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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세젤이맘 Feb 28. 2021

옷장 속, 나의 마이클

싸니까 필요해지는 감정소비





2019년 12월, 빨간 체크무니 교복 치마를 입고 여고 교정을 거닐던 여고 동창생들은 대만행 비행기를 탔다. 3박 4일, 우리들만의 해외여행이다. 아이들과 집안일은 잠시 미뤄두고 손, 발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여행. 대만 주재원으로 나가게 된 남편을 따라 친구 중 한 명이 대만살이를 하러 갔다. 우리끼리 해외여행 가기에 이만한 조건이 또 있을까?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일 수도 있었다. 우리는 친구가 대만으로 떠나기 전부터 우리들만의 여행 계획을 세웠었다.

 

해외여행 전 빠질 수 없는 것은 단연 면세품 쇼핑이다. 출국 전 미리 온라인 쇼핑몰에서 구매를 한 후 공항에서 물건을 받는 시스템이다. 해외여행에 대한 설렘도 좋지만 온라인 면세 쇼핑몰을 들락날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때쯤 갑자기 단톡 방에 불이 났다. 전화벨인지 카톡 벨인지 헷갈릴 정도로 연이어 울려대는 진동소리. 대만 친구 남편이 미국 출장 중에 제법 큰 규모의 면세점에 가게 됐고, 유명 브랜드 가방이 50-60% 폭탄세일 중이니 맘에 드는 가방을 고르면 사다 주겠다고 했다. 친구 남편이 면세점에서 찍은 사진들이 계속 올라왔다. 올라오는 가방의 브랜드를 찾아 맘에 드는 가방을 찾기 시작했다. 시간이 없었다. 친구 남편이 면세점을 떠나기 전 제품을 골라서 알려줘야 한다. 마이클 코어스 화이트 토트백이 눈에 들어왔다. 금박 장식이 세련되게 박혀있고 사이즈도 적당했다. 나뿐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모두 그 가방을 맘에 들어했다. 최종 구매 결정을 하기 전 친구 남편은 면세점을 나와야 하는 시간이 되어버렸다. 급한 마음에 대만 친구는 남편에게 그 하얀 토트백 3개를 사 오라고 해버렸다. 가방은 3개, 갖고 싶은 사람은 4명.


대만을 가는 것도 설렜지만 떠나기 전 재밌는 에피소드 하나가 더 생긴 우리는 매일매일 카톡방에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대만에 도착 해 실제로 본 마이클 가방은 생각보다 훨씬 예뻤다. 청바지에 재킷을 즐겨 입는 나에게 회사 다닐 때 가지고 다니기 딱 좋은 가방이었다. 가방을 실제로 보고 나니 아무도 양보하지 않으려 했다. 견물생심. 옛말은 다 진리였다. 결국 가위바위보로 결정하기로 했다.


대만 여행 첫날이었던 그날, 우리는 충분히 흥분한 상태였고 이런 작은 에피소드가 생겼다는 사실만으로도 즐거웠지만, 살짝 욕심이 나는 건 사실이었다. 미묘한 긴장감 속에 발로 가위바위보를 하자고 제안했다. 뭐? 발로? 이제 갓 마흔 줄에 들어 선 엄마들은 그 순간만큼은 여고생으로 돌아가 흔쾌히 발 가위바위보를 했다. 마치 가방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지금 이 순간, 추억놀이에 빠져있는 듯 보였지만, 최종 가방 주인이 결정되자 승자는 환호성을, 패자는 얼굴을 감싸 안고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 캐리어에는 가위바위보로 획득한 마이클 코어스 하얀색 토트백이 담겨있었다. 청바지에 재킷, 굽 있는 구두를 신고 하얀색 가방을 들고 출근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저절로 웃음이 났다. 가방도 예뻤지만 60% 할인된 가격으로 마이클 가방을 샀다는 사실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요즘 1+1으로 제품을 판매하는 경우가 많다. 온라인상 공동구매나 핫딜도 인기다. 평소 자주 사용하던 생필품이 핫딜로 뜬다거나 마트에서 대폭 할인하는 경우 지금 당장 필요하지 않아도 미리 다량의 제품을 사놓는 경우가 많다. 일명 쟁여놓기.


옷이나 가방도 마찬가지다. 백화점에서 브랜드 제품이 세일을 하는 경우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향한다. 장바구니에 없던 구매 목록이지만 세일 기간이라면 일단 가서 봐야 직성이 풀린다. 워낙 고가의 상품들이라 세일을 해도 몇십만 원 단위다. 그래도 브랜드 상품이면 품질은 어느 정도 보장되지 않는가. 찬찬히 여러 개의 제품들을 어보다 괜찮은 상품을 발견하면 고민이 시작된다. '출근할 때 입으면 예쁘겠다, 집에 있는 청바지와 잘 어울리겠어, 이렇게 세일할 때 안 사면 후회할 거야, 집에 있는 재킷과 비슷하지만 디자인이 조금 틀리잖아?, 당장 입지 않아도 더워지면 입겠지?' 이 제품을 사야 하는 이유는 수십 가지다. '예상에 없던 지출이다 사지 말아야 한다' 사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다.



        사야 하는 수십 가지 이유 VS 사지 말아야 하는 한 가지 이유




백화점 매대에 70-80% 할인된 이월상품이 진열되어 있다. 사각형 매대 주위로 소비자들이 빙 둘러 자리를 차지한 채 옷을 고른다. 사람이 너무 많아 손만 집어넣어 옷을 골라야 하는 경우도 있다. 매대 위의 할인 제품들이 빠르게 소진되고 있다. 맘에 드는 후드티가 보이고, 사이즈가 몇 개 안 남은 것 같다. 가슴이 콩닥콩닥, 나까지 기회가 오지 않을까 조급해지면서 제품을 찬찬히 살펴볼 여유도 없어진다. 일단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사려는 걸 보면 분명히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제품임에 틀림없다. 가격, 품질, 유용성 등 여러 면에서 괜찮다는 것이 증명된 거 아니겠는가


이처럼 우리는 왜 당장 필요하지 않아도 저렴에 가격에 구매할 기회가 생기거나, 경쟁자가 있는 경우 더 조바심이 나는 걸까?


포 모신 드롬(FOMO Syndrome)이란 말이 있다.

'Fear of Missing Out'의 약자로 어떠한 것을 놓치거나 제외될 상황에 대한 두려움을 말한다. 이는 소비자 심리 측면에서 보면 어떤 상품이나 서비스를 구매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특가 세일을 하는 경우, 한정 판매를 하는 경우, 공급보다 수요가 많은 경우, 거기다 눈 앞에 경쟁자가 많은 경우 지금 당장 필요하지 않은 물건이더라도 계획에도 없던 충동구매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우여곡절 끝에 대만에서 건너온 나의 마이클 가방은 1년 넘게 옷장 속에 그대로 보관되어 있다. 둘째가 어린이집에 가기 시작했고, 7세, 3세 아이 둘을 챙겨 등원을 시키고 출근을 하게 된 나는 자연스럽게 조금 더 편한 신발, 편한 옷을 찾게 되었다. 물티슈, 마스크, 간식 등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니 가방에 넣고 다녀할 물건들도 많아졌다. 큼지막하고 마구 굴려도 괜찮을 그런 가방에 더 손이 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옷장 속 마이클의 존재 자체도 잊어버린 채 그렇게 일상이 흘러갔다.



나는 도대체 대만에서 무엇을 가져온 것일까




돈으로 움직이는 자본주의 사회는 소비를 부추기는 사회다.

티브이를 봐도, 핸드폰을 봐도, 밖에 나가봐도 수많은 제품들이 뿌리치기 어려운 방법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60% 세일된 가격과 경쟁심리에 사로잡힌 나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참 다루기 쉬운 나약한 소비자였다.

나의 소비는 그냥 구매로 끝나고 말았다. 구매를 위한 소비. 그렇게 싸니까 필요해진 상품은 한 번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채 옷장 한구석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다. 덕질도 아니다. 차라리 덕질 구매였다면 애초에 구매 목적이 달랐으니 조금은 위안이 됐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왜 당장 필요하지도 않은 가방을 사서 1년 동안 옷장 속에 보관해 두고 만 있게 된 걸까, 그 가방을 통해 무엇을 얻고 싶었던 것일까, 부족한 나의 무엇을 채우고 싶었던 것일까


가방을 메고 출근하는 나를 바라보는 주변인들의 시선을 상상했을 때는, 이 가방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3개밖에 없는 가방의 개수는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평소보다 저렴하게 물건을 살 수 있다는 세일 가격은 내가 이 가방을 살 수밖에 없는 이유를 더 합리화시켰다.


소비는 감정이었다. 불안, 경쟁심, 그리고 자존감과 맞물려 있었다. 불안한 마음은 가방을 사면서 해소가 됐고,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으려는 심리가 발동을 했다. 그리고 가방을 통해 나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조금 더 나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현실의 나는 매일매일 이상적인 나를 따라가려 한다.

따라가지 못하는 그 간극 사이에서 나를 위로하는 달콤한 방법, 감정소비.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감정에 사로잡힌 소비의 결과는 후회와 무력해진 자존감뿐이었다.


옷장 속 나의 마이클,

나는 대만에서 무엇을 가져온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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