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이 지나도 여전한 것, 10년 만에 조금은 달라진 것.
이 정도면 오래 더 살아낸 것 같고,
멀리 온 만큼 많은 것을 보고 깨달은 것 같은 10년.
이식 10년 만에 병원을 졸업했다.
10년의 시간의 흐름이 잘 느껴지지 않게 나는 늘 그대로라는 생각을 했는데, 뒤돌아보니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어떤 것은 나은 방향으로, 또 어떤 것은 어쩌면 아팠던 그 순간이 차라리 더 나았다 싶게.
오늘 아침은 어쩌면 늘 한결같은 나인가를 원망하며 집을 나섰다.
올봄과 여름사이 앙이를 잃고, 올 가을과 겨울 사이 팡이를 잃고, 이제는 아빠마저 떠나시려는가 싶은 요즘의 나날에, 그래도 이식 10주년이라고 예약해 놓은 외래를 가지 않을 수 없어 급히 차표를 예매했었는데, 정말 어처구니없게도 진료시간에 딱 맞춘 게 아닌가.
집에서 나가면서 받은 병원 외래 안내 문자에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니, ‘피검사 1시간 반 전 도착’을 10년이나 해왔는데. 이걸 까먹을 수가 있네. 내가 이렇게 정신이 없네.'
급히 병원에 전화를 해보았으나, 담당 교수님은 이틀 연속 외래예약이 어렵고 오후 외래인 아래연차 부교수도 휴진이라고 한다. 도착 시간 후에 최대한 빨리 피를 뽑고 교수님의 외래 대기가 늘 그렇든 길어지고 있기를 바랄 수밖에. 서울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다시 머리가 터질 듯이 아파왔다. ‘아, 다음 주는 아빠에게 가야만 하는데...’ 꼬이는 스케줄에 질끈 두 눈을 감았다.
여전히 덤벙대는 나인 것을 역시나 원망하던 나였다.
그러나, 두 눈을 감고 애써 지난밤 이루지 못한 잠을 채웠다. 머리를 비우고 마음을 토닥이며 2시간을 빠르게 흘려보냈다. 전이라면 필시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인데, 어찌 또 밤새 선물용 그림을 그리고 10년 전 사진을 뒤적이다 잠들어 피곤한 덕에 쉽게 잠에 들 수 있었다.
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아주 빠르게 걸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이 병원에 다닌 11년 동안 가장 빠른 걸음으로 병원에 도달했다. 언제나 숨이 차 몇 걸음 걷다가 쉬거나 바로 건너편에 있는 병원을 가기 위해 할아버지 할머니, 혹은 다른 환우들 사이에서 셔틀버스를 기다리곤 했었는데 오늘 가장 빠르게 힘들지 않게 금세 도착했다. 그것을 인지하자, 이상하게도 병원에 들어선 순간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래, 이렇게 조급한 마음이어도 두 다리는 잘 걷고 숨이 차지 않네.. 그럼 됐지. 그걸로 감사해야지. 안되면 다시 잡고 와야지 뭐. ’
그때부터 차분히 주위를 둘러봤다. 먼저 보이는 것은 성당 앞의 트리 장식이었다.
그리고 10년 전 무균실에서 퇴원하며 보았던 크리스마스트리가 선명히 떠올랐다.
10년 전 그 트리를 보며, 크리스마스에는 꼭 집으로 돌아가겠다던 약속을 지킬 수 있게 해 주어 감사하다고 이곳의 모든 환자들과 보호자들이 슬프지 않기를 기도했던 순간도 함께.
예전엔 BMT센터였던 지금의 혈액병원 입구를 통과하자 익숙한 공간에 낯선 풍경을 보았다. 언제나 꽉꽉 차 있던 그곳이 왜 이리 휑한 건지. 잠잠했던 불안감이 빠르게 다시 솟구쳤다. 번호표를 뽑고, 피검사를 요청하자 아니나 다를까 오늘 대기자가 없어 내가 마지막 외래이므로 채혈은 오늘 안된다며 교수님을 먼저 보라는 답이 왔다. ‘아, 또 혼나겠구나.’ , ‘일이 결국 꼬이는구나,‘ 불안감과 두려움은 이전의 좋지 않았던 기억들을 불러일으키려고만 했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뭘까?‘
나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는 최근에 약을 타러 갔던 병원에서 한 피검사 기록을 재빨리 물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원래는 서류를 띄러 와야 하는데 급한 대로 백혈구, 혈색소, 백혈구 수치만이라도 알려줄 수 없냐는 내 요청에 수락을 해주었다. 마음이 한결 차분해지며 내 이름이 올라가는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곧이어 익숙한 목소리의 교수님 전담 간호사님이 반갑게 이름을 불렀다. 오랜만이라는 반가운 눈빛과 함께.
교수님은 아까의 내 상상 속의 모습과 달리 환하게 웃으며 잘 살다 왔냐고 웃어주셨다. 나도 혼날 걱정은 내려놓고 인사를 했다.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하고 지난 1년간의 혈액수치를 적은 종이를 내밀었다. 살이 빠지진 않았는지 묻는 교수님에게 쪄서 문제라 답했다. 함께 웃으며 지난 기록을 검토하시더니 질문을 이어갔다. 특별한 증상이 없냐는 질문에 가끔 스트레스를 받으면 잇몸출혈이 있고 피곤하면 대상포진처럼 쓰라림과 이명이 온다는 정도로 그간의 컨디션을 설명했다. 최근, 한동안 힘든 일들이 연속적으로 있어 그랬으리라 짐작했기에 이유는 굳이 얘기하지 않았다. 수치상 혈액과는 관계가 없을 것 같다며 교수님은 이어 말했다.
"10년이 지나도 간혹 재발이 일어나기도 해요. 그러나 환자분은 지난 시간 동안 수치가 안정적이기에 그럴 가능성은 낮아 보입니다. 보통 10년이 되고 안정적이면 환자들에게 더 올지 말지 결정권을 줍니다. 어떻게 하고 싶어요? 근처 병원에서 혈액검사만 주기적으로 해도 될 것 같아요."
작년의 잦은 하혈과 잇몸 출혈로 재발을 걱정했던지라 올해도 좋지 않은 컨디션 때문에 불안감을 떨치지 못했는데 이상하게도 그냥 그 순간, 오늘의 10년의 여정을 끝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교수님께 오늘까지만 그럼 뒤늦게라도 피를 뽑고 어플로 수치확인을 하겠다며, 지난 10년간 정말 감사했다고, 정중히 인사를 드리고 진료실을 나섰다.
10년간 다니던 병원을 예약 없이 가려니 괜스레 마음이 촉촉해져 익숙했던 곳곳을 사진에 담았다. 이곳에 온 11년 전부터 이식을 하던 10년 전, 그리고 이식 후 2주마다 다니던 주사실에서, 복도에서, 병원 곳곳의 기억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지역 병원에서는 입원해서 받는 골수 검사를(심지어 나는 희귀 케이스라며 학생들이 참관하여 엉덩이를 까는 수모를 받았던) 이곳에서는 당일에 받고 4시간 만에 퇴원을 하며, 밥먹듯이 하는 수혈정도는 앉아서 받는 주사실의 풍경들. 언니들과 여긴 정말 환자 공장이라고 표현했던 그 모습들, 그러나 나중에는 그 또한 일상이 되었던 나날들.
하염없이 다음에 보자고 기약 없이 수혈만 받던 날들, 유일한 완치법이지만 30% 생존 30% 재발 30% 사망인 이식을 준비하자고 처음 듣고는 감격과 두려움을 함께 느끼던 날, 오빠의 유전자가 100일 치가 아니라고 실망했던 날, 공여자가 모두 거부했다고 좌절하던 날, 하필 그날 또 난자냉동에 대해 물었다가 이식 코디네이터와 얼굴을 붉혀 엉엉 울면서 나오던 이식 코디네이터실.
이식 후에도 씩씩하게 혼자서 고속버스에 소독액 뿌려가며 다니고, 다양한 검사와 협진된 여러 과들을 스케줄에 맞춰 착착 돌아다니던 순간들, 진료 틈새에 시간 맞춰 만난 환우 언니들과 그저 반가움을 나누고 우리만이 알 수 있는 공감으로 가득한 수다를 떨며 안정을 찾던 복도.
신자도 아니면서 엄지 언니 덕분에 궁금해서 들어가 어색하게 앉아있던 1층 성당, 환자 공장 같은 주사실과 복도가 싫어 홀로 찾던 지하 물멍존, 불안이 찾아들 때면 팔찌를 돌리며 안정을 찾던 내가 염주 팔찌를 잃어버리고 예뻐서 샀던 묵주 팔찌를 파는 가톨릭 용품점에서는 마지막으로 묵주 팔찌를 하나 더 집어 들었다.
마지막으로, 지친 외래에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다 갔던 1층의 파란 수조관에서, 마지막 안녕을 담았다.
이후 예정된 약속으로 정신없이 점심을 먹고, 저녁이 되어서야 집으로 가는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늘 그랬듯이 나는 블루투스 키보드를 꺼냈다.
(그래서 이렇게 또 정말 오랜만에 글을 쓰고 있다.)
그리고 어젯밤 뒤적였던 10년 전의 기록들을 떠올렸다. 두려움에도 주변의 나를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차근히 나를 살려가는 모습으로 가득했다.
지난 10년의 시간 동안 나는 언제 아팠느냐는 듯이 일상을 찾고 건강해진 듯 살아갔으나, 나의 건강 외에도 많은 이유들로 여전히 불안하고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아왔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조차 나답게 곧잘 웃어내었다. 울음은 또 있는 그대로 잘 쏟아내기도 하며.
무엇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는가 생각해 보니, 그 답은 나의 사진들 속에 있었다. 나는 자주 그날의 하늘에, 순간에 마음을 털어놓았고 그 순간의 소중함을 감사하며, 매번 다른 순간의 하늘을 만끽했다. 또한 종종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책 속의 문장들을 마음에 새기고, 나를 위로하는 글을 쓰며 있는 그대로의 나를 스스로 달랬다.
신기하게도 10년 전, 한 책 속의 글귀를 찍은 사진에 오늘 아침의 내가 담겨있었다.
그렇다. 나는 늘 자책을 해오며 스스로를 괴롭혔었다. 아마 나의 병의 원인이 유일하게 ‘스트레스’로 정리되는 것은 나의 그런 성격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죽음 앞에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찾아낸 내 안의 빛이 나를 밝혀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한다. 10년간 달라지지 않는 일상의 지침에도, 계속해서 찾아오는 삶의 고난들 속에서도, 나는 늘 나를 살리는 선택들을 잘해왔다. 언제나 나의 평온을 위한 선택을 했다.
혼자서도 토닥이고 다시 웃으며 즐길 수 있는 것들을 찾아냈고,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사람들과 그 시간을 견뎌냈다. 그 속에 빛나는 나를 누구보다 사랑했다.
나를 자책하는 시간은 줄이려 애쓰고, 지금 이 순간의 최선을 찾는 것에 집중했다. 당장에 최선이 없다면 그저 그것이 나를 해치지 않을 수 있도록 생각을 닫기도 했다. 그래야만 숨을 이어갈 수 있기에.
그렇게 10년의 시간이 흘렀다.
많은 것들이 바뀐 지금, 나는 여전하다.
비슷한 상황들 속에, 나는 조금 달라졌다.
나는 전처럼 밝고 맑은 나를 지켜왔다.
그러나 나는 조금 더 깊어지며 그 안에서 스스로를 정화하는 힘을 길러냈다.
11년 전, 이 병을 만나고, 숱한 악몽 속에 살아가던 날에, 한 꿈을 잊을 수 없다. 온 세상이 마그마로 뒤덮이던 꿈, 그 속에서 살아낼 방법은 주변에 지나는 강물로 뛰어들어야 하는 거라던 그 꿈. 정신건강증진센터장님과의 꿈치료를 통해 분석한 그 꿈은, 내가 살 수 있는 방법은 온천이 되는 것뿐이라 했던 그 꿈.
지금에야 그 꿈이 말하고자 하는 온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만 같다. 세상을 뒤엎어 멸망시킬 수 있는 그 마그마도 잘 다스린다면 주변의 물을 따스히 만드는 온천이 될 수 있다. 그 온천에서 나를 녹여내고 치유하며 언젠가는 또 다른 이에게도 쉼을 줄 수 있는 좋은 공간이 되지 않겠는가.
10년 전 이식을 받을 당시만 해도 내가 받은 반일치 이식의 생존율이 증명된 시간이 고작 5년에 불과했다. 그러나 나는 그 배를 이미 살아냈다. 어찌 보면 어린 나이에 진단이 내려졌기에 내 생은 왜 이리도 짧은가 슬퍼하기도 했던 순간이 없지 않다. 하지만 결국 나는 내 생을 조금 더 이어 더 오래 살아가고 있다. 나는 이토록 소중한 삶을 나를 사랑하는 이들과, 또한 내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아낌없이 마음을 나누면서 살아간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늘 남들과는 다른 삶이라, 왜 이토록 나는 평범해질 수 없는가, 늘 꿈꾸던 평범한 삶에 언제쯤 도착하는지 내 꿈은 왜 이리도 멀리 있는 건지 세상을 원망하던 순간도 분명 많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나의 삶이 남들과는 다른 이유로, 나는 더 많은 것들을 느끼고 깨달으며 살아왔다는 것을.
오늘의 발걸음 끝에서, 마지막 외래라는 생각에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기 직전 아주 짧은 순간에 눈길을 사로잡은 곳이 있었다.
엄지 언니와 중지언니와 함께 로또를 샀던 그곳.
다 함께 수혈을 받고 외래를 보고 맛있는 것을 먹고 집으로 가기 전 로또를 선물했던 언니.
로또 될 확률이 이 병 걸리는 확률보다 낮다던 언니.
백만분의 1로 걸리는 이 병에 걸린 우리가 어쩌면 정말 인생의 로또인 걸 지도 모른다고 했던 나의 말이 떠오른다. 신이 나에게 이 병을 보낸 건, 나 스스로가 지금 어떠한지 되돌아보고 꼭 나의 상태에 맞게 조절하며 살아가라는 진정한 로또였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나는 조금만 예민해지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명이 들리고 피가 난다.
그러면, 정신이 번쩍 든다.
‘아. 내가 이러면 나만 손해지. 내가 나를 해치는 생각은 버리자.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내가 나를 지키는 것이지. 나를 소중히 여기고 나의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는 것 그것 보다 먼저인 것은 없지.’
그 생각으로 문자를 보냈다. 나를 살린 것이 태어나 가장 잘한 일이라는 걸 카톡 프로필 사진으로만 알리는, 나의 헛된 꿈을 걱정하면서도 작은 발걸음에도 자랑스러워하는, 지금도 아빠의 마지막 순간들에 힘들어하면서도 최선을 다하는 츤데레 오빠에게. 고맙다고. (사랑한다고는 차마 못함.)
그리고 로또 두 장을 샀다.
10년 전 퇴원 후 크리스마스에 감격하며 먹었던(혹시 몰라 전자레인지에 한 번 더 돌린) 치킨 한 조각을 떠올리며 치킨도 한 마리 샀다.
10년 전에도, 모두를 떠나보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결국 나를 웃게 하는 그에게 로또 한 장을 선물했다.
그동안 고마웠다고, 고생했다고,
지금 우리의 힘겨움에도 덕분에 울고 웃어낸다고.
(나머지 한 장은 이제 병원과 이별한 내 거다. MDS로또 10년 졸업했으니 진짜 로또 운이 오기를 바라며)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말해주고 싶다.
수고했다 10년 동안. 물론 우리에게 끝은 없지만.
그래도 정말 고생 많았다고.
이렇게 잘 살아내줘서 고맙다고.
앞으로도 역시 늘 그렇듯 나를 잘 지켜가 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