소리를 들은 자녀가 “난 하는 짓마다 이따위야.”라고 생각한다면, 이건 당했다고 볼 수 있겠지. 


가스라이팅 가해자라고 해서 무조건적인 의도가 있진 않아. 선의일 때도 있고, 의도가 없을 때도 있어. 또, 가해자가 무조건 가해자인 것도 아냐. 어떤 커플이 동시에 서로를 가스라이팅하고 있을 수도 있어. 그런 경우 끊어내는 게 정답이지. 또 무서운 건, 어떤 사람은 자신을 가스라이팅해줄 사람만을 찾아다닐 수도 있대. 물론 반대도 있지. 자신이 쉽게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다니는 사람도 있다고 하지. 


근데 누군가 나를 괴롭힌다고 해서 그게 곧 가스라이팅은 아냐. 심리적으로 조종되어 스스로의 정신이 파괴된 경우가 가스라이팅이지. 저 자식이 또라이임을 명백히 인지한다면, 그건 가스라이팅이 아니야. 저새끼가 옳고, 내가 그르다고 느낄 때, 그때가 현 상황을 돌아볼 때야."


내 설명을 진지하게 들은 동거인은 짐짓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럼 그말 어떻게 써먹어?”

“써먹다니?”


“‘나 오늘 회사에서 가스라이팅 하고 왔어', 이런 식으로 쓰면 돼?”


나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문맥은 되는 것 같긴 한데, 그럴 순 없지 않을까. 대개는 회사에서 가스라이팅 당했다고 하겠지.”


낄낄대며 웃다가 사뭇 진지해졌다. 당한 사람은 있는데, 가한 사람은 없다. 또.




*로빈 스턴의 <가스등 이펙트>를 기반으로 했습니다만, 세부적인 사항이 다를 수 있습니다. 자세한 것이 궁금하신 분들은 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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