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지하주차장은 항상 만차다.
돌아다니고 사람 만나는 게 예전 같지 않은 요즘은 저녁 7시만 돼도 자리가 없다. 빽빽이 들어차 있는 자동차들 위로 간간히 초록불이 들어와 있는 자리로 가보면 여지없이 장애인 주차구역이다. 이 자리는 거의 매일 비어 있다. 혹시나 하며 주차장을 한 바퀴 더 돌아본다. 빨간불들 사이 초록불이 2-3개씩 반짝이지만 거의 비슷한 상황이다.
같지만 다른 사람,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 같은 시공간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듯한 장애인들은 우리 삶 곳곳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그들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이 사회가 장애인들의 존재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오래된 일은 아니다. 인권의식이 그 나라의 수준을 가늠하는 잣대가 되어가면서 장애인들을 위한 제도와 시스템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버스정류장, 횡단보도, 대중교통, 백화점 등에 장애인을 위한 시설들이 들어섰고, 상대적으로 비장애인들이 이용했던 공간이 줄어들었다. 지하주차장이나 지하철 좌석처럼 지금 당장 사용하지 않아도 비워두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비워둠에 대해 불평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얼굴에 철판을 깔고 아무 거리낌 없이 그 자리를 이용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사람들이 변한 것일까? 우리나라의 인권의식이 많이 향상된 것일까? 설마, 아닌 척 하지만, 속으로는 불편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2011년 3월 평일 오후, 사무실 사람들이 갑자기 웅성대기 시작하며 티브이를 켰다. 일본 동북부 지역에 리히터 9.0 규모의 지진이 발생했고, 지진 해일에 거대한 쓰나미가 생겨 일본 열도를 덮치고 있었다. 뉴스에 나오는 장면은 딱 재난 영화였다. 사무실 사람들은 한동안 눈을 떼지 못한 채 뉴스에 집중했고, 말도 잇지 못했다. 사망자는 2만여 명에 이르고 이재민이 10만 명에 이르렀다. 재앙이었다. 어떻게 저런 일이 생길 수 있나 의아해하면서 가까운 옆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처절하고 비참한 상황에 모두들 안타까워했다.
" 아 이제는 진짜 일본 여행 못하겠네요, 일본 사람들 불안해서 어떻게 살지요? "
" 일본은 어디에다 땅을 사뒀다고 하던데 그럴 만하네요"
"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는 자연재해 없는 살기 좋은 나라라니까요 "
그리고 30분 정도 지나자 하나둘씩 자기 자리로 돌아가 다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얘기가 오가며 1시간쯤 지나자 사무실은 다시 일하는 일상을 되찾았고, 사람들은 간간히 핸드폰으로 뉴스 검색을 하면서 소식을 접하고 있었다.
1시간. 일본 사람들 2만 명이 죽어가는 생생한 현장을 보고 우리는 단 1시간 만에 우리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1시간 동안 우리는 일본의 대참사 현장을 보고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그 불행한 현장에 내가 있지 않음에 안도했다.
우리는 사고를 당하거나 슬픈 일을 겪은 불행한 사람들을 동정한다.
동정(sympathy) : 남의 어려운 처지를 자기 일처럼 딱하고 가엾게 여김
네이버 어학사전에 나와있는 동정이란 단어의 뜻이다. 딱하고 가엾게 여기는 마음 동정.
2011년 일본 지진해일뿐 아니라 우리나라와 세계 곳곳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전쟁, 테러, 전염병, 화재, 교통사고 등 많은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 코로나 확진자 알림 문자가 매일 수차례씩 울려대고, 가까운 지인이 확진됐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번씩 들려오는 이런 불행한 소식들에 긴장하고 안타까워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 불행이 아직 나에게 오지 않았음에 안도한다.
니체는 말했다.
동정은 이 세상의 고통을 증대시킨다, 동정은 쾌락을 포함하고 우월함을 적게나마 맛보게 하는 감정으로서 자살의 해독제가 된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잊게 해 주고 우리의 마음을 충만하게 해 주며 공포와 무감각을 쫓아버리고 말을 하게 하고 탄식하게 하며 행위를 하도록 자극한다. 동정에는 무언가 고양하고 우월감을 주는 점이 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우리는 이 중 장애인을 사회적 약자라고 한다. 우리에게 매우 불편한 일상을 평범한 일상으로 매일매일 살아가는 그들은 아무도 자신의 불행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고,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약자로 살아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사회적 약자라는 구분 짓기를 통해 상대적으로 강자가 되어버린 비장애인들은 그들의 불행 앞에서 안타까워하고 도움을 주기도 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 불행이 나에게 없음을 안도하고, 니체의 말대로 장애인들을 동정하며 우월의식을 느낄지도 모른다.
장애인 주차공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비워두는 우리들, 과연 어느 정도의 인권의식을 갖고 있는 것일까
얼마 전, 세바시에서 지체장애인 동생과 살아가는 언니, '어른이 되면' 프로젝트 기획자 장혜영 씨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18년 동안 장애인 시설에서 생활했던 동생을 데리고 세상에 나와 같이 생활하는 장혜영 씨는, 서로가 서로를 격리하고, 모자람과 다름을 밀어내는 이 사회에 대해 비판하면서 스웨덴의 이야기를 했다.
스웨덴은 2000년부터 모든 장애인 시설을 폐쇄했고, 시설에 격리됐던 장애인들은 모두 지역사회로 돌아갔다고 한다. 스웨덴은 그동안 어떤 필요에 의해서 운영했던 장애인 시설을 폐쇄했고, 폐쇄 후 발생한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도 마련하면서, 이제는 스웨덴 어디에서나 장애인들을 쉽게 볼 수 있다고 한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시설이라는 또 다른 격리로 구분하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 모두 어울려 사는 나라, 스웨덴. 스웨덴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선진 복지국가로 많은 사람들이 좋은 나라, 행복한 나라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스웨덴의 장애인 '탈시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와'라며 부러워하기도 하고 대단하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어떨까? 우리나라에서도 장애인 '탈시설'이라는 정책이 실현될 수 있을까?
나는 살아오면서 장애인을 직접 본 경우가 많지 않다. 그들이 이야기는 언론이나 인터넷, 책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할 수밖에 없었고, 내가 살아가는 집, 학교, 회사, 동네 공원, 지하철, 백화점 등 그 어디에서도 그들과 마주치고 어울려본 적은 거의 없다.
한국 장애인 고용공단 2020 장애인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등록 장애인은 약 260만 명이고 전 국민의 5%에 해당되는 숫자라고 한다. 국민 20명 당 1명은 장애인인 것이다. 그러나 하루에도 몇백 명씩 마주치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일상 속에서 장애인들을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구분 짓고 시설이라는 물리적 경계를 만들어 이미 우리와는 다른 사람들임을 인정한 채 살아가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스웨덴처럼 장애인 격리 시설을 없애고 그 이후에 발생할 '문제'라는 것들을 감수하자고 했을 때 과연 어느 정도 사회적 합의가 형성될지는 의문이다.
스웨덴은 장애인 탈시설 정책을 실행하고, 모든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려 살아가고 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처음부터 다른 사람이 아니었던 것처럼 모두가 경계 없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약자와 강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구별 짓는 순간, 이 사회의 편견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편견은 어느새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인간은 단 한순간도 연약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 누구도 약자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우리는 장애인과 비장애인, 약자와 강자를 구별 지음에 내재된 우월감 속에서 어설픈 인권의식이라는 단어를 내밀고 있지는 않은지 자문해보고 싶다.